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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찌는 듯이 덥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악취가 풍기는 거리, 라스콜리니코프의 위대한 망상과 살인은 바로 ’이 거리에서‘ 생겨나고 실행되었다. 『죄와 벌』은 19세기 러시아 대도시의 실상에 관한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사회적 기록이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빼어난 임상보고서이다.’ 라고 『책에 따라 살기-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에서 작가는 말한다.
살인을 저지른 후 라스니코프가 보이는 분열과 불안은 인간의 내재된 선과 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정의를 위해 한 살인은 정의로운가? 합당한가? 라스콜리니코프가 보여준 불안증이 그 답이다. 인간에게 있어 살인과 같은 악은 본질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내재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의 호머와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등 비극작가들의 작품에서 그것이 신탁이었든 운명이나 우발적 사고이었든 주인공들은 손에 피를 묻힘으로 두려움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 역시 신탁이었지만 살인을 하게 됨으로 혼돈에 빠지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시의 어둡고 소외된 빈민가에서 싹이 튼 증오심과 차가운 심장은 살인으로 두려움에 떨게 된다.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고 절대로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는 벌인 것이다. 살인을 실행하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죄의식과 두려움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는 당황스러움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생각한 이상을 위해 살인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있으니…. 오히려 당당하고 기뻐하고 더 강인해져야 하는게 아닌가.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 상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이 형벌이다. 그러면 그는 자유로운가? 다시 그는 차가운 심장 안에 갇히고 유배지의 동료들의 미움과 증오 안에 갇힌다. 그리고 소냐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쳐 스스로를 가둔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가 자신을 용서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은 자신을 사랑한 소냐로부터였다. 소냐에게서 그것을 보게 된 순간(정확히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는 진정한 자유와 구원 그리고 부활을 경험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불현 듯 무언가 그를 사로잡아서 그녀의 발에 몸을 던지게 한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안았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되기에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완결되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그림이다.
열린 결말, 독자에게 선택을 맡기는 현대소설에 익숙해진 나는 에필로그의 내용을 읽으며 진부하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관계를 맺는 현대에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리는 결말은 신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잠깐, 나는 살인을 저지른 후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들을 그리는 현대 문학들을 생각하게 된다. 고독함과 외로움에 갇히고 소외당하고 추방당하는 존재들.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전혀 가책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작가들은 왜 그런 정서들을 그려내고 있을까? 그들의 무정과 무자비를 학대나 소외로부터 오는 정신증의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문학 속의 일탈로부터 얻는 교훈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어쩌면 문학 안에서도 양심을 둘러싼 지방층이 두꺼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그런 문학들에 지쳐, 가끔 죄를 생각하면 형벌이 떠오르던 때의 소설을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