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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9쪽) 란 말로 소설은 시작한다.
책 한 권의 영향으로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의 이야기는 많다. 그래서 소설은 처음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무슨 책이야? 궁금증을 유발한다.
책을 읽고 주인공인 오스만은 방황을 한다. 그는 이미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는 더이상 자신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같은 책을 읽었던 사람을 찾는다. 자난이라는 여성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그 여성을 통해 메흐메트라고 하는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어긋난다. 메흐메트와 자난이 그에게서 사라진다. 오스만은 그들을 찾아다니다 자난을 만나다. 자난과 함께 메흐메트를 찾는 여행을 한다. 그 여행이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터키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마치 청춘의 방황처럼 이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은 없다. 결국 메흐메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오스만.
여기서 과거와 현재의 터키가 중첩된다. 서구화되는 터키를 막고자 하는 메흐메트의 아버지인 나린 박사. 하지만 그 역시 책으로 인한 아들의 방황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사람을 붙이고, 서구화되어 가는 터키를 반대하는 일을 하는데...
오스만은 나린 박사와도 함께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화된 터키를 인정할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젊은이, 그것이 바로 오스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가 읽은 책 '새로운 인생'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여기서 나중에 밝혀지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이 나오는데, 책과 카라멜이 같은 제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쓸모가 비슷하다는 얘기 아닌가. 젊은이들에게 달콤함을 주지만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카라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판 사람은 나중에 장님이 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반면에, 책 '새로운 인생'을 쓴 사람은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한때의 달콤함이라지만 어린이에게 주는 달콤함은 그 해악이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책을 쓰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래서 책에 대해서는 역대 정권에서, 특히 독재정권에서 더 심한 탄압을 하는지도 모른다.
탄압이 심할수록 청년들은 이런 책에 더욱 흥미를 지니고 읽게 되고, 책에 쓰여 있는 일들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한다. 책에 있는 인생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욕구, 그것들이 바로 청년들이 지닌 욕구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엔 '새로운 인생'이 세 번 펼쳐진다. 주인공 오스만이 읽고 영향을 받은 책'새로운 인생', 어린 시절에 오스만이 먹었던 카라멜 '새로운 인생', 마지막으로 그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이 소설 '새로운 인생'
우리는 이 '새로운 인생'을 읽으며 새로운 인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결말은? 새로운 인생은 없다. 모두 덧없음이다. 사라짐이다.
오스만은 책의 끝부분에서 천사를 만난다. 그가 젊은시절 만나려 했던 천사를 죽음에 이르러 만나는 것이다. 천사는 삶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사는 죽음과 함께 존재한다. 그것을 '자난'이 잘 보여주고 있다.
자난'은 터키어로 '천사'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 오스만은 자난을 사랑하고 자난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함께 할 수 없다. 이는 천사는 삶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잠시는 함께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천사들이 작동하는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러나 이런 때는 지속적이지 않다. 우리의 인생에서는 천사보다는 삶의 일상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지만 그가 만나는 인생들은 현실의 삶들일 뿐이다.
일상에서 살아가는 일, 자난이 떠난 뒤 오스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런 그에게 다시 과거를 회상시키는 일이 생기는데...
젊은시절에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현실에서 배척당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해야 할 일이라는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딱 젊었을 때까지다. 이미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가는 일, 또는 자신의 과거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때는 죽음만이 새로운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오스만 결국 그는 천사를 보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꿈을 안은 채.
처음에는 서구화냐, 전통고수냐를 놓고 젊은이와 기성세대간의 갈등이 주를 이룰지 않을까 했다. 중반까지도 그랬다. 터키의 역사와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메흐메트를 감시하는 사람들 이름에 시계 이름을 붙여준 것에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소설은 이것만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터키의 역사와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갈등도 다루고 있지만, 도대체 어떤 것이 새로운 인생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도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도 모두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이들도 역시 기존의 것들을 융합한 것일 뿐이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기존에 살아온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그들이 살아온 인생, 방식에 내 삶을 살짝 얹는 것 뿐이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을 읽으며 끝부분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새로운 인생은 없다. 우리는 모두 함께 아주 조금 다르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