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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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하면 우선 초현실주의가 떠오른다. 그의 그림에는 이것 저것이라는 구분이 없다. 그의 그림에는 이것과 저것이 하나로 혼합되어 나타난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 기괴한, 기를 쓰고 의미 분석을 해야 하지만, 보기에 그리 싫지 않은 그림들.

 

도무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 존재들이 그림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그림은 재현이 아니라 창조다.

 

창조, 그러나 현실에서 벗어난 창조. 그래서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이나 '빛의 제국'이나 감상보다는 해석이 더 필요한 작품들이다.

 

이 책에서는 그래서 마그리트를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재현불가능성을 그림으로 나타낸 화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재현불가능성은 삼차원의 세계, 뉴턴적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 세상이 삼차원에만 국한되어 있을까.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뉴턴의 물리학을 넘어선 학문들이 나타나 우리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우리가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타임머신이 개발이 된다면, 지금 재현불가능한 세계가 가능한 세계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한 공간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상태, 빛의 제국에서 낮과 밤이 함께 있듯이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하나의 평면에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갔다고 치자. 그 조선시대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타임머신을 탈 당시의 내가 살고 있던 공간과 타임머신을 타고 간 공간은 같은 곳인가, 다른 곳인가.

 

시간을 수직선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시간에 공간이 속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공간은 변함이 없는데, 그 공간에 수많은 시간들이 중첩되어 있는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간다면 그 미래의 공간은 어디인가. 바로 지금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공간 아닌가. 이런 의문.

 

그렇다면 이 공간에는 과거의 공간, 지금의 공간, 미래의 공간이 한꺼번에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들이 겹쳐지지 않고 단일한 존재도 인식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다층적인 존재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어쩌면 그런 중층적인 존재의 모습이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시공간이 자꾸 겹쳐지는 장면, 그 장면을 그는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데...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냥 기묘한 그림, 특이한 그림,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대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책이다.

 

마그리트에 대한 책인데, 그의 그림을 연대기적으로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고 특성상으로 분류해서 배열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배열 덕분에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그림들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많은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으니, 마그리트라는 사람의 생애보다는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존재들이 한 평면에 존재하게 그린 그림, 피카소처럼 한 존재를 여러 각도에서 봐서 한 그림에 나타낸 것과는 좀 다르다.

 

마그리트에게는 여러 존재들이 한 장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초현실주의 쪽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본데, 현대 미술은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에서 창조로 나아간다.

 

그 전범을 보인 것이 바로 마그리트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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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30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어서’ 더 좋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림을 계속 보게 만드니까요. ^^

kinye91 2017-03-30 13:0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무언가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좋아해요. 계속 봐도 새롭게 느껴지거든요.
 
예술에 관한 피카소의 명상
다니엘 킬 지음 / 사계절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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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해 마음 속으로 느끼기보다는 '입체파'라는 이름으로 또는 '게르니카'를 그린 화가로 기억을 한다. 그렇게 배워왔다.

 

또한 그를 미술계의 천재로 기억한다. 창의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천재는 요절한다고 하지만,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피카소는 오래도록 살았다. 그리고 그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늘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발전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변화하지 않고 과거의 작품을 답습하는 것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예술가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피카소를 표방하면서도 피카소가 될 수 없게 교육을 하고 있다. 특히 미술 분야로 진학하는 학생들을 보라. 요즘은 몇몇 대학에서 실기를 없앴다고 하지만, 아직도 실기의 비중이 높은데 그 실기라는 것이 독창적인 작품을 알아보기보다는 얼마나 과거의 것을 잘 흉내냈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지 않았던가. (아카데미란 것이 대부분 이렇다. 독창성보다는 전통성을 더 중시하니)

 

마치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공식이 있어서 그 공식대로 하면 쉽게 합격이 되듯이 예고나 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학원이나 또는 교수들의 레슨을 통해 공식을 익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피카소를 기대한다? 마치 '바담 풍 하면서 넌 바람 풍이라고 하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독창성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데, 재능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처럼 도중에 사그러지고 마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건 아니다. 예술 교육이 바뀌어야 하는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가 머리 맞대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예술에 관한 피카소의 말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피카소 개인이 평소에 생각하고 말했던 말들 중에서 예술과 관련된 말을 모아놓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피카소의 작품도 소개하고 있어서 작품도 보고 피카소 예술론도 알 수 있는 책이다.

