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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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9쪽) 란 말로 소설은 시작한다.

 

책 한 권의 영향으로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의 이야기는 많다. 그래서 소설은 처음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무슨 책이야? 궁금증을 유발한다.

 

책을 읽고 주인공인 오스만은 방황을 한다. 그는 이미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는 더이상 자신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같은 책을 읽었던 사람을 찾는다. 자난이라는 여성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그 여성을 통해 메흐메트라고 하는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어긋난다. 메흐메트와 자난이 그에게서 사라진다. 오스만은 그들을 찾아다니다 자난을 만나다. 자난과 함께 메흐메트를 찾는 여행을 한다. 그 여행이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터키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마치 청춘의 방황처럼 이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은 없다. 결국 메흐메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오스만.

 

여기서 과거와 현재의 터키가 중첩된다. 서구화되는 터키를 막고자 하는 메흐메트의 아버지인 나린 박사. 하지만 그 역시 책으로 인한 아들의 방황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사람을 붙이고, 서구화되어 가는 터키를 반대하는 일을 하는데...

 

오스만은 나린 박사와도 함께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화된 터키를 인정할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젊은이, 그것이 바로 오스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가 읽은 책 '새로운 인생'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여기서 나중에 밝혀지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이 나오는데, 책과 카라멜이 같은 제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쓸모가 비슷하다는 얘기 아닌가. 젊은이들에게 달콤함을 주지만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카라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판 사람은 나중에 장님이 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반면에, 책 '새로운 인생'을 쓴 사람은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한때의 달콤함이라지만 어린이에게 주는 달콤함은 그 해악이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책을 쓰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래서 책에 대해서는 역대 정권에서, 특히 독재정권에서 더 심한 탄압을 하는지도 모른다.

 

탄압이 심할수록 청년들은 이런 책에 더욱 흥미를 지니고 읽게 되고, 책에 쓰여 있는 일들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한다. 책에 있는 인생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욕구, 그것들이 바로 청년들이 지닌 욕구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엔 '새로운 인생'이 세 번 펼쳐진다. 주인공 오스만이 읽고 영향을 받은 책'새로운 인생', 어린 시절에 오스만이 먹었던 카라멜 '새로운 인생', 마지막으로 그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이 소설 '새로운 인생'

 

우리는 이 '새로운 인생'을 읽으며 새로운 인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결말은? 새로운 인생은 없다. 모두 덧없음이다. 사라짐이다.

 

오스만은 책의 끝부분에서 천사를 만난다. 그가 젊은시절 만나려 했던 천사를 죽음에 이르러 만나는 것이다. 천사는 삶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사는 죽음과 함께 존재한다. 그것을 '자난'이 잘 보여주고 있다.

 

자난'은 터키어로 '천사'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 오스만은 자난을 사랑하고 자난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함께 할 수 없다. 이는 천사는 삶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잠시는 함께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천사들이 작동하는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러나 이런 때는 지속적이지 않다. 우리의 인생에서는 천사보다는 삶의 일상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지만 그가 만나는 인생들은 현실의 삶들일 뿐이다.

 

일상에서 살아가는 일, 자난이 떠난 뒤 오스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런 그에게 다시 과거를 회상시키는 일이 생기는데...

 

젊은시절에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현실에서 배척당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해야 할 일이라는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딱 젊었을 때까지다. 이미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가는 일, 또는 자신의 과거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때는 죽음만이 새로운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오스만 결국 그는 천사를 보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꿈을 안은 채.

 

처음에는 서구화냐, 전통고수냐를 놓고 젊은이와 기성세대간의 갈등이 주를 이룰지 않을까 했다. 중반까지도 그랬다. 터키의 역사와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메흐메트를 감시하는 사람들 이름에 시계 이름을 붙여준 것에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소설은 이것만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터키의 역사와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갈등도 다루고 있지만, 도대체 어떤 것이 새로운 인생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도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도 모두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이들도 역시 기존의 것들을 융합한 것일 뿐이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기존에 살아온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그들이 살아온 인생, 방식에 내 삶을 살짝 얹는 것 뿐이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을 읽으며 끝부분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새로운 인생은 없다. 우리는 모두 함께 아주 조금 다르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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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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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가 쓴 소설 중에 네 번째로 읽은 소설. "우리의 선조들"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소설 중에 마지막 3부작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전에 읽은 소설처럼 환상적이다. 어찌보면 요즘 드라마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적인 요소들도 있다.

