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꿀벌의 예언 1~2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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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이다. 환경과 역사가 교차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과학과 환상이 어우러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베르베르의 소설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한 상상력을 통해서 인류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은 곤충, 꿀벌에서 시작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각국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 빠른 시기에 끝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하고 만다.


그렇다. 퇴행 최면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전생에 접속한다는 것은 환상에 속한다. 전생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소설은 이런 환상을 과학과 연결짓는다. 바로 시공간의 중첩. 그리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예로 들어서 말한다.


우리가 말을 한 이후에는 결과는 말을 하기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언을 알고 있다면, 그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하려고 한다. 즉, 예언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행위로 인하여 예언은 실현되든 실현되지 않든 한다.


먼 미래에 제3차 시계대전이 일어나고 인류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을 안 주인공.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자신이 실행한 최면때문에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되고,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전생으로 간다.


예언서를 작성한 인물이 바로 현재를 살고 있는 주인공의 전생이다. 그것도 현재의 인물이 전생의 인물에게 역사를 알려줘서 기록된 예언. 그런데 이 예언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먼 미래의 일이 쓰였다. 이게 무슨 일?


소설은 여기에서 새로운 흥미를 유발한다. 그냥 전생으로 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줬다에서 끝나면 사건은 과거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건이 변할 수는 없다.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베르베르 소설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현재를 넘어선 자신도 모르는 미래가 예언서에 적혀 있다. 그래서 그 예언서를 읽어야만 미래를 바꿀 수가 있다.


예언서의 이름은 '꿀벌의 예언'이다. 예언서를 쓰기 위해서 베르베르는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성스러움을 인정하던 시대.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던 시대. 그래서 수호천사로 중세로 간 현생의 인물이 전생의 인물에게 사건을 불러주게 된다. 이것이 예언서가 된다.


이때 네 사람이 얽히고 설키게 된다.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베스파, 주인공인 르네, 그리고 르네의 스승이자 전생에서부터 함께 하는 알렉상드르와 그의 딸 멜리사.


르네와 알렉상드르, 멜리사가 역사학자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거를 추적할 수가 있다. 이런 역사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에서는 역사적 사실도 기록되고 있다. 또한 베르베르는 자신의 어학지식을 소설에서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베스파는 등검은 말벌을 의미하고, 멜리사는 꿀벌과 관련이 있다는 것.


검은등말벌이 꿀벌을 멸종시켜,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데, 그를 구원하는 것은 과거에서 온 여왕 꿀벌. 그리고 멜리사로 추정되는 인물인 드보라를 통해서 미래의 도시가 나오게 되는데...


허구적인 소설을 통해서는 이렇게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겪는 일들로 서술이 되고, 종교의 역사는 소설에 '므네모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게 된다. 이 역사적 사실은 주인공들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서술한다. 사실을 알려준다. 종교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된다.


다음에 전생 여행을 통해서 다시 역사를 만나게 된다. 역사에 기술된 과거가 아니라 과거 인물이 겪는 일을 통해 만나는 역사. 그리고 예언서를 찾는 과정에서 추리가 곁들여진다.


결말 부분에 나타나는 반전까지. 소설은 끝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게 전개된다. 여기에 꿀벌이 우리 인간의 삶에 지닌 의미까지.


아주 희망적으로 소설이 끝났으면 하지만, 베르베르는 현실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지만, 지금 이대로 살아가는 우리들 생활에서는 지구 온난화를 피할 수 없음을 그는 소설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꿀벌에게서 생존 방식을 배우고 꿀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음을... 그런 미래를 소설의 끝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만, 지금처럼 살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다. 인류는 3보 전진하고 2보 후퇴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것. 또 이런 역사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간다는 것.


그렇다. 예정설이 아니다. 전생이 있다고 해서 후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현재를 통해 바꿀 수가 있다. 즉 예정설 자체가 결정론이 아닌 것이다.


예정은 말 그대로 예정이다. 얼마든지 수정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3보 전진 2보 후퇴에 담겨 있는 의미다.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언제든지 전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2보 후퇴의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2보 후퇴의 기간을 줄이는 일 또한 우리들의 행위에 달려 있다. 베르베르는 바로 '꿀벌의 예언'이라는 이 소설을 통해서, 아니 소설 속 예언서의 존재를 통해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방대한 소설이지만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빨리 끝을 향해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소설 속 주인공이 빨리 예언서를 찾으려 하는 마음과도 같이. 하지만 예언서를 찾기 위해서 그들이 시간 순서를 밟아가야 하듯, 이 소설 역시 순서대로 읽어가야 한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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