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에서 제일 중요한 문장을 꼽으라면 10쪽의 이 문장.
논쟁이 계속된다는 것은 젠더 자체가 가진 규정하기 힘든 특성을 보여준다. 신체적 차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고, 그 차이와 사회적 처신 및 성적 욕구의 관계 역시 고정적이지 않다. 역사적 기록은 젠더 범주의 가변성과 다양성을 입증하며, 인류학자들도 젠더 범주가 문화적으로 각양각색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10쪽)
고정적이지 않다,는 게 제일 중요한 지점이다. 저자는 '젠더의 불확실성'에 대한 사유가 미셀 푸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건 『감시와 처벌』에서 반복되는 그 주장, '권력은 관계적이며, 억압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효과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 생각을 24쪽에서 저자는 이렇게 풀어쓴다.
이 글에서 젠더란, 성차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나는 미셸 푸코를 따라 인간관계,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문화 및 사회가 생산해 낸 이해라는 의미로 지식을 사용한다. 이런 지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늘 상대적이다. 지식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적어도 그에 준하는) 역사를 가진 거대한 인식론적 틀에 의해 복잡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지식의 쓰임새와 의미는 정치적으로 경합하며, 이를 통해 권력관계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구축된다.(24쪽)
젠더는 성차의 사회적 구성이다, 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주황색 모나미 형광펜으로 줄을 긋는다 해도 여전히 아리송한 이내 마음. 읽고 있는 정희진쌤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펼쳐보자.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서 이건 그냥 외우라고 하셨던 바로 그 부분이다.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정체성이 아닌 수행성(performance)으로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젠더는 다음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다움/여성다움, 남성성/여성성, 성별, 성별 분업, 성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차이로서 젠더다. 둘째는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범주(category)로서 젠더, 즉 사회 구성 요소(factor)이다. 커피 자판기의 종이컵이 사회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물일 것이다. 이 뜨거운 물이 젠더이다. 물을 얼마나 붓는가, 몇 도의 물을 붓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젠더를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냈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젠더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가부장제는 내외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인식이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셋째는 메타 젠더(meta gender)로서 '다른 목소리', 새로운 인식론이다. 젠더에 기반하되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사유를 말한다. 젠더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episteme), 새로운 인식론이다.(<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103-4쪽)
훨씬 이해하기 쉬우나 여전히 어려운, 그 무엇. 그것은 바로 젠더.
역사 분석 범주로서의 젠더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젠더'가 '여성'의 동의어로 쓰이는 현상을 지적한다. 학문적 진지함을 진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성을 포함하지만 여성이라고 꼭 짚어 말하지 않음으로써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그 주장의 바탕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관한 생물학적 설명을 거부하고, 그 대신 성 역할 관념이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즉, 성별화된 신체sexed body에 부과된 사회적 범주로서의 젠더를 말하는 것이다.(71쪽)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젠더 분석에 대한 접근법이 특히나 흥미롭다. 첫 번째, 가부장제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두 번째,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비평 사이의 조화를 모색한 것. 그리고 세 번째, 주체의 젠더화된 정체성이 생산, 재생산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인데, 나는 이 중에서 첫 번째 '가부장제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관심이 많았다. 『가부장제의 창조』의 거다 러너의 질문, 그러니까 어떻게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었는가,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중심에 놓고 읽었다.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그 전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여성의 소외가 공고화되었음을 생각할 때,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매 순간 새롭게 만들어지며, 더욱 저열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구체화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 운동, 여성의 각성에 대한 '백래시'는 일단의 사건이나 경향이 아니라, 전 역사를 통틀어 한결같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읽어야만 그나마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려운 책인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흥미롭다는 점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근데, 왜 헌재는.
우리 모른 척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