 

가령 주인공들의 한 축인 나중에 사랑에 빠진 토리스먼드와 소프로니아의 이야기. 토리스먼드는 소프로니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알고 있으나, 사실 알고 봤더니, 이복 누이였고, 어머니가 같은 줄 알았더니, 토리스먼드의 어머니는 소프로니아를 키워준 양모에 불과했으니 둘은 핏줄이 섞이지 않은 이복남매라는 사실.

 

요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데, 이 내용이 중심을 이루지 않고 주변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막장드라마와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질울포, 랭보와 브라다만테를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제목인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아질울포이고, 그를 사랑하는 브라다만테와 그를 추종하는 랭보.

 

아질울포는 어쩌면 원리원칙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불쾌히 여겼다'(14쪽)고 하듯이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갑옷 속에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갑옷만 존재하는, 그래서 살이 있는 사람이 아닌, 규칙과 규정만 있는 존재.

 

그런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피가 흐르는 육체가 필요하다. 감정이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서 '존재하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존재로 변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본래 원리원칙이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유용한 원리원칙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을 구속하는 원리원칙이 되기도 한다.

 

아질울포가 깨끗한 하얀 갑옷으로만 존재했을 때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원리원칙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예가 프리쉴라의 성에 도착했을 때 그가 한 행동이다.

 

그는 사랑을 육체를 도외시한 원리원칙에만 해당하는, 글 속에만 존재하는 그런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가 소프로니아를 구한 다음에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보통 기사소설은 위기에 처한 공주 또는 귀부인이 자신을 구해준 기사와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남겨두고 떠날 뿐이다.

 

하지만 소프로니아는 영원히 처녀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기사'처럼 인간의 존재를 포기한, 마치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성배 기사단'과 같은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져 처녀성을 잃은 소프로니아를 보는 순간 그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영원한 처녀, 성처녀로 남아야 할 여인이 사랑에 빠져 처녀성을 잃었음을 알게 된 순간, 원리원칙만을 주장하는 아질울포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리원칙이 없어져야만 할 것인가? 아니다. 원리원칙은 필요하다. 다만, 인간의 현실에 맞게 변용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랭보'다. 랭보는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고 전쟁통을 누빈다. 그가 누비면 누빌수록 갑옷은 점점 더 깨끗함을 잃어간다.

 

이는 원리원칙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원리원칙을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랭보'를 통해 보여준다. 랭보가 그 갑옷을 입고 전투를 치르면 치를수록 갑옷은 랭보에게 꼭 맞게 변해간다.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은 랭보. 그는 이제 아질울포를 쫓는 브라다만테를 자신에게 오게 할 수 있다. 아질울포라는 원리원칙을 추구하던 브다다만테는 사라진 아질울포와 그의 갑옷을 입고 그 갑옷을 자신의 몸에 맞춘 랭보를 발견하고는 수녀원을 박차고 랭보를 따라 나선다.

 

이제 원칙은 사람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예다. 원리원칙만 따지던 아질울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당한다. 그러나 그것에서 벗어난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늘 아질울포를 따르던 랭보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자신이 쫓던 브라다만테로 하여금 자신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 그것은 원리원칙에 빠진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원리원칙이 따르게 한 결과일 것이다.