 

그 중에서 지금 우리나라 '블랙리스트'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만한 구절.

 

예술가는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파괴적이거나 결정적인 사건, 혹은 가슴 훈훈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살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형성해가는 정치적 존재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으며 상아탑 속에 갇혀 그렇게도 풍부한 삶에 대해 담을 쌓을 수 있겠는가? 아니다. 회화는 거실을 장식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을 공격하고 수비하기 위한 무기이다.  (94쪽)

 

이 말에 따른다면 최근에 문제가 된 작품 '더러운 잠'을 여성을 비하했다거나 외설이라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작품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작가가 작품으로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이 말처럼.

 

더하여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의 본질을 망각한 짓이 바로 '블랙리스트'다.

 

또한 천재성은 영감, 착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이 말에서 알 수 있다. 피카소가 천재라지만 그 천재성은 그의 생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작품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한 것이다.

 

착상은 출발점일 뿐이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기 시작해보아야 한다. (68쪽)

 

이렇게 천재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분야로 관심을 분산시키기 보다는 한 분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야말로 일이관지(一以貫之)다. 하나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다음에는 자연스레 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처음부터 융합 운운해서는 안 된다. 어정쩡한 덧붙임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열두어 가지 사소한 일에 그 힘을 낭비한다. 나는 그것을 단 한 가지의 일, 미술에 낭비한다. (37쪽)

 

하나에 집중하게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생계는 해결해 주어야 한다. 예술가들이 먹고는 살아야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는가. 이 점과 관련지으면 '기본소득'은 예술가들에게 특히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덤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날짜를 적어 넣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왜 창작하는 모든 것에 날짜를 적는가? 왜냐하면 예술가의 작품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그가 그것을 창조했으며 왜, 어떻게, 어떤 상황 속에서 창조했는지도 알아야 한다. (24쪽)

 

이는 사회를 떠난 작품은 없다는 것이다. 천재도 사회의 조건 속에서 탄생한다. 그 사회 조건 속에서 탄생한 천재가 사회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사회적 조건과 무관한 천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애플을 창립한 '스티브 잡스'의 경우도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그 조건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천재다.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조건에서 나오되, 사회를 한 단계 더 앞으로 끌고 가는 사람, 그것이 바로 천재다.

 

이렇듯 예술에 관한 피카소의 명상에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 또는 피카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이 책을 읽으면 피카소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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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 -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I. A. 브로드스키 지음, 이현숙 옮김 / 써네스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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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

 

우리나라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화가다. 밀레나 고흐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을 여러 책에서 보긴 했다.

 

특히 정지원의 "내 영혼의 그림 여행"에서 레핀의 그림에 대한 부분을 읽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그림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환기의 러시아 현실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 시기가 겹쳐지면서 내 마음 속에 또 머리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그림들은 오래 기억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보면서 그렇지 이것이 레핀의 그림이었지 하고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특히 여러 번 보았던 그림은 '볼가 강의 뱃사람들'이라는 그림과 '이반 뇌제-자신의 아들을 죽이다'라는 그림, 그리고 '톨스토이를 그린 그림들'이다.

 

상대적으로 러시아가 미술계에서는 그리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 그림들은 여러 미술책에 나오는 그림으로 우리에게 러시아 그림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그의 그림은 아카데미에 반하여 러시아 민중들의 생생한 삶을 그림으로 푠현해 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그래서 그는 러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전시하는 '이동파'와 함께 하기도 한다.

 

러시아인들의 정신과 삶이 그의 그림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책의 표지에 있는 그림,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쥐에 카자크들'이다.

 

절대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활력, 자신감이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 민중의 모습이라고 레핀은 생각했나 보다.

 

이런 그의 그림은 전제군주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경탄을 불러 일으키고, 그의 작품으로 러시아인들의 정신이 더 고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레핀은 무엇에 매이지 않고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디며 그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자 했던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는 사실, 어떤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 영감을 순간적으로 스케치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자료조사를 하고, 인물들의 모습을 스케치 하며 지속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고쳐나갔다고 한다.

 

어떤 그림은 그래서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레핀의 그림을 많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1부이다.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레핀의 그림들이 많이 실려 있어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좋은 기회를 주고 있다.

