겨울에는 기타를 쳤다.
겨울이 길었다. 급하게 할 일, 해야 할 일이 없던 시간에, 아이는 기타를 쳤다. 기타를 꺼내 달라는 말에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자마자 바짝 끌어안고는 소파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G-Em-C-D의 단조로운 진행은 나도 연주할 수 있어서. 어서 기타를 달라던 아이가 기타를 끌어안고 교본 책을 펼쳤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크리스마스가 지난지 얼마인데, 흰 눈 사이로 썰매를 달리느냐. 종일 캐롤을 부르다가 고된 야자 학습으로 지칠 대로 지친 한국의 한 고등학생이 ‘띠리릭’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청하지도 않은 스탠딩 공연을 시전했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그리고는 봄이 되었다. 고미숙 선생님은 그의 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서 운명을 바꿀 비책 두 개를 가르쳐 주셨다.
일간이 뭐건, 사주팔자가 어떤 격과 형식을 가졌건 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취해야 하는, 또 취할 수 있는 보편적 용신이 있다. 약속과 청소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시공간과 몸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또 말과 행을 일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 청소가 중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유불도를 막론하고 동양의 공부법은 청소를 ‘쿵푸’의 기초로 삼았다. 쓸고 닦고 정돈하고…. 요컨대, 약속과 청소,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인생역전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255-6쪽)
약속과 청소. 약속 시간에 자주 늦는 걸 고쳐야겠다 다짐을 하고, 청소를 하자. 봄이니 대청소를 하자. 봄맞이 대청소. 청소로 내 운명을 바꿔보자. 해서 청소한 것은 아니고. 거실 책상에 더 이상 물건을 놓을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책상 위를 정리했다. 책상 위와 아래, 옆과 긴 나무 의자에 올려두었던 책들을 모두 꺼내 종류별로 구분했다. 크게 6개 더미였다. 두 무더기는 도서관 책들, 하나는 내 꺼, 또 하나는 식구들꺼. 세 번째는 둘째 아이 문제집들. 네 번째는 피아노 책(치지도 않으면서 왜 갖고만 있나요. 바하, 베토벤, 찬송가 편곡 악보). 다섯 번째는 영어책들(문법책, 회화책, 어휘책, 수능특강까지) 마지막은 완전 따끈한 신간들(대부분 안 읽은 것들).
책상 위, 아래, 옆에 쌓아둔 책들을 하나로 모아서 종류별로 구분하고, 옆의 빈자리에 종류별로 쌓았다. 차이점이라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긴 것뿐인데, 그래도 책상 위가 깨끗해졌고. 이제 다시 책을 쌓을 수 있게 되었으며.
기쁜 마음에 인증샷. 가로로 찍으면 이런 모습이다. 210센티미터니까 사람 하나 누워도 된다. 그래서 골라보는 책들. 곧 이 책상 위에 누워있게 될 아름다운 면면들. 견딜 수 없는 사랑.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그리고는 독서대를 샀다. 새마음 새시대를 새 독서대로 열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 버린 독서대만 세 개에, 독서대 두 개가 있는데 높이 조절 독서대는 처음이다. 은오님 방에서 본 독서대가 너무 이뻐서 은오님과 똑같은 걸로 샀다. (근데 은오님 안 오시네?!?)
큰아이 꺼는 알라딘의 <바른 자세를 위한 2단 와이드 높이 조절 독서대>인데, 사진 좀 보내달라 했더니 이런 사진을 보내왔다. 아, 아름다운가? 다른 건 모르겠고, 예쁘기는 내 독서대가 더 예쁜 것 같다.
요즘 자주 듣는 노래는 이 노래다. GOD의 <길>이 아니라, 마커스라는 찬양 및 예배 사역 단체에서 만든 <길>이다.
어느새 지금 여기 서있네 생각조차 못했던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 감사하기만 한걸
조금씩 보인 그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었지
인생의 끝에 내 삶을 반겨줄 이 기다리고 있으니
내게 주어진 길을 걸으리 담담하게 이 길에 나서리
쉬운 길을 찾았던 지난날과 아쉬움은 소망으로 덮고
주어지는 인생의 길 위에 후회 없이 내 삶을 그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대도 난 결코 포기할 수 없네
내 심경과 완벽하게 똑같다고
할 수 없는데 마지막 두 단이 특히 그렇다. 후회 없이 내 삶을 그리리, 를 난 할 수 없는데 내 삶에는 아직도 후회가 너무 많고. 나는
내 후회를 놓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결코 포기할 수 없네, 도
아닌 것이 나는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1일의 연약한 심정의
소유자로서. 그래서, 내 심정에 제일 가까운 문구는 ‘담담하게 이 길에 나서리’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로, 아쉬움과 걱정을 뒤로 하고, 담담하게 이 길에 나서리. 나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