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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이언 매큐언의 인터뷰 기사에서 본 내용이다. 자신의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써야 하는 아들에게 "어느 정도의 개별 지도를 했고, 꼭 고려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고 했다. 아들은 에세이를 제출했고 점수는 C+이었다. 이언 매큐언은 아들의 선생님이 아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가 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아들이 불쌍했다고 한 작가의 말을 읽으며 혼자 웃었다. 흐흐
아들의 선생님이 동의하지 못한 것은 사실 작가의 관점이다. 독자가 읽어내는 메시지는 작가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에피소드이다. 그것이 문학의 재미고 탁월성이지 않을까? 이언 매큐언은 한 작품 안에 사랑, 젠더, 죽음, 정치, 언론, 예술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추리를 요구하는 플롯 안에 씨와 날로 엮어 놓는다. 그 중 한 두 가지 틀로 읽어도 생각할 많은 논제들이 생성된다.
그의 작품 『암스테르담』 안에서 역시 많은 사회적 담론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이언 매큐언의 작품에는 그만의 반전이 있다.
몰리 레인은 팜므 파탈이었던 듯하다.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남자들은 거의 몰리와 관계가 있었다. 그중 작곡가 클라이브 린리, 저널리스트 버넌 핼리데이,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는 그녀와 동거했거나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었던 남자들이다. 이 장례의 조문을 받고 있는 출판업자 조지 레인은 그녀가 죽기 전 결혼한 남편이다.
클라이브는 조문객들을 바라보며 자신과 몰리 세대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그 가사 “Talking about my generation”을 인용하며 그의 세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행운의 세대,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랐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 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였다. 신설 대학, 화사한 페이퍼백들, 로큰롤의 전성기, 적당한 이상 추구. 그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가 부서지고 정부가 느닷없이 젖을 떼며 잔소리를 시작했을 때, 이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구색을 갖추느라 취미와 가치관, 재산을 불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의 세대는 ‘68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히피 세대임을 추측하게 한다. 몰리와 그들이 젊은 시절 함께 했던 자유로운 삶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클라이브, 버넌, 줄리언, 조지 네 사람은 몰리를 중심으로 서로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비판하고 증오하는 관계이다. 친구인 클라이브와 버넌은 몰리의 죽음으로 인해 심리적 동요를 겪는다. 교향곡을 작곡중인 클라이브는 마지막 악장을 완성하기 위해 열중하지만 악상은 떠오르지 않고 초조해한다. 그는 긴장감 속에 왼손 통증을 느끼고 몰리와 같이 치매로 죽게 될 미래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이 자살을 실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병 들었을 경우 조력사망을 할 수 있도록 버넌에게 부탁한다. 버넌 역시 클라이브에게 같은 부탁을 한다. 버넌은 장례식에서 돌아와 ‘부재감’을 느낀다. 자신이 죽어 사라졌을 때의 세계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다.
편집국장인 버넌의 ‘조지 가머니와 몰리의 사진’을 공개하려는 시도는 언론이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산행 중 막 떠오른 악상을 붙잡아 작업에 열중하던 중, 성폭행의 위험에 처한 여자를 모른 척하고 악보를 그리고 있는 클라이브에게서 예술가의 이기심을 본다. 이와 관련해 클라이브와 버넌은 설전을 벌이고 서로의 행위를 비난한다. 두 사람은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서로를 향한 감정의 실체를 드러낸다.
부유했던 클라이브는 버넌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도움을 준 친구, 도움을 받은 친구 사이에 우정과 고마움만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졸렬하다. 둘 사이에 있었던 몰리라는 존재 역시 관계를 복잡하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애증은 미움 쪽으로 무게가 실린다.
정치적 계산과 개인적 감정 때문에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도구로서 언론이 얼마나 자주 유용하게 사용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도덕성을 잃은 매체는 살인도구이다. 저널리즘을 신뢰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기 힘든 혼란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경우 그 글의 진위나 의도를 의심하면서 보게 된다. 반면, 스캔들은 왜 그렇게도 빨리 믿고 퍼지는지!
멀리서 목격한 범죄현장을 외면하고 서둘러 돌아오는 클라이브에게서 도시의 익명성과 유폐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삶을 보게 된다.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들은 곤경에 빠진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는다. 이 부작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정죄되지 않기에 잠시 죄책감에 혼란스러웠던 양심은 곧바로 회복된다. 그는 곧바로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안락사는 우리에게 닥친 시급하지만 오래 숙고하게 되는 문제다. 자신이 죽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뇌사의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은 몰리처럼 되기 싫어서 클라이브와 버넌은 서로에게 조력사망을 부탁했지만, 조력사망은 청부살인이 되어버린다. 환각 상태에서 두 사람은 자신에게 죽음이 닥친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한다. 몰리의 죽음과 차이가 없다. 아이러니다.
결국 모든 것을 눈치 챈 버넌의 이 마지막 말이 나의 뇌리에 남았다.
“저것들이 산통 다 깨는군.”
질문들이 연속해서 떠오른다. 자연사보다 안락사가 더 친절할까? 스스로를 향한 살의와 타인의 살의 중 어떤 것이 더 폭력적일까?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 죽는다면 그 죽음을 환영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에게 죽음은 자연스럽지 않다. 언제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버넌이 자신의 부재감을 경험했던 것처럼. 이 사실이 제일 공포스럽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