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
저명한 혹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에게는 빠지기 쉬운 두 개의 함정이 있다. 한 가지는 이상화(우상화)이고 또 한 가지는 뒷담화. (신기하게도 모두 ‘화’로 끝난다.) 이상화는 과거에 대한 미화, 망자에 대한 연민으로 치우쳐질 우려가 있다. 쉬운 길이다. 뒷담화 역시 마찬가지. 비판이란 행위 자체는 가치 중립적일 수 있지만, 뾰족한 비판으로 자신의 지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멍청한 시도는, 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지독한 유혹이 된다.
이 책 『한나 아렌트 평전』은 아렌트에 대한 뒷담화 없이 아렌트 이상화에 집착하지 않는 ‘균형 잡힌’ 서술에 성공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어린 시절, 성장기, 전쟁 중 유럽에서의 생활 그리고 세계적인 학자로서의 시간을 잘 분배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중간중간 아렌트가 보낸 편지, 아렌트가 받은 편지를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현장감을 높였다는 점에서도 훌륭하다. 사진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이것이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1004/pimg_7981871743581116.jpg)
이 아이는 자라서 세계적인 석학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한나 아렌트. 라고 했을 때, 뭐랄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엄마는, 이 착하고 순해 보이는 이 엄마는 이미 이 시점에도, 이 아이에게 휘둘렸을 거라는 느낌. 최근에 쟝쟝님과 이야기 나눴던 부분과도 겹치는데,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 혹은 ‘에너지의 충돌’, ‘기싸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아이는 이미 엄마를 이기고도 ‘남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보부아르의 엄마는 상당히 강한 여성이었다. 『아주 편안한 죽음』이었는지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보부아르의 엄마는 자녀에 대한 애착이 강한 만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도 충만하셨고, 보부아르 자매는 그것 때문에 적잖이 고달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자매들이 오순도순 이야기하던 중에 방으로 들어오게 된 엄마가 묻는다. “너희, 방금 무슨 이야기 했니?” 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하는 엄마. 보부아르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후에 보부아르가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또 실제적인 가장 역할을 하게 되자, 보부아르의 엄마는 보부아르의 그런 ‘역할’을 받아들였다. 자기 딸이기는 하지만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 보부아르를 어려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부아르의 엄마는 그렇게 적응하신 것처럼 보인다. 한나 아렌트의 엄마는. 이미.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이다. 이미 이때에도 아렌트에게 압도당하신 걸로 보인다.
"용서와 그 용서를 받아들인 관계는 반드시 개인적이거나 사적일 필요는 없지만)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 일로서,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 대한 배려다."
사랑하는 사이는 정치적 관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나에 따르면 사랑은 계산적이지 않다. 상대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서로의 '장점과 단점, 잘한 일과 못한 일, 잘못’을 토대로 두 사람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사이가 되어야 할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 잘못을 용서해주는 건 순전히 상대가 일평생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매몰되어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용서가 개인적인 성격에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다룬다면 화해는 이성을 바탕으로 평정심과 판단을 요구한다. (185쪽)
하이데거를 사랑하고 그와 영원히 이별했지만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까지 나아간 한나 아렌트의 진심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 생각에는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보다 화해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것 같고. 또 어떤 면에서는 꼭, 화해에 이르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좀 복잡한 측면이 있다. 할많할않은 다음 기회로.
이 책의 특별한 점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반응을 통해 아렌트의 생각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리틀록 사건에 대한 고찰>은 한나의 에세이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것으로 남아있는데, 한나는 정치적 변화는 힘이 아닌 설득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자녀를 이용하는 ‘흑인’ 부모들을 비판했고, 교육기관은 사회적 공간이므로 정치의 손길이 닿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222쪽). 흑인 작가 랠프 엘리슨의 반론이 이루어졌고, 엘리슨의 인터뷰를 읽은 후 한나는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말씀하신 ‘이상적 희생’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 완전히 방향을 잘못 짚었습니다.” 차별 또는 인종 문제에 관한 한, 한나의 의견은 여러 번 논란을 촉발했다. 저자는 그를 비난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렇게 쓴다. “이런 점에서 한나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225쪽).” 나는 저자의 이런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들은 무척이나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어서, 한나 아렌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기쁨의 함성을 지를 만도 한데, 나는 이제 막 한나 아렌트를 읽기 시작한 사람이라 읽었던/읽을 책들을 이렇게 정리해본다.
읽었어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한나 아렌트의 말/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아직도) 읽고 있어요
한나 아렌트의 생각/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고 싶어요
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 정신의 삶/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해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처음 읽는 정치철학사/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아렌트를 읽고 썼던 글들을 살펴보았더니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읽고 이렇게 정리해 두었다.
한나 아렌트는 스스로를 유대인 카테고리 바깥에 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유대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한 발자국 떨어져서 판단했기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에 대한 그녀의 입장 역시 그렇게 보면 쉽게 이해된다. 비판적 사유를 추구했던 정치 이론가, 사유하는 것에 대해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373095)
바로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아렌트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를 사랑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는 자신을 규정하는 사회의 틀 자체를 ‘의도적으로’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나는 <리틀록 사건에 대한 고찰>과 제임스 볼드윈에게 쓴 편지에서도 똑같은 취지로 말한 바 있다. 이는 페미니즘과 시오니즘에 대한 한나의 태도 또한 보여준다. 정체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치는 정치적 자유를 보유할 수도, 부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 주체를 만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한나는 사람이 누구 who 이며 사람이 무엇 what 인지 그 차이를 또렷하게 구분했기 때문에,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한나는 흑인이나 유대인,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정치운동의 바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278쪽)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에 반대하는 한나 아렌트의 이론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집단으로서 흑인, 유대인, 여성이 억압받았던 역사나 또한 갈등 과정에서 그들의 행동이 ‘평화적’일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아렌트의 인식에 대해서는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저자 사만다 로즈 힐에게 존경을 표한다.
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연구를 이어갈 사람은 내가 아니고. D님, V님, J님, M님 등이시다. 누구인지 본인들은 모두 알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리 축하드린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1004/pimg_798187174358112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