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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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가 쓴 소설 중에 네 번째로 읽은 소설. "우리의 선조들"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소설 중에 마지막 3부작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전에 읽은 소설처럼 환상적이다. 어찌보면 요즘 드라마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적인 요소들도 있다.

 

가령 주인공들의 한 축인 나중에 사랑에 빠진 토리스먼드와 소프로니아의 이야기. 토리스먼드는 소프로니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알고 있으나, 사실 알고 봤더니, 이복 누이였고, 어머니가 같은 줄 알았더니, 토리스먼드의 어머니는 소프로니아를 키워준 양모에 불과했으니 둘은 핏줄이 섞이지 않은 이복남매라는 사실.

 

요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데, 이 내용이 중심을 이루지 않고 주변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막장드라마와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질울포, 랭보와 브라다만테를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제목인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아질울포이고, 그를 사랑하는 브라다만테와 그를 추종하는 랭보.

 

아질울포는 어쩌면 원리원칙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불쾌히 여겼다'(14쪽)고 하듯이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갑옷 속에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갑옷만 존재하는, 그래서 살이 있는 사람이 아닌, 규칙과 규정만 있는 존재.

 

그런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피가 흐르는 육체가 필요하다. 감정이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서 '존재하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존재로 변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본래 원리원칙이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유용한 원리원칙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을 구속하는 원리원칙이 되기도 한다.

 

아질울포가 깨끗한 하얀 갑옷으로만 존재했을 때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원리원칙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예가 프리쉴라의 성에 도착했을 때 그가 한 행동이다.

 

그는 사랑을 육체를 도외시한 원리원칙에만 해당하는, 글 속에만 존재하는 그런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가 소프로니아를 구한 다음에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보통 기사소설은 위기에 처한 공주 또는 귀부인이 자신을 구해준 기사와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남겨두고 떠날 뿐이다.

 

하지만 소프로니아는 영원히 처녀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기사'처럼 인간의 존재를 포기한, 마치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성배 기사단'과 같은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져 처녀성을 잃은 소프로니아를 보는 순간 그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영원한 처녀, 성처녀로 남아야 할 여인이 사랑에 빠져 처녀성을 잃었음을 알게 된 순간, 원리원칙만을 주장하는 아질울포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리원칙이 없어져야만 할 것인가? 아니다. 원리원칙은 필요하다. 다만, 인간의 현실에 맞게 변용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랭보'다. 랭보는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고 전쟁통을 누빈다. 그가 누비면 누빌수록 갑옷은 점점 더 깨끗함을 잃어간다.

 

이는 원리원칙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원리원칙을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랭보'를 통해 보여준다. 랭보가 그 갑옷을 입고 전투를 치르면 치를수록 갑옷은 랭보에게 꼭 맞게 변해간다.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은 랭보. 그는 이제 아질울포를 쫓는 브라다만테를 자신에게 오게 할 수 있다. 아질울포라는 원리원칙을 추구하던 브다다만테는 사라진 아질울포와 그의 갑옷을 입고 그 갑옷을 자신의 몸에 맞춘 랭보를 발견하고는 수녀원을 박차고 랭보를 따라 나선다.

 

이제 원칙은 사람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예다. 원리원칙만 따지던 아질울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당한다. 그러나 그것에서 벗어난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늘 아질울포를 따르던 랭보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자신이 쫓던 브라다만테로 하여금 자신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 그것은 원리원칙에 빠진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원리원칙이 따르게 한 결과일 것이다.

 

참, 환상적인 소설이고, 다양하게 해석이 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나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원리원칙'의 문제로 대입하여 읽었다. 그렇게 읽어도 나름 생각할거리를 제공하니, 소설이라는 문학은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이 소설은 약간의 추리소설적 면을 지니고 있는데, 소설의 서술자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수녀가 자신이 겪고 들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도대체 그 수녀가 누구인가 계속 생각하게 한다. 그 수녀가 누구인지는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 읽어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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