 

참, 환상적인 소설이고, 다양하게 해석이 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나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원리원칙'의 문제로 대입하여 읽었다. 그렇게 읽어도 나름 생각할거리를 제공하니, 소설이라는 문학은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이 소설은 약간의 추리소설적 면을 지니고 있는데, 소설의 서술자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수녀가 자신이 겪고 들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도대체 그 수녀가 누구인가 계속 생각하게 한다. 그 수녀가 누구인지는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 읽어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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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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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읽기. 이번엔 "반쪼가리 자작"이다. 제목 그대로 반쪽이 된 인간 이야기다. 참으로 환상적인 이야기지만 생각할거리는 많다.

 

사람이 반으로 쪼개진다. 육체만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쪼개진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자신의 내면이 분열된 사람이야기는 있었지만, 이렇게 몸이 정확하게 반토막난 사람과 그 반토막이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는 이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선과 악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온전한 몸을 지닌 우리들 역시 반쪼가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작을 제외하고는 모두 온전한 몸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온전한 정신을 지니고 있을까? 이들에게 일방적인 선이나 일방적인 악은 없다. 이들은 이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중적인 모습, 어쩌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반쪼가리 자작의 분열된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악만 남은 자작과 선만 남은 자작.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사람들에게 배척당한다.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는 절대악과 절대선은 인간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들은 문둥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인해 그들을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카톨릭에 탄압받아 피신한 위그노 신자들에게도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부담으로 다가온다. 즉 절대적인 악과 선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 절대적인 악과 선이 결합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만큼 모순적인 존재이고, 이런 모순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쪼가리들이 서로 결투를 하는 것, 그러나 선과 악, 어느 것도 승리할 수 없다. 둘 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데, 이들을 의사가 결합해서 살려낸다. 이제는 선과 악이 한 몸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갈등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칼비노의 이 소설은 환상적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그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이 선과 악,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서는 안 됨을.

 

인간들의 삶에는 선도 악도 모두 함께 하고 있음을, 우리 내면에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모두 있음을, 그리고 그런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사랑에 빠진 파멜라 역시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중에 선과 먼저 결혼식을 하지만 결국 선하고만 살 수는 없음을 파멜라와의 결혼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다만, 선하고 먼저 결혼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네 삶에서는 그래도 선이 조금 더 우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확히 선과 악이 반반이 아니라 비중이 엇비슷하지만 그래도 선이 우리에게는 조금 더 필요하다는 생각, 내 안에 있는 선과 악 중에서 선이 더 잘 활동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길지 않은, 겨우 120쪽을 채운 소설인데,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재미도 주고, 생각도 할 수 있게 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에서 1부라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3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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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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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가 쓴 소설 중에 두 번째로 읽은 소설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다소 모호한, 환상적인 소설을 읽은 기억으로 그의 다른 소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른 책.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이라는데, 어쩌다 보니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나무 위의 남작"이라? 나무에서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겠거니 짐작하고 집어들었는데, 그 짐작이 맞았다. 어릴 시절 나무에 올라갔다가 죽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다.

 

그냥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기  전후의 이탈리아 어느 도시이니 시민혁명이라는 역사의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만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고 나무로 올라간 이래 내려오지 않은 '코지모'라는 형의 이야기를 동생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냥 나무 위에 사는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여기에 프랑스 대혁명기 전후의 여러 사람들 이름도 나오고, 그 시대 상황도 나온다. 물론 구체적으로 그 시대 상황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무 위에서 어느 정도는 관조하는 그런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을 빗겨가지는 않는다. 귀족임에도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코지모, 그를 통해 시대의 변천을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로 인해 우리는 그 시대 상황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께 된다.

 

시대 상황에 몰입하지 않고 거의 60년에 이르는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게 된다. 이런 전개 속에서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땅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정치체제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정치체제로 바뀌어도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코지모의 생활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늙어서 죽어갈 때 결국 기구의 밧줄에 매달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렇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땅에서 나무로 올라가고 나중에는 하늘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나무를 보자. 나무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는 신성한 존재이기도 했다.

