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200원씩 모아 5,800원. 결정의 시간, 이북을 돌아본다. 아무튼 시리즈 중 이렇게 세 권이 추려졌다. 『아무튼 스릴러』가 제일 먼저 탈락하고, 『아무튼 피트니스』와 『아무튼 외국어』 중에서 고민한다. 습관처럼 혹은 습관대로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두 책을 검색한다. 『아무튼 피트니스』는 바로 대출이 가능한데, 『아무튼 외국어』는 대출 중이다. 두 책 다 읽고 싶지만 『아무튼 외국어』를 2주 이상 기다려야 한다면… 『아무튼 외국어』의 <바로구매> 버튼을 누른다.
이주의 책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었다. 훌륭한 책이라면 모두 그렇지만 이 책은 정말 놀랍다. 내 페미니즘 공부는 목적지가 없다. 방향도 없고 목표도 없다. 숙제도 없고, 물론 정해진 텍스트도 없다. 나는 책 한 권을 읽고 또 한 권을 읽는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읽고, 근간인 책을 읽는다. 열혈 응원해 주시는 몇 분이 계셔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간다. 읽고 줄을 치고 또 읽는다. 읽다가 천천히 읽다가, 이런 구절에 나는 전율한다.
근거 없이 단언된 대로 여성이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라면 흑인여성은 어찌해서 “노새”취급을 받으면서 고단한 가사노동을 할당받는가? 좋은 어머니란 가정에 머물면서 자녀를 돌보는 존재라면 생활보조금을 받고 사는 흑인여성은 왜 자기 아이를 탁아소에 맡겨두고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하는가? 여성의 가장 고결한 임무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면 왜 10대 흑인 어머니는 임플란트 피임기구와 피임약을 사용하도록 강요받는가? (39쪽)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간의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강조해 여성주의 운동의 분열을 조장하는 건 비겁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흑인 여성의 출발점 자체가 백인 여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고 비참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흑인 여성이 말하는, 흑인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된 페미니즘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테고(자기암시), 읽게 될 테지만(자기 실현적 예언), 그럼에도. 책은 두껍고, 글씨는 작다. 그게 바로 내가 <이주의 책>을 뒤로 하고 <주말의 책>을 찾은 이유다.
<주말의 책> 『아무튼 외국어』는 새로운 외국어에 대한 끝없는 끌림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튼 외국어, 어쨌든 외국어.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16개 국어를 구사하는 헝가리 출신의 통역사 롬브 커토는 그녀의 책 『언어 공부』에서 외국어 배우기는 공부한 내용이 아무리 적더라도 바로 사용/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마녀체력』의 이영미는 ‘우리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 세 가지’ 또는 ‘사람을 매력 있게 만드는 세 가지’로 ‘독서, 운동 그리고 외국어’를 꼽았다.(139쪽) 하지만 외국어를 시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어떤 이유로, 어떤 이유 때문에 그 사람들은 외국어 배우기를 ‘시작’했을까. 가수 이적은 일본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일본어 능력시험 1급을 땄다고 하고(101쪽), 서강대 철학과 강영안 교수님은 키에르케고르 원서를 읽어보겠다고 무심하게 네덜란드어를 마스터했다고 한다.(168쪽) 단테의 신곡을 읽으려고 이탈리아어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오에 겐자부로. 새로 공부한 이탈리아어로 <지옥편> 앞부분 일부를 외웠다고 했지. 이 정도면 기인열전 수준이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는 그 어떤 심오함에 가뿐하게 착지하는 이 놀라운 점프력.
저자는 ‘외국어 3개월 정도만 배워보기’라는 취미활동, 바이엘 상권 반절 떼기나 <수학의 정석>의 집합 부분 공부하기 같은 자신의 특별한 취미활동의 이유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저 말이 불어인 것은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안타까운 순간을 선사하는 전공 프랑스어부터 시작해 모호함을 남기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많은 규칙을 만들어내는 애쓰는 독일어. ‘A학점’ 폭격을 맞고 싶어 시작했던 스페인어, <화양연화>를 보기 위해 시작한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 최근에 마스다 미리의 책을 한 권 사서, 아침 저녁으로 둘러보는(?) 내 심정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하하하.
다들 어려워하는 첫 번째 고비에서 떨어져 나온 후로도, 어쩐지 일본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냥 두고(?) 있는데, 마치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성적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부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이 심정이 혹시 이런 건가, 싶다. (100쪽)
사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아닌가 싶다,가 아니라 딱 그렇다. 나는 취미로 시작해서, 재미로 시작해서, 심심풀이로 시작해서 전문가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을 동경한다. 2년 전부터 듣고 있는 팟캐스트 <피아노홀릭>의 진행자이자 『피아노홀릭』의 저자 김영욱 피디처럼 말이다. SBS 피디로 음악 프로그램 <김정은의 초콜릿>을 담당했던 김영욱 피디는 초보자들을 위한 피아노 음악 즐기기 가이드북을 내놓았는데, 그 책이 바로 『피아노홀릭』이다. 신기한 사실은 저자 자신은 학원에서 바이엘 상,하권 정도만 교습 받은 상태에서 모짜르트,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 쇼팽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 피아니스트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피아니스트에 못지 않다,라는 평이 전혀 아깝지 않은 연주실력을 뽐낸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헌책방과 서점을 휘저으며 악보와 음반을 모으고, 오로지 독학으로 이정도의 연주와 이정도의 이론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취미였으니. 그냥 좋아서. 재미있어서. 즐거워서.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삶을 동경하지만, 내가 선택한 취미라도, 하고 싶어 시작한 외국어 공부라도 이렇게 연속적으로 재미있게 할 자신은 없다. 노력하지 않고 얻고자 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기에 여기에서 그만 접으려 하다가도, 아, 작가의 이런 말에 그만…
대단한 대가가 되는 일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 열심히 해도 잘하기는 쉽지 않은 일, 무엇보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 요약하면 그것이 바로 ‘쓸데없는 일’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 이런 뜬금없는 질척거림, 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75쪽)
식구 중 한 명이 공부했다던 혼자 끝내는 일본어 첫걸음 『재팬이지』를 펼친다.
이 쓸데없는 일을
또 시작하고야 만다.
아무튼 외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