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인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자 미셸은 남자친구 피터와의 결혼을 서두른다. 정확히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려 한다. 가장 완벽한 결혼식,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 엄마가 없다면 가장 쓸쓸한 신부가 될 거라는 예감이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녀와 결혼하는 사람은 피터.
피터가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갖는 데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피터에게 그런 감정을 심어주는 데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다. 피터는 사실 내게 벅찬 상대였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너나없이 촌스럽게 생긴 우리 친구들끼리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농담거리가 될 정도였다. 피터는 기타 연주 실력도 상당했지만, 시를 편집해서 엮어낸다든지 중편소설 4분의 3분량을 번역한다든지 하는 더욱 지적인 일에 관심이 컸다. 피터는 석사학위 소지자로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며 일곱 권짜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끝까지 읽은 사람이었다. (218쪽)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드라마에 나와서 유명해진 그 말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추앙한다’. 미셸은 이렇게 쓴다. 그 사람은 매력적이다. 그 사람은 잘생겼다. 그 사람은 지적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렇게 쓴다. 그 사람이 얼마나 빛나는지. 그 사람이 내게서 얼마나 먼 사람인지.
그다음을 보자. 그 사람은 석사학위 소지자로,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며, 일곱 권짜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끝까지 읽은 사람이었다.
나는 석사학위 소지자인 것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에 미셸의 마음이 동한 것은 이해하겠으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은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 책을 아직 읽지 못했고 (5권을 갖고 있어요) 언젠가 도전해 봐야겠다 생각하지만. 그 책을 읽었다는 게 그렇게나 매력 포인트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다. 그러면 여기에, 무슨 책을 넣어야 할까. 무슨 책을 넣어야 수긍이 될까. 어쩌면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이유가 가장 크겠지 싶기는 하다. 1권에서부터 마성의 도돌이표를 불러온다는 마법의 책 아닌가, 그 책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맘이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책을 넣어야 할까. 어떤 책을 넣어야 ‘와우! 대단한데! 완전 멋져!’라는 생각이 들까.
나는 대학교 2학년 겨울에 『태백산맥』을, 3학년 때 『혼불』을 읽었고, 직장에 다닐 때 『토지』를 읽었다. 나는 앞으로 장편 대하소설을 또 읽게 될지 모르겠고(안 읽겠다는 소리임), 만약 읽게 된다면 『토지』를 다시 읽고 싶으니, 이 세 시리즈가 내 대하소설 리스트 1, 2, 3번이 될 것이고, 나는 그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을 예정이다. 그래서, 이 빈칸에 이 대하소설 중 하나가 온다 해도 놀라거나 감동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저도 읽었거든요) 그래서 이 세 시리즈는 패스.
읽기 어려운 책? 이를테면 『율리시스』, 『피네간의 경야』. 두꺼운 책으로? 『미들 마치』. 여기까지가 내 한계.
그럼 ‘어떤 책을 읽었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언제?’ 하고 생각해보니, 옛날하고도 아주 먼 옛날, 어디선가 장하준 교수가 중학교 때 『코스모스』를 읽고 감명받아 원서로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쿵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건 장하준 교수가 아니라 동생 장하석 교수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중학교 때 <코스모스> 원서를 읽었다는 점에 감명받은 나는 ‘코스모스’에 감명받은 것인가, ‘영어원서’에 감명받은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닌 것이, 저는 『코스모스』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었거든요. 아, 혹시 그럼 그래서 심쿵한걸까? 내가 아는 책이 나와서?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그는 일곱 권짜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끝까지 읽은 사람이었다, 에 심쿵하지 않는다면, 난 어떤 책을 읽은 사람에 심쿵한단 말인가. 알랭 바디우? 헤겔? 정찬? 아니면… 임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