 

우리를 하늘과 연결해 주는 존재였으니. 그렇다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나무 위에서 살기로 결심한 코지모는 알게모르게 인간세상에서 나아가 하늘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내려올 기회가 있을 때에도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이는 다시는 땅에 발을 딛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그의 삶은 이미 이런 땅의 세계에서 떠났음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원하는 삶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힘들다는, 이상의 세계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소설에서 코지모와 관계되는 사람들은 나무에서 내려온다. 이상은 꿈꿀 수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땅에 내려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땅을 벗어나 살 수 없음을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코지모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뒤 그가 살던 곳에 나무는 베어지고 숲은 없어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자연과 함께 공존하던 시대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상을 꿈꿀 수 있는 나무가 사라진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 나무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살아갔던 코지모와 같은 인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소설은 그냥 나무 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흥미롭게 읽을 수도 있고, 이상과 현실의 중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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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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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작가의 생각이 들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바로 폭력의 시대다. 그런데 그 폭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를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일상을 살아가는데, 바로 그 일상이 다른 존재들에게 폭력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자들도 집에서는 다정한 사람,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하듯이, 우리가 겪고 있는 폭력 역시 두려움과 공포로, 일상에서 벗어난 테러와 같은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상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모여 지금 이 시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말을 보자.

 

동시대인의 보폭으로 걷겠다는 마음만은 변한 적이 없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나와 빼닮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쓸 수밖에 없다. 소설로 세계를 배웠으므로, 나의 도구는 오직 그뿐이다. 248-249쪽

 

그럼, 작가는 이런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총 7편의 소설이 한 제목으로 묶여 있는데, 각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 일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이들이 맺는 관계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일상적이다. 그냥 살아가는 도중에 만나는 관계일 뿐이다.

 

첫소설인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에 나오는 주인공은 가족과 떨어져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근무한다. 이미 가족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 그리고 주인공 역시 가족과 떨어져 있다. 미스조라는 아버지의 옛애인과 만나지만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다. 이런 형식성은 바로 주인공과 함께 있는 샥샥이라는 고양이 인형에게서 잘 드러난다.

 

굳이 그에게는 생명이 있는 고양이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투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근무하는 곳에서도 감정의 교류는 없다. 감정의 교류는 낯설다. 미스조가 남긴 거북이를 통해 주인공은 그것을 깨닫는다.

 

샥샥과 나 사이에, 바위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33쪽)

 

이 얼마나 상냥한 폭력의 시대란 말인가. 사람들과 또다른 존재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줄은 없다는 말은. 그냥 자기 식대로 살다 소멸해 간다는 말은. 이는 나를 만들어가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발언이 아니던가. 그런 모습 아니던가. 우리는 지금 같은 공간, 같은 시대를 살고는 있지만,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고등학생이 애를 낳고, 그 아이가 죽음의 순간에 처해 있음에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이나,

 

돈많은 노인을 죽인 대가로 많은 돈을 받으려 했던 사람들 이야기, 그러나 실제로 죽였는지 또 돈의 출처는 어떤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안의 천사',

 

뚱뚱한 몸으로 돼지라는 별명을 지닌, 일본인과 한국인을 부모로 둔 아이가 북한 국적의 아이와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그러나 그들 역시 어긋날 뿐인 '영영, 여름',

 

나이든 여교사를 등장시켜 어긋나는, 무언가 자꾸 빗나가는 관계를 보여주는 '밤의 대관람차'

 

우여곡절 끝에 집을 장만하지만 그 집을 얻기까지 미끌어지는 관계를 보여주는 부부와 그 집에 얽힌 사연을 보여주는 '서랍 속의 집'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지식인 엄마, 그리고 영어 유치원 보조 안나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주는 '안나'라는 소설.

 

이 모든 소설들에서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되 다르게 살아갈 뿐이고,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진심을 상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만남에서는 어떤 칼들이 숨겨져 있다.

 

웃음이라는, 일상이라는 관계 속에 위장된 칼들, 그 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으로, 상처로 다가오게 된다.

 

그런 관계들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갈수록 우리는 관계맺기를 포기하고 이런 '상냥한 폭력'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란, 절대적 개인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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