 

그 다음 부분은 레핀의 대표작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들을 그리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어서, 그의 그림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 부분은 레핀이 쓴 편지가 나온다. 모두 열 편의 편지인데, 이 편지에서 당시 레핀이 생각했던 그림에 대한 관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레핀이라는 화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화가가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또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현실과 소통하면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를 잃지 않은 점, 그것이 훌륭한 작품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어서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지 못하더라도 레핀의 그림은 많은 검색 사이트에 '일리야 레핀'이라고 치면 나오니, 한 번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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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 화가들이 기록한 6.25
정준모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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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을 보면 역사화가 참 많다. 화려한 색채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역사화. 그 중에서 신고전주의파라고 하는 다비드의 나폴레옹에 관한 그림들이 잘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전쟁의 역사를 그림으로도 잘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그림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전쟁이 있었고, 자랑스러워할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쟁을 그린 그림은 별로 없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배운 적도 본 적도 별로 없다)

 

아마도 전문적인 화가들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시키는 그림만 그리는데, 우리나라 왕들은 전쟁에 대한 그림을 선호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런 점이 좀 아쉬웠는데, 현대에 들어 가장 비극적인 전쟁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들이 없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림으로 그 비극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그렇지. 전쟁 때 종군작가단이 있었는데, 종군작가단에 미술가들이 포함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역시 이 책에 의하면 종군미술가들이 꽤 있었다. 종군 사진가도 있었고. 다만, 사진은 인화를 일본을 통해 했기 때문에 원본 필름을 사진작가가 지니고 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우리나라에서 전시회를 하기는 힘들었겠단 생각을 하고.

 

자기의 보조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로 전시회를 연 작가는 있었다고 이 책에 나와 있지만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은 이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물질적, 기술적 한계였으리라.

 

그 반면에 미술은 그렇지 않다. 화가들이 그리면 되는데... 물론 그림 도구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유럽처럼 대작이 나오기는 힘들었겠지만, 종군미술가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그림으로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일에 미술가들이 참여한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전쟁기간 동안 종군화가로, 군 연예대로, 정훈업무로, 선무공작대로 전쟁을 기록하는 시대의 눈으로 당시를 살아야 했다. 그렇게 제작된 전쟁화 또는 전투화는 약 300여 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우리의 빈곤과 두려움과 무지로 인해 이들 작품은 산실되고 말았다. 아니, 그간 우리가 관심이 없었던 탓에 지금 찾지 못하면서 당시의 그들을 방관자라고 부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354쪽)

 

시대적 상황 때문에 작품이 많이 사라져 전쟁의 비극에 관한 그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작가들도 나름대로 이를 역사에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많은 그림은 아니지만 전쟁 당시 (1950-1953년)에 그려진 그림들이 제법 나와 있다. 그 중에는 도판으로만 확인 가능한 작품도 있다고 하지만 미술가들이 노력한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 전쟁 그림에 대해 알아야 할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그림은 직접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 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보다 그림 한 편을 보여주는 편이 빠를 수 있다. 이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쟁 중에 만화가들이 소위 '삐라'라고 하는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했던 것이기도 하다.

 

전쟁을 담은 그림을 보면서 이런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전쟁 영웅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다. 전쟁을 겪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전쟁만큼 힘든 상황도 없다. 피난민들, 부상당한 사람들, 폐허가 된 도시를 그린 그림들을 보라.

 

이런 비극을 누가 되풀이 하고 싶겠는가. 그런 이유로도 우리가 겪었던 전쟁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무관심했다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찾으려는 노력, 기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 있었는데... 화가들 중에서도 줄이 좋거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전쟁 중에 외국으로 나갈 생각을 했고, 또 나가기도 했다는 사실... 전쟁 중에도 예술은 지속되어야 하나,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려고만 했던 예술가들도 있었다는 사실이 씁쓰레했고, 부산 임시청사에 걸려 있었다는 대형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 그림은 '6.25전쟁 기념행사를 위해 1952년 6월 정부의 공보처장 이헌구는 부산시 공관 벽을 장식할 대형작품의 제작을 현역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이들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차용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중앙의 '여신'이 장총과 태극기를 들고 전진하며 '민중'은 한국 사람들로 표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316쪽)고 한다.

