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다가 길어져서 따로 씁니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여기예요.
그리고 이 목적 없는 우주에서 신의 사랑으로 지어진 이 존재가요.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아들을 수직적으로 내려 보내주었사온데) 신의 사랑을 감히 수평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연애의 발명, 띠로리…. 17세기 유럽에서 태어난 것이랍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리하여 그 궁정 연애의 본질은. ‘유일성’‘(오로지 한 사람만을 연모하는데)’에 있다고 하는데.. 단발님께서 평소 주장하고 계시는 지론들이 지독한 기독교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인가 의심하게 되는 나는… 계보학을 좋아하는 푸코빠입니다. 메롱!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아들을 수직적으로 내려보내 주셨습니다(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뉴이어!). 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수평적 실천은 맞는데, 그게 연애의 발명, 낭만적 사랑으로 둔갑하게 될 때 다른 경로도 있었으니까요. 이미 잘 아시는 바와 같이ㅋㅋㅋㅋㅋㅋ그래도 다시 써보자면.
인류 초기, 집단의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사유재산화된 대상은 여성입니다. 재생산이 가능한 여성은 집단의 존속을 위해 가장 소중한 '자원'이었죠. 거다 러너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사유재산의 첫 번째 전유는 재생산자인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전유로부터 시작(『가부장제의 창조』,91쪽)되었으니까요. 사물화된 여성의 재생산권은 남성의 통제 아래 들어갑니다. 높은 계급의 남성들은 특별히 자신의 관리'하'에 들어온 여성들의 '성'을 통제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일부일처제는 매우 짧은 기간에만 '현실'이었습니다. 능력 있는 혹은 형편이 가능했던 모든 남자들은 일부다처제를 실천했구요. 일처다부제를 실천했던 여성들은 극소수인데, 얼마나 극소수냐면 지배계급에서도 최상위에 속한 여성만이 이런 실천이 가능했습니다. 아내가 물질해서 돈을 벌고, 아내가 물질해서 번 돈으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아내가 텃밭을 가꾸고, 아내가 가사를 도맡을 때, 아내가 물질해서 번 돈으로 제주도 남성들은 육지에, 다른 도시에 '작은 각시'를 얻었잖아요. 오랫동안 인류는 일부다처제 사회였습니다. 당연히 남성특권이구요. 일부다처제가 존속되는 지역에서는 그 제도로 인해 여성들이 얻는 '이익'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이 있을 테고요. 또한 일부일처제가 결혼제도 안에서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해악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유일성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제가 평소에 주장하는 지론들이(그게 뭘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지독한 기독교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적에는 가차 없이 동의합니다. 저는 사랑의 여러 속성 중에 '배타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보는데 말이지요. 사전 찾아보는 친절함ㅋㅋㅋㅋㅋㅋㅋㅋ을 또 가차 없이 선보입니다.
배타성: 하나의 물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의 권리가 성립하면, 같은 대상에 관하여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일. 하나의 물건 위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의 권리가 두 개 이상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뜻으로, 물권과 채권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그 배경은 당연히 성경입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나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왕과 백성, 목자와 양, 아버지와 아들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한 비유 중의 하나가 남편과 아내입니다. 하나님이 남편이고, 인간이 아내입니다. 아내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전폭적인 사랑'을 요구합니다. 다신교가 대세였던 이집트를 탈출하여, 다신교가 대세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유랑하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이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그들 주위의 모든 민족들이 '여러 종류의 신들'을 '동시에' 섬겼습니다. 신들끼리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형제자매가 되고, 친척이 되었습니다. 서로의 범위를 구획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했습니다. 이 신은 달랐습니다. 이 신은 자기 말고 다른 신은 모두 거짓이라 말했습니다. 안 된다고요. 나눌 수 없다고요. 너의 섬김을, 너의 사랑을, 너의 마음을. 나눌 수 없다고 말입니다. 몽땅 달라고 했습니다. 전부요. 네 마음을, 네 사랑을, 너의 전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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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쟝님이 좋아하는 이준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준혁과 한지민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단 한 사람임을 알게 됐고요. 오래오래 함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 두 사람 앞에 쟝쟝님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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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 부럽지 않은 명랑함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 그리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상계의 지성미로 이준혁은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준혁의 인생책은 바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고, 쟝쟝님은 본투비 푸코빠였다는 것을요. 이준혁은 더더욱 쟝쟝님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더 많은 시간을 쟝쟝님과 보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윳빛깔 한지민의 완벽한 일처리와 이에 버금가는 귀여운 허당미 역시 그에게는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어찌하란 말입니까. 이 사랑을, 이 슬픔을.
이때의 고뇌와 슬픔은 샐리 루니의 『친구들과의 대화』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닉(개새)이 허둥지둥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나는 여러 번 닉에게 전치 4주의 중경상을 입혔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고요.
글쎄요. 저는 이것이 여남 사이의 낭만적 사랑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 명 있고요.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 앞의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눈을 맞추고, 그의 말에만 응답하며, 내가 이야기할 때마다 핸드폰을 들여야 본다면, 그 세 사람이 친구 사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두고 경쟁합니다. (그러지 않은 분이라면, 그러지 않는 가정이라면 참말로 부럽습니다) 엄마는 우리 엄마이지만, 또한 영원히 내 엄마라서, 그 어떤 사람과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소유에 집착하는 유아적 사고의 총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런 면이 있다는걸, 인정합니다. 제 사고가 편협되고, 그리고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요. 저는, 제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래오래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한 쟝님의 지적은 참 맞는데, 저의 그런 생각은 그런 편협하고 배타적인 기독교의 사상과 꽤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저의 일부이기도 하구요. 느닷없이 생각나는 노래는 엉뚱하게 이 노래네요.
이소라가 부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