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외출을 했다. 장보기와 교회 이외에는 외출하지 않은 게 한 달이 넘었다. 핸드폰 앱 달력에는 모두 병원 예약뿐이다. 피부과와 정기 검진 이런 종류여서 걱정되는 병원행은 아니다. 엄마나 아이, 모두 혼자 갈 수 있을 터이나, 그렇게 보내기는 내 맘이 그러하니 굳이 같이 간다. 집보다 집 밖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병원행도 즐거운 외출이다. 외출하면서 들고나온 책은 <어슐러 K. 르 귄의 말>이다.

 


책을 깨끗하게(?) 보는 걸 추구하는 나로서는 이 아름다운 책을 들고 나가기 정말 싫었지만, 집에서는 아무래도 두꺼운 책을 읽게 되니 고이 모셔만 놓으면 언제 읽게 될지 몰라 북커버를 입혀서 들고나왔다. (고이 모셔 놓은 모습)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로』가 기념비적으로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 보다 후대의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114)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고전이 서구 유럽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의 기록이라는 걸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겠으나, 여전히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언어보다 더 인간적인것으로 여겨지는 현실. 여성의 업적이란 건 우연이고 컬트이며 남성의 업적은 길이길이 남아 문학사의 한 줄기 빛으로, 라는 이런 해석. 우리만이 아니라 유럽도, 미국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참 아쉽기는 하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여기.

 


애트우드가 자기 작품이 SF가 아니라고 하는 건, SF를 무척 좁게 정의해서예요. 애트우드가 생각하는 SF는 사실 판타지에 가까워요.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과 지구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을 다룬다는 거죠. 미안해요, 매기. 하지만 그건 SF의 정의가 아니에요. 많은 SF는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반으로 추론할 때도 많은데, 사실 그게 애트우드의 SF가 하는 일이죠. 지구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 특히 정치적인 방식을 가져다가 그걸 기반으로 추정한 미래를 그리면서 끔찍한 가정, "세상에, 이렇게 되고 말 거야"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지만 사실 그건 오래된 SF 기법이에요. 왜 자기 작품이 SF라고 불리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123)

 


진짜 이 부분 읽는데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르겠다. 여기, 마거릿 애트우드가 있다. 여기, 어슐러 K. 르 귄이 있다. 애트우드의 책 <홍수의 해>에 대해 르 귄이 리뷰를 썼다. 애트우드가 답한다. 아닌데요? 내가 쓰는 거, 내 작품은 SF 아닌데요? (여기서 한 번 웃어 주시고) 르 귄이 말한다. “미안해요, 매기. 하지만 그건(당신이 말하는 건) SF의 정의가 아니에요.”


 

SF의 정의를 좁게 봐서 그래요. 당신이 쓰는 거, 그거 SF에요. , 이런 대화를 나누는 대가들을 보시라.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두 번은 받았음 직한 이 대가들의 소박한 대화. 나중에 애트우드는 스스로가 SF를 쓴다는 점을 시인했고, 르 귄과 이 문제를 두고 주고받은 대화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124)

 


여기에서 두 사람의 신뢰를 본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거나 혹은 네가 감히 나한테? 의 삐뚤어진 마음 없이.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사이. 이건 이거야. ? 아닌데요? 그거, 그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건 그거가 맞아요. 그래요? , 그런 거 같네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당연히 끈끈한 애정이 자리하고 있을 테다. 한참을 웃었고, 포근해진 마음에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내 기억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서 쉬운 일이기는 한데, 앞으로 나도 그래야지, 다짐하게 된다. 나도 그래야지. 나도 후퇴를 잘하는 사람이 될 거야. 마지막까지 우기는 사람 말고, 뒤로한 걸음 물러서는 사람. 양보하는 거 아니고, 후퇴. 봐주는 거 아니고, 인정. 이렇게 말이다.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는 너무 좋다. 많이 읽은 줄 알았는데, 겨우 두 권 읽었다. 앞으로 읽고 싶은 책 중에 골라 보자면 이렇게 세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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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1-17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던 책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누군가를 존경했던 사람이란 대목이 있었어요. 단발머리님이 그 증거네요. 애트우드와 르귄의 대화에 저도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기운으로 오늘 하루도 으쌰으쌰😆

