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1 - 영혼과 꿈을 그린 40인의 화가들
이성희 지음 / 컬처라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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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며 분석을 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편이 더 좋다. 그림에 담긴 화가의 화풍이라든지, 색채, 표현 기법 등을 따지기보다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마음이 받아들이도록, 그 마음을 오래 지니도록 하는 편이 더 좋다.

 

그림을 이성이 작동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감정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편이 더 좋다.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는 그림을 만났을 때 그 감동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 그림에서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림의 세세한 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라도 그림이 마음을 울렸던 그 순간에 대한 마음의 울림만은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한 편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온갖 표현법으로 주제로 분석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선은 마음을 울리는 시, 그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자꾸만 입에서 곱씹게 되는 시, 곱씹을수록 마음을 울리는 시, 그런 시를 한 편 이상 제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다.

 

이 책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그림에서 시를, 다른 문학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음을, 그 만남의 감동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최근에 읽는 미술관련 책들이 문학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들인데, 이 책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만큼 미술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 또한 그런 관계를 느낌을 잘 살려서 전해주고 있다.

 

직접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지 않더라도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먼저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자꾸 김춘수의 시 가운데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떠올렸다. 샤갈의 그림을 이 책에서 다루기도 하지만, 이 시는 다루지 않는데, 그럼에도 왜 자꾸 김춘수의 이 시가 떠올랐을까.

 

그것은 바로 문학과 미술이 일 대 일로 대응하지 않고 서로 창조와 변용의 과정을 거친다는 데 있다. 샤갈의 '나와 마을'이라는 그림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눈은 보이지도 않는데... 김춘수는 샤갈의 그림에서 눈을 보고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를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시선집,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문학세계사, 1993년 초판. 60쪽.

 

샤갈의 그림이 포근함을 전해준다면, 무언가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느낌을, 그래서 집에 걸어두고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우울할 때 한 번씩 들여다보면 마음이 풀리는 그런 그림인데...

 

삼월에 새롭게 시작할 때 마치 그를 축복하듯이 눈이 내린다. 이 때 내리는 눈은 소담스럽다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삼월에 내리는 눈이니 폭설은 아닐 것이고, 눈보라로 휘날리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는데, 그 시작점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하고 있다.

 

삼월에 내리는 눈이라면 차가운 느낌을 줄 것 같으나 이 시에서는 그런 차가운 느낌을 받기 힘들다. 오히려 출발에 앞서 잠시 쉬어가라고 사람들을 방 안으로 모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방 안에서 오손도손 모여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이 바로 샤갈의 마을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림과 시 역시 이렇게 사람들을 따스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이렇게 시와 그림이 함께 마음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런 감상을 할 수 있는 여유, 동양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여유를 이 책에서 역시 만날 수 있다.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 글의 글쓰기가 더 마음을 울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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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그림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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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그 행복한 마음을 글로 써서 남긴다. 그 글을 다른 사람이 읽는다. 그림이 아니라 그림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행복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행복이 전파된다. 잔잔한 물결이 퍼져나가듯이 행복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번져 나간다. 책을 읽는 순간 순간이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도 되고, 수많은 그림을 글쓴이와 함께 보면서 생각을 공유하기도 하고,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그렇게 그림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림 여행이다. 마음 여행이었다.

 

전문적으로 그림에 대한 해설을 해주는 책이 아니다. 따라서 책의 순서에 어떤 일관성이 있을 수 없다.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림을 보고 느낀 마음이리라.

 

로댕의 작품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작가 안규철로 끝나는 책은 시대를 관통하고 동양과 서양을 누비면서 그림들을 또 조각들을 보여준다.

 

'내 마음속의 그림'이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행위예술도 또 조각들도 나온다. 마음을 울리는 예술이라면 모두 다루고 있는 것이다.

 

글솜씨가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미술에서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그 솔직함이 전해졌다고 해야 하나 읽기가 참 편한 책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가치판단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그림을 보는 법이 따로 없듯이 그림을 느끼는 법 역시 따로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보기 좋은 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그림을 읽으면 된다.

