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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1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어렸을 때 축약본으로 읽었던 책, 제목은 "장발장"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책 제목을 붙였고, 우리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보다는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릴 적 읽었던 축약본으로 이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이 책이 무려 5권이나 되는 분량이라는 사실도 다시 읽기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완역본을 읽고 싶어졌다. 소설은 작가가 쓴 그대로 읽어야 더 맛을 느낄 수 있지 않나.
게다가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레 미제라블'은 마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처럼 다 읽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알고 있는 그런 소설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어서 완역본을 읽으면 감흥이 덜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전체적인 줄거리가 감흥을 받는데 별로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세한 부분의 묘사를 읽어가는 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축약본에서 생략된 부분을 읽으면서는 축약본이 줄거리를 중심으로 참 많이도 생략했구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읽을 수 있고.
이제 '레 미제라블' 읽기의 시작이다.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이다.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면,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억압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상류층 사람들 이야기도, 귀족 이야기도 아닌, 사회 하층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너무도 힘들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첫권의 제목이 바로 '팡틴'이다. 팡틴을 첫권의 제목으로 삼은 이유가 무얼까? 사회 하층민 중에서도 가장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사람, 바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닐까 하는데...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비하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위고는 이 소설의 처음을 매춘에 종사하게 되는 여인, 팡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도 사람임을,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개인의 타락한 성품이 아니라 사회제도임을, 그래서 사회제도를 고쳐야 함을, 팡틴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보여준다.
여직공으로서 한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여자. 이 여자에게는 일이 필수적인데, 남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아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는 여자.
직장에서 쫓겨난 여자가 자기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그것도 비열하게 아이를 볼모로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에게 속고 있는 여자는 결국 마지막 단계인 몸 파는 단계까지 간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전락. 그런데도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품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팡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첫 시작에 팡틴을 놓은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사람, 그 사람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려고 몸부림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제목은 팡틴이지만 시작은 미리엘 주교로부터 시작한다. 축약본에서는 생략된 부분이다. 미리엘 주교에 대한 부분이 100쪽이 넘게 전개되는데... 이 주교가 장발장을 감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스러운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은, 소설에서 장발장이 이 주교의 단계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니겠는가. 주교 역시 젊은 시절엔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교가 된 이후 그는 성자의 삶을 산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엘 주교를 통해 시작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장발장 역시 미리엘 주교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 매춘에 종사하지만 팡틴 역시 미리엘 주교처럼 살 수 있다는 것.
비참한, 불쌍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늘 불행하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이 주교처럼 성스러룬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런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첫권이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다만, 주교처럼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이 지닌 편견이 얼마나 강한지, 그것을 극복하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소설에서는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삶은 그렇게 사회에 종속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또다른 축인 자베르 역시 불쌍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기 틀에 갇혀 사는 사람. 다른 의미에서 가엾은 사람이 바로 이 자베르 형사다. 그가 얼마나 가엾은 사람인지 이 첫권에 잘 나타나 있다.
비참한 사회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이 비록 사회경제적으로는 불쌍한 사람, 비참한 사람, '레 미제라블'이겠지만, 이들의 정신은 숭고하고 성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첫권이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한지, 그들보다 한참 못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더 충만한 삶을 사는지 우리는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역설적으로 '레 미제라블'은 바로 그런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 영혼이 썩어있는 사람들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제 팡틴을 지나 코제트로 간다. 순수한 어린이가 겪는 고통, 그 아이의 성장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이 첫권의 작은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1부 팡틴 : 1. 올바른 사람 - 2. 추락 - 3. 1817년에 - 4. 위탁은 때로 버림이다 - 5. 하강 - 6. 자베르 - 7. 샹마티외 사건 - 8. 반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