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은 4권, 에세이는 이 책까지 3권째다. 옴진리교와 지하철 사린 사건를 다룬 『언더 그라운드』를 미리 사 두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친하지 않은 동네 문화센터 미술 선생님과 초상화를 그리기로 만난 첫 번째 자리에서 자기 가슴 작아서 걱정이라고 고민 상담하는 여고생 등장하는 것 빼고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렇게나 단정한 사람 혹은 단정해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나 집착하는 문제는 역시나 '성'인가. 혹은 ‘성‘ 뿐인가.
소설을 써야겠다 결심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진구 구장에서 다카하시가 던진 제1구를 힐턴이 깔끔하게 띄워 올려 2루타를 쳤을 때, 하루키에게 찾아온 깨달음.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몰라. 그는 소설을 썼고, <군조> 신인상을 받았다. 잘나가던 재즈 카페를 정리하고, 소설 쓰기에만 전념해 보기로 하고, 그리고는 영영 소설가가 되었다. 간절히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루어진 소망. 마음을 다해 갈망하지 않았는데도 받게 된 선물. 그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부단히 애쓰지 않으면 그렇게나 오랫동안, 그렇게나 널리 읽히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운동하러 나가기 싫을 때, 하루키의 속마음 토크가 재미있었다.
Whenever I feel like I don't want to run, I always ask myself the same thing: You're able to make a living as a novelist, working at home, setting your own hours, so you don't have to commute on a packed train or sit through boring meetings. Don't you realize how fortunate you are? (Believe me, I do.) Compared to that, running an hour around the neighborhood is nothing, right? (46p)
지금의 삶에 대한 만족과 감사 없이는 할 수 없는 말들이다. 하루키가 다른 책에서도 여러 번 강조하고 반복했듯이 그는 자신의 직업, 그리고 그 직업을 영위할 수 있었던 환경, 조건에 감사한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표현했듯이.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소중히 여겨온 것은(그리고 지금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솔직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그 기회를 붙잡았고, 또한 적지 않은 행운의 덕도 있어서 이렇게 소설가가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얘기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격'이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어진 것입니다. 나로서는 일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그저 솔직히 감사하고 싶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58쪽)
내 눈을 사로잡았던 문단은 여기다.
Whenever the seasons change, the direction of the wind fluctuates like someone threw a switch. And runners can detect each notch in the seasonal shift in the feel of the wind against our skin, its smell and direction. In the midst of this flow, I'm aware of myself as one tiny piece in the gigantic mosaic of nature. I'm just a replaceable natural phenomenon, like the water in the river that flows under the bridge toward the sea.(91p)
대체가능한 자연 현상으로서의 나. 그런 나 자신을 안다면,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걸 인지한다면 왜. 왜, 그는 그리도 열심히 사는 걸까. 살 때까지 혹은 살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려고? 그건 이유가 안 된다. 80대 후반에도 건강한 근육을 유지하고, 건강한 삶을 사는 일은 가능하겠지만, 95세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일상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100세 아니, 110세까지의 삶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게 될 테고, 그리고 분해될 것이고, 사라질 것이다.
근육에 대한 그의 집착, 기계로서의 자기 인식은 적확하고 실제적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다루려' 하고 '다스리려' 한다. 생명체로서의 한계에 도전하고, 그리고 적잖이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자신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그림 속, 모자이크 속의 작은 조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게 궁금한데, 항상 궁금하다.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현재의 이 시간, 기쁨과 고통조차 사실은 뇌 속 신경 세포 다발의 특정한 전기 신호 간의 화학적 반응의 결과일 뿐이며, 나 역시, 나의 육체 역시 한없이 부서져 그 형체는 물론 흔적조차 모두 사그라질 텐데, 그렇다면 왜 사는가. 왜,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왜… 잘 살려고 하는가.
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
왜 살 때까지 살려고 하는가.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고 믿으며, 우주에는 신의 섭리가 가득하며, 신의 계획과 섭리, 교회에서 쓰는 전문용어로 신의 은총과 사랑 속에, 그 속에서 비로소 존재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내가 이해하는 범위 너머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는 나는, 궁금하다. 무의미한 세계, 목적 없는 우주에서 a just replaceable natural phenomenon인 스스로를 긍정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삶을. 노력하는 그 삶을. 진지한 그 삶을. 궁금해서, 궁금하니깐 그다음 책을 펼친다.
정희진쌤의 픽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그 책 대출하려 갔을 때 그 옆에 있었던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옆의 옆에 있었던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를 김치냉장고로 옮겨둔다. 나는 사뭇 진지하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208/pimg_798187174459714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