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는 당시 호메로스(고대 그리스 서사시인)와 그리스어 공부에 푹 빠졌는데 가르침을 받기보다 스스로 읽고 공부하고 싶어했다. (41쪽)
“… 학교 교과 과정에 맞춰 자기 책으로 스스로 라틴어를 습득했다.” (42쪽, 어머니 마르타의 육아 일기)
자렐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음조와 운율의 세상을 열어주고, 영어 단어에 있는 특별한 중력을 알려주었다. 어떤 언어건 결국 단어의 상대적 무게감은 시적 용법과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 내가 영시 및 그 언어의 뛰어난 특징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이든 그건 모두 자렐 덕분이다. (170쪽)
한나 아렌트의 삶을 언어, 외국어 습득 및 사용의 관점으로 읽었을 때, 이런 문장에 줄을 칠 수 있겠다. 주목할 대목은 여러 군데이다. 라틴어를 독학으로 배웠다는 것도 그렇지만 미국 이주 당시 영어가 서툴러 ‘대’(한문 넣어줘야 하는데) 아렌트 선생님이 가정 교사 일을 하셨다는 부분도 그러하다. 제일 주목할 부분은 여기다.
1941년 5월 22일 한나와 블뤼허는 뉴욕 엘리스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25달러가 수중의 돈 전부였고 영어도 거의 못하는 처지였다. (145쪽)
1945년 여름, 생애 첫 강사 자리를 구한 한나는 브루클린 컬리지 대학원에서 유럽현대사를 강의했다. (168쪽)
미국에 이주했을 때가 1941년, 그리고 강사 일을 얻게 된 게 1945년. 불과 4-5년의 시간 동안 거의 못 하는 처지(물론 읽기는 잘하셨을 거라 예상됩니다만)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는 점. 정말 놀라운 외국어 습득 능력이 아닐 수 없겠다. 마리 루티도 그랬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에도 난 회화용 단어들을 몰라도 문법 교과서를 읽고 소화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기초적인 구조를 이해하면 그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난 이 같은 방식으로 6주 만에 파리대학교 입학에 필요한 프랑스어 실력을 획득했고, 아이스킬로스를 읽고자 비슷한 기간 안에 고대 그리스어를 습득한 적도 있다. (『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25쪽)
마리 루티는 핀란드,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외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도하에 석사과정을 밟았고,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토론토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이고, 9월에 신간이 나왔다. 나를 포함해 그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축하 드린다. 핀란드에서 태어났으니 프랑스어나 영어 배우기가 쉬웠을거라 말하는 사람은,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니 중국어랑 일본어 잘하시겠네요, 라는 말에 답해야 한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이렇다. 언어에 재능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언어를 배운다. 아, 떠오르는 사노 요코. (알고 보니 사노 요코, 내 인생의 멘토인가)
『요코씨의 “말” 1』의 첫 번째 이야기가 <재능인가 봐>이다.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는데, 하루 이틀 아이들을 관찰해보니 나이에 상관없이 요령을 터득하는 속도가 다르고, 동작 역시 눈에 띄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재능 있는 아이와 재능 없는 아이, 그리고 보통의 아이들. 정말 재능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리고 요코 씨가 결심한다. 이제 영어 공부는 그만둬야지.
어젯밤에 한나 아렌트 평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진짜 영어 공부를 그만둬야 할까. 아니, 영어 읽기를 그만둬야 할까. 외국어를 외국어로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보다 외국어를 외국어로 읽을 때 내가 들이는 노력, 시간, 에너지, 그리고 돈의 차이가 너무나 크지 않나. 천재는커녕 둔재에 가깝다는 걸 알지만, 한나 아렌트를 읽으며 절망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부조리하다는 걸 알지만, 이 쉬운(?) 일이 여태껏 되지 않고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맘이 울적했다.
그런데도 아침이 되면 몽땅 잊어버리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는 집에서 나갈 때 영어책을 챙겨 나가고. 2층은 사람이 적어서 훨씬 쾌적하네요, 하면서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안 되는 영어를, 여태껏 안 되는 영어를 다시 한번 해보겠다, 책을 펼친다.
과학과 정보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둘째가 단어장을 내민다. 엄마, 시간 괜찮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 (시간 괜찮은 사람) 응, 뭐? 내일 단어 시험인데, 21과부터 35과까지 한 과당 5개씩 나올 만한 거 좀 찍어주세요. 웅, 그래. 겸사겸사 엄마 영어 공부도 되고요. 촥! (등짝 날리는 소리) 저번에 엄마, <1등급 완성 단어>에서 모르는 거 많아서… 촥! (등짝 날리는 소리)
빨간 볼펜을 들고 시험에 나올만한 단어, 중요한 단어에 표시를 한다. 어머, 모르는 거 있네. 모르는 단어, 또 나왔어. 사노 요코가 정확했다. 사노 요코 말이 맞았다. 영어책을, 다 갖다 버릴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