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64
김재혁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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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아니 안 적은 있었던가. 그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릴케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이다. 그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릴케를 잘 모르면서도 한컴 타자연습에 있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이 릴케가 나오니, 이름을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학창시절에, 중학교 때쯤이던가, 책받침을 써야 하던 그 때, 연예인들의 사진이 책받침에 등장하기 전에 책받침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소재들이 시였고, 그 중에 릴케의 시도 있었다.

 

그렇게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함께 책받침을 통해 릴케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냥 시인으로. 그를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이. 왜 그가 이렇게 유명한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마도 내게 다가온 시는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가을날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지시고,

평원에는 바람을 풀어줍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가득가득하도록 명해 주시옵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녘의 낮을 주시어,

무르익는 것을 재촉하시고

무거워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이제 집에 없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살 것이며,

깨어 앉아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이 구를 때면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불안하게 방황할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주연 옮김, 검은 고양이, 민음사. 1994 개정증보판 1쇄. 22쪽.)

 

아마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가을을 맞이하여 겸허하게 기도하는 그런 느낌을 받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기도조의 시로써 나에게 다가왔는데, 무언가 애련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런 시들이었는데, 그런 릴케를 우리나라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시창작에 참조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릴케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핀 책이 되는데, 일제시대에는 박용철과 윤동주, 해방이 되고 난 뒤에는 김춘수, 김현승, 전봉건, 김수영, 박희진, 허만하, 이성복, 김기택 등이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릴케의 시에서도 영향을 받고, 그의 시가 지닌 소재라든지, 표현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시인들, 그리고 시를 살펴 알려주고 있으며, 릴케의 산문에서 시적 지향점을 찾았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릴케의 산문으로 유명한 것이 두 편인데, 그 중 하나는 "말테의 수기"이고 또 하나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다.

 

모두 릴케가 시를 대하는 태도를 알게 해주는 산문들인데, 그런 글을 읽고 자신의 시창작에 영감을 얻은 우리나라 시인들이 한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릴케의 영향이 이렇게 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릴케의 시를 그냥 따라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성향과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그의 시를 창조적, 능동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인 영향이 아니라 변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나라 시가 더욱 풍요로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비교문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영향관계를 살펴 창조적 변용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밝히고 우리나라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그런 연구.

 

새삼 예전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릴케의 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는 좋은 시긴이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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