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같이 읽으면 좋은 책/참고할 만한 책은『가부장제와 정치경제학』시리즈와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이다.

이 책에서는 젠더가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설명하는데,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부분에서 차티스트들의 인식을 지적한 부분이 눈에 띈다.

차티스트들은 개인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산물이 그 자체로 자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산을 개인의 정치적 권리 향유와 관련지은 로크 이론의 한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차티스트들은 이미 선거권을 획득한 이들과 자신들 사이의 또 다른 유사성 - 그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122쪽)

남성 자산 소유자가 중심이 된 차티스트 운동이 제시한 계급에 대한 젠더화로 인해 대안적 계급 개념들이 주변부로 밀려나고, 성차 그 자체가 비가시화되었다. 노동력을 가진, 혹은 노동할 수 있는 자신들이 '남성'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노동계급의 구성에서 더 많은 수를 차지했던 '여성'과 '어린이'는 '노동 계급'에서 제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젠더 분석에 대한 접근법 중, 가부장제의 기원과 관련된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그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남성 집단에게 종속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는 자본주의와의 결합으로 더욱 공고해진다. 그럼 사회주의는 어떠했을까. 사회주의는 여성의 가사 노동의 상당 부분을 '외주화'함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에서 요구되는 노동은 여성 '본연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성들은 집 밖에서 임금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계속해서 집에서 "무보수로" 가사 노동을 도맡아 했다. 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의 일로 간주되는지 오직 경제적인 견지로만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모든 여성은 똑같이 여성이라는 계급, 즉 제1의 (남자라는 성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제2의 (여자라는) 성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사회에서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 할당된다고 결론지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51쪽)

기독교 신자인 내가 페미니즘을 읽을 때, 읽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괴리 때문에 괴롭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전혀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독교인이어서 유독 더 괴로운 건 아니라고 답한다. 인류 문명은 시작부터 내내 한결같았다. 여성 혐오가 인류 문명의 출발이었다는 정희진쌤의 말은 구체적인 실례에 모두 들어맞는다. 영국의 왕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종족에서도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불교에서 여성을 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도 여성을 죄의 근원이라 여겼다. 자본주의가 여성의 무임금 노동을 '사랑'과 '헌신'으로 만들어 착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가사 노동은 여성의 일로 간주되었다.

역시, 여성과 남성의 '성 구분'과 '강제적 이성애'가 젠더 형성과 고착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만약, 이 구별의 기준이 '성별'이 아닌 그 무엇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외향적인 사람은 요리를, 내향적인 사람은 설거지를 맡기로 한다면. 문과인 사람들은 설거지를, 이과인 사람은 장보기를 하기로 정해져 있다면. 키가 큰 사람은 청소를,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정리정돈을 맡긴다면 어땠을까.

모두 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성향이나, 성격, 혹은 신체적 특성으로 그 사람의 어떠함을 예단하고, 그에 따른 임무를 강제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젠더는 아직도 그렇게 작동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여성다움과 남성에게 강요되는 남성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직업 선택과 활동 범위에 관해서, 여성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넓은 선택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은, 사적 영역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주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도, 아니 성공한 여성이라면 더욱더, 아이들의 양육과 돌봄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것을 '요구' 받으며, 아이들을 전적으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부여'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여성의 이중, 삼중 노동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돌봄 노동을 포함한 모든 재생산 노동에서 여성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우선시할 것을 요청받는다. 사회학자 디무트 엘리자베트 부벡이 말했듯, 모든 여성은 직접 착취당하지 않아도 젠더에 기초한 착취에 취약(『친밀한 착취』, 141쪽)하기 때문이다.


사회 내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젠더 역시 각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임은 확실하다.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젠더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젠더가 가진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까지 읽고 썼다. 안 아파서 운동하기 싫다고 깝치다가 감기인지 뭔지에 호되게 걸려 콜록콜록 며칠을 누워 보내고 이제 힘내서 읽어보려 했더니, 오늘이 3월 28일이라고 한단다. 벌써요? 벌써???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텅 빈 동시에 의미가 넘쳐 흐르는 범주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 과정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 텅 빈 것은 그 범주가 어떤 궁극적이거나 초월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가 넘쳐 흐르는 것은 그 범주들이 고정돼 있는 것처럼 보일때조차 그 안에는 여전히 대안적이거나 거부당했거나 억압된 정의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 P99