단발머리 2023-01-17 13:43   좋아요 2 | URL
르 귄이 세상을 떠나고 애트우드가 썼던 글 제목이 ‘우리는 어슐러 르 귄을 잃었다, 우리에게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 더라구요. 존경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쁨과 먼저 보내는 아픔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미미님 댓글에 오히려 제가 힘이 나네요. 우리 열심히 오늘 하루 살아보자구요!! 뽜야!!

다락방 2023-01-17 13: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고 르 귄님 너무 대호감 되어서 르 귄 님 책을 천천히 다 읽어볼까 합니다!

단발머리 2023-01-17 13:44   좋아요 1 | URL
참 좋은 계획이십니다. 저는 <어스시> 시리즈 1권에서 두 권 엎어진 사람이라서 ㅋㅋㅋㅋㅋ 자신 없습니다만 그래도 도전하고 싶기는 해요. 우리, 르 귄 읽어야 되는 사람이잖아요. 허허허.

잠자냥 2023-01-17 13:2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랑 르 귄 님 대화 저랑 다부장님 대화 같지 않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7 13:49   좋아요 3 | URL
신뢰와 애정이 바탕이 된 티키타카의 정점이죠. 애트우드 vs 르 귄 버전 보다 잠자냥님 vs 다락방님 버전이 5배 재미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1-17 13:47   좋아요 5 | URL
아니 ㅋㅋㅋ 내가 아무리 자뻑 대마왕 이라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르 귄과 애트우드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7 13:50   좋아요 3 | URL
이미 자뻑 대마왕 우리 다 알잖아요 ㅋㅋㅋㅋㅋㅋ쓰는 김에 쫌만 더 쓰세요 ㅋ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1-17 14:06   좋아요 3 | URL
알고 보니 잠자냥 다락방보다 자뻑 100배 심한 것으로 알려져......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7 14:16   좋아요 5 | URL
여러분!!!!! 잠자일보 2호의 표제 나왔습니다.

<<충격 속보 >>

잠자냥, 자뻑 대마왕 다락방보다 자뻑 100배 심한 것으로 밝혀져 ....

육고 미모 속에 감춰진 잠자냥의 민낯 (정해진 부수만 발행하는 관계로 서둘러 결제 바랍니다. 늦으면 놓쳐요!!)


잠자냥 2023-01-17 15:54   좋아요 3 | URL
르 다부장! 공감이 벌써 3개나 달렸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1-17 14: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책 상할까봐 북커버 입혀 나가시는 모습에 반하고 갑니다. 저도 그래요.

유수 2023-01-17 15:17   좋아요 2 | URL
거리감 느껴서 좋아요 누르고 가요.

은오 2023-01-17 15:20   좋아요 2 | URL
단발님 유수님 선점 포기하셔야겠는데요? 우리같은 책손상 혐오파는 책 막 다루는 사람 힘들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 하 유수님...

유수 2023-01-17 15:21   좋아요 2 | URL
막 안다뤄여. 성인 adhd일 뿐이야.

은오 2023-01-17 15:27   좋아요 2 | URL
그렇다면 거리감 다시 좁히겠습니다.

