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러웨이 선언문』을 다 읽었다. 해러웨이가 제시하는 정보, 그 정보를 둘러싼 배경, 그 정보가 해석되는 방식에 대한 사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다. 아무튼 읽기는 다 읽었다.
정희진쌤 책은 책상 위에 한 권씩 나와 있다. 제일 자주 꺼내 보았던 책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만약 선생님 책을 한 권만 골라야 한다면 (왜 그렇게 험악한 상상을?), 나는 별처럼 빛나는 선생님 책 중에 이 책을 고를 것 같다. 단독저서가 아니어서, 글의 양도 상당히 적지만 성과 이분법, 그리고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해석되고 적용되는 방식에 관해 가장 정교하고 적확한 글이라 생각한다. 책읽기에 흥미를 잃고 아무 책도 읽기 싫은 밤에 꺼내 읽는 책은 『낯선 시선』이다. 맨 앞에서부터 읽기도 하고, 중간부터 읽기도 하는데,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고, 하얀 머릿속에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말 그대로 독서를 격려하는 책, 다시 독서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최근에 자주 꺼내 보았던 책은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세번째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이다. 아직 성과는 부진하지만, 책에 언급된 책들을 한 달에 한 권씩 읽어가는 게 나의 원대한 목표다. 어젯밤에 꺼내 놓은 책은 『정희진처럼 읽기』다. <좁은 편력>이라는 비교적 긴 글에 선생님의 독서법과 글 쓰는 법이 정리되어 있다. 1대 1 과외처럼 ‘영업 비밀’을 그대로 공개한 글이다.
책을 읽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득(得)이고, 하나는 지도 그리기(mapping)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책의 내용을 익히고 내용을 이해해서 필자의 주장을 취하는(take) 것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반면 후자는 책 내용을 익히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의 자기 지식에 배치(trans/form 혹은 re/make)하는 것이다. 습득은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 작업인 반면에 배치는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이다. 자기만의 사유, 자기만의 인식에서 읽은 내용을 알맞은 곳에 놓으려면 책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입장이 전체 지식 체계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또 지금 이 책은 그 자리의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 36쪽)
첫 번째 방식으로 책을 읽기도 쉬운 건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상당히 어렵다. 정보의 양이 이렇게나 방대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책을 통해 얻게 되는 갖가지 정보를 머리 속에 저장하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상상해보라. 첫 번째 방식의 책읽기도 그 자체로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추구해야하는 책읽기 방법은 두번째 방법이다. 이 방법이야말로 제대로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고, 말 그대로 가성비가 높은 효율적 책읽기법이다.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이를테면 해러웨이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의 논의가 있다.
DH : 무엇보다 천주교의 물질기호학이 있습니다. 육신이-된-말의 측면이죠. … 궁극적으로 세계 속에 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저는, 이와 같은 분리나 거대한 분할에 매우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천주교 실천과 내면의 경험은 당연히 중요했습니다. 저는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예수를 먹는 경험을 했죠. 그 강력함, 정말 무섭고, 훌륭하고, 놀라웠죠. 시각적으로 선명한 밤의 악몽, 꿰뚫는 듯한 낮의 평면, 강렬한 사랑, 끝없는 질문의 층위에 놓여 있는 대단히 심오한 관습이자 경험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감응과 인지 장치 모두의 수준에서,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화하고 분류하는 것 말이죠. 아시겠지만 둘씩 묶어서, 자연/문화, 생물학/사회, 정신/육체, 동물/인간, 기표/기의 등등 저는 이런 이분법에 능숙해진 적이 정말 없어요. 제가 글을 쓸 때 깊은 영향을 준 측면이죠. (『해러웨이 선언문』, 331쪽)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개역 개정/ NIV) 말씀은 신이었으되 인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니, 하나님이었던 예수가 인간으로 변화된 사건, 성육신의 사건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의 의미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개역개정, 마태복음 26장 26-28절)
인간이 된 하나님 예수는 성만찬을 통해 인간 속에서 산다. 초기 기독교가 전파될 즈음,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는데, 그러한 오해의 배경(?)이 되었던 말씀이다. 성만찬의 떡(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 떡(빵)과 포도주가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와 ‘소화’된다. 실체가 사라지고 몸속으로 흡수된다. 예수의 살과 피가 나의 살과 피 속에 혼합되고, 보이지 않음에도 예수의 피와 살은 내 속에 나와 함께 존재한다. 예수는 사라졌지만, 그의 살과 피는 존재하지 않지만, 동시에 내 속에 살아있다. 나와 함께 살아간다. 김은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월적 존재이자 말씀인 하느님이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육신을 가진 인간 예수로 왔다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가톨릭의 전례에서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체현되는 미사로 봉헌된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99쪽)
도나를 읽는다. 나는 도나 해러웨이를 정희진 선생님이 추천하셨던 방식, 즉 두 번째 책읽기 방식으로 읽고 싶다.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에 내가 가졌던 지식에 배치해서 변환시키고 다시 만들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해러웨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속담에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바라는 건 하나를 듣고, 하나, 딱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를 듣고, 하나를 깨치기도 바쁜데, 해러웨이는 만 이천칠백구십팔 개의 정보를 하나의 문단에, 한 페이지에 몰아넣으시고는. 그러곤 카옌을 쓰다듬으며 한가로이 인터뷰를 하신다.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조지프 최근 인터뷰에서 당신은 글을 쓸 때 선택해 왔던 모든 비유가 시간과 공간, 상황의 면에서 얼마나 당신에게 철저히 개인적인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든 그가 사용하는 비유는 그에게 매우 개인적일 수 있겠다고 짐작해보게 되는데요.
도나 그렇습니다. 진지한 연관성이 없는 대상을 왜 연구하겠어요? 그 연관성이 분노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연관성이 없다면 당신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테고, 제 경험으로는 그러한 연관성 덕에 더욱 개방성을 띠게 됩니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것으로 인해 내가 이 세상에 더욱 속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 퍼져나가는 물결에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세상에 속해있는 것이지요. (199쪽)
지식과 일화, 에피소드와 감상의 조합을 넘어선 독법과 글쓰기를 추구하고 싶지만, 도나 해러웨이가 선사하는 비유들이 얼마나 ‘개인적인지’를 확인하는 이런 문단을 읽고 있노라니, 그러한 독법이 꼭 부족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나 혼자 제멋대로 추측해본다. 개인적이고 소소하며 사소한 내 관심이 이 세상에 속해 있을 때 일어나는 일. 일어날 법한 일.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런 일들에 대해 상상해본다. 도나는 어렵고 해러웨이 읽기는 괴롭지만, 아무튼 읽기는 읽었다. 해러웨이의 어떤 단어가, 그의 어떤 문장이, 탁월하고 신선한 입체적인 비유가 부디 내게 들어와 나의 살과 피가 되기를. 암요,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