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그림 여행
정지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그림은 평면이 아니라 깊이다!"

 

이 책의 맨 뒷표지에 실려 있는 글이다. 신영복 선생의 추천의 글인지도 모르겠다. 그 밑에 일리야 레핀의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란 그림이 하나 나오고,  신영복 선생의 글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림은 평면에 그려졌지만 그 평면에는 상당한 깊이가 있다. 그 깊이를 읽어내는 마음이 바로 그림을 보는 영혼의 힘이다.

 

많은 작가들과 그림이 나오지만, 대체로 한 작가의 두 그림을 소개하고, 그 그림에서 느끼는 감정을 펼쳐나가고 있는데, 시인이어서 그런지 글이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게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루하지 않다.

 

진보쪽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되는 글들이 도처에 실려 있고, 그래서 그런지 그림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있으며, 뒷표지에 있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쉽게 민주화 운동 당시에 수배당하고 쫓기고 탄압받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또 그런 내용이 이 그림에 대한 부분에서 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꼭 진보쪽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진보하면 이상하게 딱딱하고 경직된 무언가 진지하게 이야기만 해야 하는 사상이라고 이야기하기 쉬운데, 그건 아니다.

 

사회 혁명에 동조했던 샤갈, 그러나 그가 생각한 진보, 혁명과 실제 사회와는 다름을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고, 이런 샤갈의 그림은 책의 앞표지에 나와 있다. 샤갈의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라일락 속의 연인들]

 

이렇게 환상적인 아름다움 속에 연인이 서로 함께 있는 것,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고 혁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이 책에서는 두 그림이 내게는 처음과 끝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 상황과 관련지어 이 두 그림이 머리 속에서 또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나는 고야의 [이성의 잠은 요괴를 부른다]이고, 또 하나는 오윤의 [애비]다.

 

이성이 잠들 때 우리는 사회의 진보를 이끌 수 없다. 특히 자신의 이성을 잠재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암울할 뿐이다.

 

   어떻게 이 그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왔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순간에 잠들면 결국 괴물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

 

  하여 일은 끝나야 끝나는 것. 그때까지는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도록 할 것.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정에 휘둘려 이성이 잠들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그림은 그것을 명심하도록 해주고 있다.

 

여기에 오윤의 [애비]는 아들을 데리고 또는 아들을 보호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본인도 힘들지만 그래도 미래 세대인 아들을 지키고 보호해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 그림인데... (그림은 책을 참조... 저작권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2008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도 광장의 촛불은 시들지 않는다. 유장하게 퍼져나가는 '징소리'처럼 오윤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넘어 깊고 뜨거운 사랑과 연대의 자유를 되찾게 일깨워준다. 광장은 열려 있고 우리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서로의 촛불에 심지를 밝혀주며, 서로의 '애비'가 되어 서로를 굳세게 지켜주며, 마침내 길이 되어간다.' (279쪽)

 

이때 애비는 약자를 지켜주는 애비다. 결코 강한 자가 더 큰소리치게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애비가 아니다. 강한 자임에도 강한 자임을 부정하는, 약자 코스프레,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는 누군가를 지키는 그런 애비들이 아니다.

 

이 애비는 이 책의 238쪽에서 인용한 백석의 시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들을 보듬고 그들과 함께 가는, 그래서 그들의 앞날이 밝아가게 하는 그런 애비인 것이다.

 

근 10년 전 책임에도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들, 그리고 그림을 보고 느낀 생각들이다.

 

이성이 잠들지 않도록 하고, 약자 코스프레를 도와주는 그런 애비가 아니라 진실로 약한 존재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함께 보듬고 가는 그런 아버지가 필요한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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