의미가 다차원적이고, 관계적으로 확립되며, 한 명 이상의 청자를 향해 있고, 기존의 담론)장 속에서 표현되는 동시에 새로운 장을 형성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든 푸코(암시적이긴 하지만 스테드먼 존스의 연구 속 또 다른 존재)를 읽을 수 없다. - P117

그 공통분모는 그 유형은 다를지라도, 자산을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차티스트들은 개인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산물이 그자체로 자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산을 개인의 정치적 권리 향유와 관련지은 로크 이론의 한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차티스트들은 이미선거권을 획득한 이들과 자신들 사이의 또 다른 유사성 - 그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 P122

강한/약한, 공적인/사적인, 이성적인/감정적인, 물질적인/영적인ㅡ같은 대립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 문화가 젠더를 코드화한 예들이다. 이런 젠더화된 용법을 사용할 때 성별에 관계없이 개인들이 그런 정의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또한 그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그 정의들을 재해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여성들이 "남성적인" 운동을 지지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이는 차티스트운동이 가진 특정한 해석을 긍정하는 것이다. - P123

이것은 여성의 복지가 남성의 복지 안에 포함돼 있으며, 여성의 주된 과업은 소비 행위와 출산이고, 이런 활동들이 아무리 공적이고 정치적일지라도 남성들의 임금노동과 그 위상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급의 남성적인 구성은 (젠더화된) 가족 내 노동 분업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어떤ㅍ이들이 자연적인 배치라고 생각했던 것을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P126

이런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은, 젠더와 계급 사이의 연관성을 "이중 체계" 분석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접근에서 가부장제는자본주의와 나란히 존재하며 상호 교차하는 사회 체계다. 각각의 체계에는 특유의 조직과 관계, 동학, 역사, 이데올로기가 있다. 흔히 가부장제의"기원"은 가구 내 생산·재생산관계를 비롯한 가족과 친족 체계에 위치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생산수단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나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몰성적"sex-blind이거나 젠더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경제적 실천을 수반한다. 45 이런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가부장적 "젠더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실천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 P162

계급 개념의 구축에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검토하지 않은 채 노동계급 여성에 대해 쓴다는 게 가능할까? 여성들의 문화가 여성들을 어떻게 재현하고, 여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묻지않은 채, 여성에 대한 글쓰기가 가능한가? 이런 문화적 재현과 자기 정의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연관성을 읽어 낼 수 있을까? 모든 여성 또는 동일 계급의 모든 여성에게공통의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가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것일까? 19세기 영국에 과연 객관적으로 기술할 만한 노동계급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존재하기는 했을까? 특정 정치 운동의 정치학과 주장은 이런 이해관계를 정의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 - P168

공방은 독립된 건물이거나 마스터 가족의 숙소에 붙어 있는 방이었다. 공방이 집에 붙어 있는 경우, 마스터의 아내는 성수기에 일손을 돕거나 일 년 내내 단추와 옷단을 바느질했지만, 생산의 기본단위는 어디까지나 임금으로 생계를 부양했던 남성 직인들이었다. - P179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5-03-31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쯤이면 다 읽으셨을까요, 단발머리 님?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 읽었던 그 사회계약에 대한 책이 떠올랐어요. 지금 생각이 안나요. 진분홍 표지에 여자들 발이 보였던 책이었는데.. 아 답답해.. 그 책에서 사회계약은 남자와 남자들 사이에 이루어진거다, 라고 한 부분 있잖아요. 그 부분 때문에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책도 생각났고요.

단발머리 님, 화이팅!!

단발머리 2025-03-31 16:39   좋아요 0 | URL
이제 막 마쳤습니다. 글쓰기도 마쳤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이 말씀하신 책, 저도 가물가물한데 무슨 책인지 기억이 안 나요. 아..... 답답하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문장이 기억나서 인용했는데 다락방님도 댓글에서 생각났다고 하셔서 완전 찌찌뽕입니다. 3월 만세!!

독서괭 2025-04-03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운동하셔야겠어요, 단발님!! 아프지 않아서 운동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만성통증이 없는 것일 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평소 아픈 데 없는 분들이 한번 아프면 호되게 아프시더라고요. 근데 한번씩 아픈 건 사람이 쉽게 잊게 되어 있어서 ㅎㅎ
지성미 넘치는 글에 운동 권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