 

이런 표절도 버젓이 일어나다니. 그것도 우리나라 현역 화가들이 집단적으로 그린 그림에서. 아무리 전쟁 때라고 해도 그렇지 자신들의 재능과 상상력과 현실을 살펴서 종합적으로 우리나라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런 부끄러운 일도 일어나곤 했다고 하니...

 

그래도 전쟁을 기억하려는 화가들의 작품은 우리가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점, 기억할 점이 많을 테니까. 그 점에 대해서 전쟁 기간을 통틀어 화가들, 조각가들, 사진가들이 어떻게 대응했고, 어떤 작품을 남겼으며,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 미술사를 위해서도, 우리 역사를 위해서도 더 많은 사실이 밝혀지고 작품들이 발굴되어 이 책이 보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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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그림 여행
정지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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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평면이 아니라 깊이다!"

 

이 책의 맨 뒷표지에 실려 있는 글이다. 신영복 선생의 추천의 글인지도 모르겠다. 그 밑에 일리야 레핀의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란 그림이 하나 나오고,  신영복 선생의 글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림은 평면에 그려졌지만 그 평면에는 상당한 깊이가 있다. 그 깊이를 읽어내는 마음이 바로 그림을 보는 영혼의 힘이다.

 

많은 작가들과 그림이 나오지만, 대체로 한 작가의 두 그림을 소개하고, 그 그림에서 느끼는 감정을 펼쳐나가고 있는데, 시인이어서 그런지 글이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게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루하지 않다.

 

진보쪽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되는 글들이 도처에 실려 있고, 그래서 그런지 그림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있으며, 뒷표지에 있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쉽게 민주화 운동 당시에 수배당하고 쫓기고 탄압받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또 그런 내용이 이 그림에 대한 부분에서 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꼭 진보쪽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진보하면 이상하게 딱딱하고 경직된 무언가 진지하게 이야기만 해야 하는 사상이라고 이야기하기 쉬운데, 그건 아니다.

 

사회 혁명에 동조했던 샤갈, 그러나 그가 생각한 진보, 혁명과 실제 사회와는 다름을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고, 이런 샤갈의 그림은 책의 앞표지에 나와 있다. 샤갈의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라일락 속의 연인들]

 

이렇게 환상적인 아름다움 속에 연인이 서로 함께 있는 것,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고 혁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이 책에서는 두 그림이 내게는 처음과 끝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 상황과 관련지어 이 두 그림이 머리 속에서 또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나는 고야의 [이성의 잠은 요괴를 부른다]이고, 또 하나는 오윤의 [애비]다.

 

이성이 잠들 때 우리는 사회의 진보를 이끌 수 없다. 특히 자신의 이성을 잠재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암울할 뿐이다.

 

   어떻게 이 그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왔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순간에 잠들면 결국 괴물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

 

  하여 일은 끝나야 끝나는 것. 그때까지는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도록 할 것.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정에 휘둘려 이성이 잠들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그림은 그것을 명심하도록 해주고 있다.

 

여기에 오윤의 [애비]는 아들을 데리고 또는 아들을 보호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본인도 힘들지만 그래도 미래 세대인 아들을 지키고 보호해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 그림인데... (그림은 책을 참조... 저작권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2008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도 광장의 촛불은 시들지 않는다. 유장하게 퍼져나가는 '징소리'처럼 오윤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넘어 깊고 뜨거운 사랑과 연대의 자유를 되찾게 일깨워준다. 광장은 열려 있고 우리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서로의 촛불에 심지를 밝혀주며, 서로의 '애비'가 되어 서로를 굳세게 지켜주며, 마침내 길이 되어간다.' (279쪽)

 

이때 애비는 약자를 지켜주는 애비다. 결코 강한 자가 더 큰소리치게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애비가 아니다. 강한 자임에도 강한 자임을 부정하는, 약자 코스프레,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는 누군가를 지키는 그런 애비들이 아니다.

 

이 애비는 이 책의 238쪽에서 인용한 백석의 시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들을 보듬고 그들과 함께 가는, 그래서 그들의 앞날이 밝아가게 하는 그런 애비인 것이다.

 

근 10년 전 책임에도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들, 그리고 그림을 보고 느낀 생각들이다.

 

이성이 잠들지 않도록 하고, 약자 코스프레를 도와주는 그런 애비가 아니라 진실로 약한 존재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함께 보듬고 가는 그런 아버지가 필요한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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