유수 2023-01-17 15:36   좋아요 2 | URL
아니 그런데 거리감은 제것.. 제가 차후에 좁힐게요♥️

단발머리 2023-01-17 20:05   좋아요 3 | URL
은오님 / 제가 북커버에 좀 약해요. 책 아끼는거에 집착하는 편이라... 앞으로 좀 두고 볼게요 ㅎㅎㅎ

유수님 / 거리감 조절 잘하시기 바래요. 은오님 훅 들어오는 스타일이라서요 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1-17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왓챠 보다가 한석규가 김서형에게 그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정~˝ 을 두 번이나 말하던데 오늘 단발님 글 인정 대목에서 순간 한석규가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는데 르 귄 님과 에트우드 님도 대화가 그렇게 읽히네요.
아....집에 르 귄 님 책 있는데 읽고 싶다!!!
하지만 좀 참을랍니다. 읽던 책들 마저 읽고~^^;;;;
아 언제 다 읽지?ㅜㅜ

단발머리 2023-01-17 21:37   좋아요 2 | URL
저는 두 대가의 이런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좋더라구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막 이러면서 말리는 모습? ㅋㅋㅋㅋ
저도 이제 여성주의 책 얼른 읽어야해서요. 언제 다 읽을까요, 우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1-18 14: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말 시리즈 아직 한권도 못 읽었는데, 좋아보여요. 애트우드랑 르귄이라니.. 여기 우리 북플의 애트우드랑 르귄 사이 댓글대화의 고급버전입니까? ㅋㅋㅋ 이 두분도 공식 인터뷰 진행하시면 고급지게 투닥거리실 거예요. 그쵸?

단발머리 2023-01-19 19:10   좋아요 1 | URL
이 두 분도 공식 인터뷰 하셔야지요. 알라딘 TV로 생중계해야 할 텐데요. 댓글로도 이렇게 불꽃 튀는데 실제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급의 정점이지요 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1-18 2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후퇴가 좋은 후퇴군요. 르 귄과 애트우드의 대화 너무 좋네요. 저도 단발머리님처럼 배워야지....
아 오늘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 신청했다가 SF, 로맨스, 무협은 구입을 지양한다는 거절문자를 받고 제가 얼마나 빡이 쳤는지..... 이건 후퇴하면 안돼 하면서 막 세게 말하고 싶었는데 뭐 모를수도 있지 하면서 정중하게 다시 재검토를 부탁한다는 글을 올렸어요. 렘은 세계적인 거장이고, 렘의 책이 안된다면 도서관에 있는 테드 창이나 켄 리우 옥타비아 버틀러 책들 다 빼야 한다고요. ㅎㅎ 이렇게 후퇴를 하는거 배워야 한다 해놓고 역시 못하는 것도 참 ..... 병인듯합니다. 앞으로 잘해야지..... ㅠ.ㅠ

잠자냥 2023-01-18 23:06   좋아요 3 | URL
엥?! 렘이 거절당했다고요?!?! 세상에나.

바람돌이 2023-01-18 23:32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ㅠㅠ 우리 사서님 편견이 너무 심하셔... ㅠㅠ

단발머리 2023-01-19 19:12   좋아요 2 | URL
스타니스와프 렘은 저는 처음 듣는 작가에요. 그쪽으로 세계적인 거장이군요. 장르 작가를 대하는 이 좁은 시야 ㅠㅠㅠ
사서님 안타까워서 어째요. 저희 도서관 사서님도 함 시험해 보고 싶어지네요. 저도 신청해 볼래요!!

그레이스 2023-01-20 11:44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댓글 읽고 저도 신청해볼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습니다 .^^
한 2년 동안 수서담당 선생님 자문을 해 봤는데, 힘드시더라구요, 원칙이 없으면 민원이 많대요 ㅠ
저건 되는데, 이건 왜 안되냐 하고...;;
막상 사서분들은 넘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으신 듯요.

이 책 넘 궁금하네요^^

단발머리 2023-01-21 17:12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 저는 오늘 저희 동네 두 곳 도서관 홈피 들어가봤는데 희망도서 신청기간이 아직 안 되었더라구요. 저희 동네는 11월쯤 희망도서 신청 마감하고 연초에 다시 시작하는데 아직 준비중인 모양입니다.
구입 여부 판단하시는 사서님들도 애로사랑 많으시네요. 그래도 함 신청해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