 

그 다양한 느낌, 읽기 방식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 더 좋겠지만 공유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냥 그림을 보는 순간, 읽는 순간 행복을 느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기도 하니, 이 책에서 글쓴이의 느낌과 똑같은 느낌을 받을 필요는 없다. 글쓴이는 이 그림을 이런 식으로 읽고 느꼈구나 하면 된다.

 

아주 다양한 그림들이 나와서 눈호강을 한 책읽기이기도 하고, 가끔은 작품을 보는 여유와 행복을 지녀야겠다는 생각을 한 책읽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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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7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7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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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 2
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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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이다. 2권을 구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1권과 표지그림이 다르다. 1,2권이 나란히 있던데, 내게는 2권만 필요한데, 내가 가지고 있는 1권과 표지그림이 다르다니... 다른 책인가?

 

여러 번 펼쳐보고 찾아보고, 생각해 보아도 다른 책은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판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1권은 2005년에 나온 책이고,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이 2권은 2002년에 나온 책이다.

 

1권이 더 나중에 나온 책인데, 그래서 책의 쪽수나 그림의 위치, 그림의 크기 등이 좀 달라졌기 때문에 중고서점에 있는 책이 낯설었나 보다.

 

비록 판이 짝에는 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대폭 개정된 것도 아닐테니 2권만 사기로 한다. 마치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을 신은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 느낌을 그냥 지니기로 한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다. 역시 진중권의 글은 재밌다. 술술 읽힌다.

 

이번엔 4부부터 시작한다. '너의 죽음'이다. 그리고5부 '반대물로 전화한 죽음'이 나오고, 6부 '현대의 묵시록'에서 책은 끝난다.

 

시대에 따라서 그림에 나타난 죽음을 살펴보는 것인데, 이는 시대에 따른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의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답이 없는 것이 죽음 아니던가. 알 수도 없는 경험이고. 누구나 다 한 번은 꼭 경험하지만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그림을 통해 살피는 것인데...

 

고대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존재들이 중세에는 신에게 간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존재들에게 죽음이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신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인간 존재 자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자신의 의식이 소멸한다는 것, 그것은 공포였다. 그러나 그 죽음을 나의 죽음이 아니라 너의 죽음으로 바꾸어 놓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너의 죽음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비극미라고나 해야 할까... 이때 죽음은 아름답게 표현된다. 낭만주의인 것이다. 이런 낭만주의에서는 자살조차도 아름다움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아름다움이 유지될 수는 없다.

 

죽음은 늘 공포인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집단의 죽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현대의 묵시록'이다.

 

죽음은 결코 너의 죽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말살하는 죽음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공포를 그림으로 그려내기 시작했지만, 다시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을 그리려는 화가는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그리던 그리지 않던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 있고,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죽음을 연기하는 의사들이 나오지만 그림에는 의사조차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 그림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인 것이다. 이 죽음 앞에 선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삶을 더욱 의미있게 살려고 한다.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죽음에 대한 그림들을 시대적으로 살펴보는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다. 어차피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날마다 죽어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잘 죽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잘 산다는 것이 되니까...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다른 말로 하면 '삶 앞에 선 인간'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죽음을 잘 맞이하는 방법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그림들... 그리고 삶과 죽음.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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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 창비교양문고 20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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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디아스포라'라는 말로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은 자신을 표현한다. '이산'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재일교포. 서경식의 삶은 이 말로 정리가 된다. '자이니치'라고도 하는데 일본인으로서도 한국인으로서도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의 삶이다. 그런 삶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바로 서경식의 가족이 아닌가 한다.

 

형인 서승과 서준식이 한국에 유학왔다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 조작되어 - 감옥생활을 하고,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이런 형들의 구명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다.

 

형들을 면회가는 어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누이, 결국 자식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이런 상태에서 그는 유럽을 여행하기로 한다.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있으므로, 변화가 필요했을 터. 유럽 여행을 통해 자신을 추스리려고 하는데...

