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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별 상관이 없다. 한편 한편이 완성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제목이 된 소설은 경쾌하다.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아니다. 이미 공산주의는 이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적은 무엇일까? 소설은 그런 자본주의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삶을 '자폐'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자폐 가족'이 바로 자본주의의 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한다. 관계맺기를 어려워하니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가 없다. 현대 문명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들이 된다. 그러니 그냥 자신들의 힘으로 살려고 한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니라 수요를 창출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 자폐 가족에게는 새로운 물품이 별로 필요없다. 그냥 그들이 자급할 수 있으면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적이 될 수밖에.
이런 과정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궁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발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으니, 그렇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환경 문제를 걱정하지만, 지금처럼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자본주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기후 재앙이나, 환경은 나아질 수가 없다.
결국 자본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먹고 사는 불가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를 이겨낼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참조할 만하다. '자폐 가족'이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이를 생태학자들의 용어로 바꾸면 '자급자족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먹을거리는 자신이 생산하고, 가능하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물품을 쓰면서 사는 삶. 자급자족의 삶.
그런 삶으로 생활이 바뀌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온갖 병폐들을 없앨 수가 있다. 이 소설 '자본주의의 적'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과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 나오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적'에 나오는 '자폐 가족'과 비슷하다.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런 삶이 경쾌하게 그려지고 있어서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게 된다. 가볍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는 않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냥 재미가 아니라 울림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읽은 뒤 이 소설집을 읽으니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검은 방'이라는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다면, 이 소설은 어머니를 중심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회상을 통해서 전에 읽었던 소설을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과도 연결이 되고.
한 시대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가? 과연 그런 사회는 도래했는가?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보다는 바로 우리 삶, 스스로를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로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 경쾌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무겁지 않게 표현하고 있지만, '계급의 완성'이라는 작품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사람들, 평생을 힘겹게 일하지만 얻는 것이라고는 상한 몸밖에 없는 사람들.
우연히 발바닥, 그것도 보드랍고 '연분홍 빛 발바닥'이라고 소설에서 표현한 태어날 때는 누구나 갖고 있는 그 발바닥을 땅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관리라는 명목으로 - 사실 그들은 관리하지 않아도 어릴 적 갖고 태어난 발바닥을 그리 험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관리하면서 더욱 더 보드랍게 관리를 할 뿐이다. 땅에 발디디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 그런 발바닥을 유지하고 있는데,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은 너무도 거칠고 갈라진 발바닥을 지닐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다. 어떤 이는 계급을 '냄새'로 구분했지만, 정지아는 이 소설에서 '발바닥'으로 구분했다. 땅을 딛고,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존재인 발바닥. - 물론 손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아내의 손을 이렇게 표현했다 -. 아들의 발바닥을 보는 순간 그는 '아들의 발만큼은 태어났을 적 그대로, 보들보들, 야들야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복숭아꽃 빛깔로 되돌려주고 싶었다'(211쪽)고 생각했다.
아들의 발바닥을 정리해주지만, 그것이 그때뿐이리라.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바로 계급은 이렇게 해서 완성이 된다. 소설 제목이 '계급의 완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슬프고도 무거운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는 가볍게 표현하고 있다. '해학적 표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우울에 찌들지 않게 그림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음을, 그런 희망을 우리가 지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