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 문학의 제일 반짝거리는 지점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인간사에 대한 명쾌한 통찰’이라고 말할 듯 싶다. 단점? 한계? 라고 한다면 모든 소설이 ‘행복한 결혼’을 향해 돌진한다는 것. 작가가 여성인지라 쉽게 여성 소설, 로맨스 소설, (멸시하는 의미의) 그저 그런 ‘소설 나부랭이’로 평가절하되기 쉬운데, 오스틴을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을 단일한 하나의 집단으로 볼 수 있는가’는 페미니즘만의 질문은 아니다. 여성은 인종, 민족, 계급, 성 정체성에 따라 분화된다. 여성’이’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성은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구체적으로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며 물리적 폭력과 사회, 문화적 압박에 시달린다. 가부장제 오천 년 여성혐오의 전통(?)은 사람들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기에, 여성은 여전히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판단된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자 주인공은 운송 수단을 소유하거나 조종할 수 없으므로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이웃 남자보다 못하다. 그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거나 필요한 곳에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여자 주인공과 남자 형제들을 구분 짓는 것은 여성의 예외 없는 자유의 부재다. 오스틴은 남동생들도 자신들의 누나처럼 (예를 들면 배우자를 선택할 때 경제적으로) 제한을 받는다고 설명하지만, 항상 경제적 계급보다 성의 계급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260쪽)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오만한 남성의 허위와 똑같은 무게로 허영에 찬 여성의 이기심을 조롱하면서도, 오스틴은 가부장제의 허울을 파헤친다. 결혼에 목맨 아름다운 처자의 결혼 성공담을 넘어서서 경제적 계급보다 우선시되는 ‘성 계급’의 존재와 유지, 그리고 억압에 대해 고발한다.
'영국 소설에서 돈이나 돈벌이는 남성적이기보다 여성 특유의 주제'라는 엘런 모어스의 주장은 과장일 수도 있지만,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통제가 여성으로부터 돈을 벌거나 상속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여성을 좌지우지한다는 것, 그 특유의 방식을 오스틴은 독자적으로 탐색한다. (279쪽)
당시 영국에서 재산과 지위의 상속이 남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했던 한정상속의 경우, 상속 재산이 없는 딸들의 경우 재산과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이었다. <오만과 편견>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을 수밖에 없는 프러포즈 장면을 연출하는 콜린스는 이러한 한정상속의 폐해와 그로 인한 남성 특권을 구체화한 인물이다. 콜린스는 한정상속으로 인해 재산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아들 없이 딸만 넷인) 베넷 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한다. 정확히는 결혼해 ‘주려고’ 한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당신의 훌륭하신 부친께서 돌아가신 뒤에 - 물론 아주 오래 사실 수도 있지만 - 이 댁의 재산을 제가 상속하게 되어 있는지라, 그분의 따님들 중에서 제 아내를 선택함으로써 그 서글픈 사건이 일어났을 때 ― 물론 이미 말씀드렸듯이 앞으로 몇 년 안에 일어날 일은 아닙니다만 ― 따님들에게 닥칠 상실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줄이기로 마음먹지 않고서는 저 스스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편견>, 153쪽)
반면에 원치 않은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의 이야기에는 당시 여성들의 무거운 고민이 담겨있다. 엘리자베스는 당시로는 파격적일 수 밖에 없는 ‘애정 있는 결혼’을 추구한다. 후에 엘리자베스는 인물/집안/재산의 삼박자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다아시와 애정 ‘있는’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에도, 어쩌면 현대에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 셈이다. 하지만, 샬럿은 그렇지 못하다.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이제 마침내 그 예방책을 손에 넣은 것이니 스물일곱의 나이에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는 여자로서는, 이번만큼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 (<오만과 편견>, 177쪽)
예쁘지 않은 나, 매력적이지 않은 나, 지참금이 없는 나와 결혼하자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청혼한 사람이 먹고살기에 ‘적당한’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그녀의 선택지는 하나다.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 앞에 남겨진 삶은 너무나 뻔하다. 하인과 비슷한 대우의 가정교사가 되거나, 일평생을 남동생과 그의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이다.
"나도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샬럿이 대답했다.
"네가 놀라는 것도 당연해. 무척 놀랍겠지. 콜린스 씨가 너하고 결혼하고 싶어 했던 게 바로 엊그제니까. 그렇지만 시간을 두고 다시 생각해 보면 너도 내가 잘했다고 할 거야. 그러길 바라.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오만과 편견>, 180쪽)
결혼에 대한 생각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20대 여성의 70%가 결혼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흔하게 읽을 수 있는 요즘이다. 비혼 여성 삶의 즐거움과 자유에 대해, 나는 조금은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비혼 여성 삶의 괴로움과 외로움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할 뿐이다. 오스틴의 작품을 다시 살펴볼 때 놀라운 점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수밖에 없는 비혼 여성으로서, 그녀가 ‘샬럿’의 입을 통해 그녀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에 대해 말해주었다는 점이다. 변호라고 할 수 없겠지만, 변호 같은 말들.
사랑 없는 결혼의 허무함, 배우자로서 콜린의 부적합성을 이야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스틴인 것처럼,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샬럿 역시 오스틴이다. 결혼 후에 이어지는 일련의 책무들, 이를테면 가사, 임신, 출산, 양육 과정에서 여성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간파한 오스틴은, 그 자신은 그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에 대한 오스틴의 입장, 오스틴의 시선, 오스틴의 문장은 결혼의 압박이 덜한 시대에 결혼해버린 기혼 여성들에게, 정확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해와 협력의 손짓으로 느껴진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결혼해 아들을 셋이나 낳아 길렀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가정에 매이지 않은 채, 이성애적 짝짓기와 출산의 법칙을 거스른 여성들에게 보였던 존경과 사랑이 기억나는 대목이다. ‘아이 없는’ 여성들의 연구와 학문이 우리 모두 여성을 ‘정신적인 영양실조’로부터 구해냈다(<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15쪽). 오스틴이야말로 그런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오스틴을 더,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