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다. 아렌트는 그의 책에서, 아이히만이 잔인하고 악독하거나 혹은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37쪽) 때문에 그토록 끔찍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평가하면서, ‘악’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 다르게 아이히만은 순진하고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점을 밝혀낸다. 역자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번역이 ‘진부성’이나 ‘일상성’보다 더 나은 지점을 설명하는데, 나 역시 ‘악의 평범성’이라는 번역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법정 ‘정의의 집’에서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동과 협력은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다른 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74쪽).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으며(74쪽), 자신의 업무는 유대인 학살이 아닌 유대인 이주, 소개(156쪽)였음을 주장한다.
아이히만이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을 느꼈다고 회상한 반제회의는 특히 중요하다. 회의의 서기로 참석했던 아이히만은 공무를 담당하는 관청 공무원들이 ‘해결책(유대인 학살)’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183쪽)고 증언한다. 또한 유대 자치기구인 장로회가 각 열차가 수송할 수 있는 인원수에 맞춰 다음에 수송될 유대인 명단을 만들어 주었음을 확인한다. 일부 숨거나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유대인 특별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185쪽)고 한다.
유대인 지도층의 나치 협력. 이 부분이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지점이다. 유대인이었던 아렌트는, 원치 않았지만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에 협력했던 아렌트는, 수용소에 갇히고 간신히 탈출했던 아렌트는, 결국에는 고향과 고국이라 믿었던 곳을 도망쳤던 아렌트는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아렌트는 유대인이면서 어떻게 피해자인 그들의 과실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 충분히 예견했음에도 어떻게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을까.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면서 여러 자료를 심층적으로 조사한다. 검사가 주장했어야 했던 내용과 아이히만이 자신의 변호를 위해 신청했어야 했던 증인들에 대해 말하면서, 아이히만의 범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 아이히만의 심경 변화가 어떠했는지, 성공에 대한 아이히만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분석한다. 이후에는 아이히만이 ‘실제로 최종 해결책(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는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는 주장을 언급하며,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유대인 장로회, 유대인 경찰의 나치 협력.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대인,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은 이들이다. 먼저는 유대인 관리와 경찰, 유대인 위원회에 속한 유대인들이 살아남았는데, 아렌트는 그들이 동족의 재산을 압수해 자신들의 추방과 학살 비용을 충당했다(188쪽)고 주장했다. 그들이 동족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고 결국 수많은 유대인이 무력하게 죽어갔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사망했고,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 아렌트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유대인 지도층들이 동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이 나치와 협력했다.
그러나 모든 진실은 현지 및 국제적 수준에서 유대인 공동체 조직들과 유대인 정당, 그리고 복지 조직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살든지 간에 유대인에게는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있었고, 거의 예외 없이 이들의 리더십은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나치스와 협력했다. 모든 진실은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 수많은 불행들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 달할 리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196-7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대해 말했지만, 실제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엄청난 비극의 희생자들이기에 자신들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후에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아트 슈피겔만은 자신의 책 『쥐』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는지 그려냈다. 그의 아버지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어마어마한 노력과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행운에 힘입어 여자 수용소에 갇혀 있던 아내도 도와줄 수 있었다. 착하고 순종적이고 양보했던 이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천천히 자기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거짓말을 하고 요령을 피우고 엄청나게 운이 좋았던 극히 일부 사람들만이 지옥과 같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그들은 명백한 피해자이다. 그들은 반유대주의의 희생양으로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에 의해 종족 전체의 전멸을 목표로 진행된 대량 학살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다.
아이히만을 예루살렘 법정에 세웠던 유대인들로서는 가해자인 독일인과 피해자인 유대인을 극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유럽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에 대해 유럽 전체가 부끄러움을 느끼기를 원했다. 그런데 오히려 아렌트는 피해자인 유대 사회의 오류를 지적하고, 완벽하고 오점 없는 모습의 피해자상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피해자인 너희에게도, 죽임을 당한 너희에게도 책임이 있다. 유대 사회가 폭발한 건,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책을 반 정도 읽었고, 『한나 아렌트의 말』은 이전에 읽었다. 그래픽 노블이지만 훌륭한 아렌트 안내서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을 읽었다. 나는 아직,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아렌트의 책을 좀 더 읽어 나간다면, 이 페이퍼의 일정 부분이 혹은 상당 부분이 나의 잘못된 ‘이해’에 근거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만큼 읽고 느낀 점이라고 한다면, 한나 아렌트는 자신을 여성과 남성 사이에 두었던 것처럼, 자신을 유대인과 독일인의 범주 너머에 두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의 저자의 ‘페미니즘 모먼트’는 경제 활동을 하시던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족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남자라고 페미니스트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반대로 여성이라고 해서 ‘자연스레’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사고의 대부분은 기존의 관념과 문화와 실제를 ‘받아들이면서’ 만들어지고, 내 생각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의 많은 부분은 사실 ‘기득권’의 이해를 강화하는 쪽으로 구성된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는, 대부분의 나라는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한다.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일이 ‘가부장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억지라고 생각되는 일들의 상당 부분이 ‘페미니즘’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고 나는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을 유대인의 카테고리 바깥에 둔 것처럼 여겨진다. 유대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 너머에서 판단했기에 유대인에게 가혹한 진실을 폭로하며, 반유대주의자들 주장의 근거가 될만한 이런 글(책)을 작성했을 거로 추측한다(물론 그녀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혐오한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일면 이해되는 지점이다. 비판적 사유를 추구했던 정치 이론가, 사유하는 것에 대해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한나 아렌트의 말』, 17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여성이라는 범주 혹은 유대인이라는 위치를 넘어서서 사유하고 발언할 때조차, 그녀가 여성이며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녀를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그로 인한 사회적 제약을 인지하느냐 인지하지 못 하느냐에 상관없이 말이다. 사회과학의 그 지긋지긋하고 지루하며 고전적인 변명인 ‘객관성’과 ‘중립성’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한나 아렌트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