 

어쩌다가 여행이 미술관 기행이 되어 버렸고, 그 기행을 오랫동안 하게 된다. 미술관에서 그는 자신을 만나고, 자신이 겪어야 했던 현대사를, 가족의 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그가 처음 만난 그림은 '캄뷰세스 왕의 재판'이다. 어떤 판사가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 그 형벌이 무엇이냐면 껍데기를 벗기는 형벌이다. 형리들이 사람의 껍데기를 벗기고 있는 극히 사실적인 그림.

 

이 그림에서 그는 충격을 받는다. 이 그림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연상하는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것은 가족의 비극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만나게 된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과는 달리 그림에 대한 미술사적 설명보다는, 그 그림을 통해서 느낀 점을 더 잘 표현하고 있고, 또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에서 느끼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들을 떠올리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단지 그림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만나고 보듬어 가는 과정을 서술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표지에 나오는 조각상은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다. 이 반항하는 노예에서 그는 자신의 형을 연상하게 되는데... (바뀐 판본에서는 모딜리아니의 '하임 수띤 초상'이 표지 그림인듯)

 

조국에 돌아와서 조국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형들, 그들은 순종하는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반항하는 인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그림 순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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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의 황홀경
조용훈 / 문학동네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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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골 -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다른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에 내려가 살던 저자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하다, 그 자연에서 시와 그림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 책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에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 아름다움, 즐거움, 놀라움 등등을 느끼다가 문득 자연에서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그림을 떠올리면서 화가가 왜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하고, 다시 그림과 더불어 또 자연과 더불어 떠오르는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시와 그림과 자연이 하나로 저자의 마음 속에 파고든다. 그 파고듦을 혼자 누릴 수 없어 편지 형식의 글로 엮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편지 형식은 읽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순간 책을 쓴 이와 읽는 이 단 둘만이 존재한다. 책을 쓴 이가 자신이 느낀 것을 조근조근하게 읽는 이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사실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감정의 전달, 글을 쓴 이의 감정이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서 오롯이 읽는 이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그 장소에서 어떤 감정이었으며 무엇을 느꼈고, 그 때 떠올린 그림들과 시에 대해서 읽는 사람 역시 공감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특히 이 책은 가을에서 겨울의 초엽까지의 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상실의 계절이기도 한 가을에서 느끼는 감정...

 

책의 시작은 그래서 고흐의 그림에서 시작한다. '감자 먹는 사람들' 결코 부유하지 않은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려 했던 고흐. 그는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과 공감하려 했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그렸으며, 이렇게 가난한 가족을 그렸다.

 

그런 그를 가을이 깊어가는 시점에서 떠올리고 있다. 황금빛 논을 바라보면서 벼를 생각하면서 고흐의 그림과 더불어 이성부의 시 '벼'를 소개하고, 이윤택의 시 '이런 정신주의를 경계함'을 떠올린다.

 

가을이 결실의 계절이라고 마냥 풍요로운 것이 아님을, 그 속에는 치열한 노동과 사람들의 땀이 배어 있음을, 그래서 이윤택의 시에서는 '논길은 .... 농부가 걸어가야 할 노동의 길'이라고 하지 않는다.

 

수확의 기쁨만을 누리는, 결실의 모습만 보고 환희에 젖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배인 땀을 알아봐야 하는 것, 그런 가을...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에 수록된 많은 글들이 그래서 자연을 객관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과 함께 하는 자연으로, 단순히 배경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에 깊숙히 들어와 사람 삶의 일부가 된 자연으로 이야기된다.

 

이런 자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을 화가는 어떻게 표현했고,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편지 형식으로 전해주고 있다.

 

아니, 화가와 시인의 표현을 전해주고 있다기보다는 그것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전해주고 있다. 그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듯이.

 

하여 시와 그림과 글이 하나로 엮여 감동을 준다. 예술이 각 분야로 찢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행을 갈 때 그곳에서 그동안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또 머리 속에 있던 예술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비단 저자의 느낌만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사람의 삶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자연과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삶과 예술과 자연이 하나로 엮여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잔잔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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