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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평점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작가는 할로웨이에 서서 불과 몇 백 미터 거리에 너도밤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걷기의 미학을 표상하는 이미지다. ‘할로웨이(holloway)‘, 이 움푹꺼진 좁은 길은 기원전 500년 전부터 바이킹과 유목민들이 다니던 길이다. 오래 전 통행량이 많아지면서 터널처럼 홈이 깊게 파이고 양쪽에 둑이 형성되었다. 낙엽이 쌓인 이 오래된 길에서부터 고속도로까지는 10분 정도의 거리지만, 그 사이에는 몇 천 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바이킹과 금융가 사이의 거리.
그 고속도로를 달리던 토르비에룬 에켈룬은 이제 운전대를 놓고 사라져가는 옛길을 걷고 있다. 해마다 평균 2,500킬로미터에서 3000킬로미터 사이를 걷는다.
노르웨이에는 그가 걸을 길이 많다.
「1874년부터 노르웨이트레킹협회는 전 세계에서 도보여행을 즐기기 위해 방문하는 여행객들을 위한 길들을 새로 개척하고 관리했다. 오늘날 이 협회는 전국에 널리 알려진 여름철 도보여행길만 22,000킬로미터를 넘는 구간들을 관리하고 있다. 그 거리는 지구 둘레의 절반에 가깝다. 」
- 56p
그가 노르웨이에서 최초로 도보여행을 한 곳은 1874년에 만들어진 노르웨이 중부를 가로지르는 길이다. 해안산책로 ‘크로케뢰이‘는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코스가 짜여져 있다. ‘노르만슬레페‘는 북유럽인들의 수레가 지나간 길이다.
그는 혼자 걷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와 함께 걷기도 한다. 때로 구간 표시나 잘 관리 되고 있는 길을 벗어난다. 깨끗이 흔적이 지워져버린, 이제는 손으로 그린 옛날 지도와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옛길을 걷는다. 그는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는다. 그리고 새로운 길 찾기를 계속 한다. 어제 걸었던 길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아직 걸어갈 길이 남아있는 자는 이미 지나온 길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많은 예술가들이 길에 대한 은유를 남겼다. 작가는 랠프 월도 에머슨의 『자연Nature』, 노르웨이 벌목꾼이자 시인인 한스 뵐리Hans Bøli를 소개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않은 길』을 쓰게 된 동기가 에드워드 토머스 Edward Thomas를 놀리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토머스는 어느 길을 선택했든지 후회했을 것이라고 한다. 길은 자주 인생을 은유해왔다.
독자는 빌 브라이슨의 『숲속걷기: 애팔래치안 트레일에서 미국의 재발견 A Walk in the Woods: Rediscovering America on the Appalachian Trail』 인용을 읽고 이 책을 펼쳐보게 될것이다.
오슬로 근교의 노르마르카 숲에서 오리엔티어링을 하는 것은 열대우림을 걷는 것과 다르다. 열대우림지역을 걷는 것은 대성당 안을 걷는 것 같다.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걷는 것은 훨씬 더 길이 험난하다. 맹그로브는 뻣뻣하고 단단한 쇠 같아서 마음대로 구부릴 수 없다. 그 숲을 이루고 있는 생명체들로 인해 숲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길을 갖고 있다.
현대인은 숲에서 방향을 찾고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거리를 측정하는 능력을 잃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어느 때고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놀랍고도 기억에 남는 일인 동시에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했다. 리베카 솔릿은 『길 잃기 안내서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에서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을 인용한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현재 온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147p
작가들의 이런 은유들은 ‘길잃기‘ 조차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는 길을 잃는다는 것, 그리고 절대침묵 속 고목들이 굽어보는 숲 바닥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걷기를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사람들- 프리드리히 니체, 찰스 다윈, 쇠렌 키르케고르, 버지니아 울프 같은 수많은 사상가들- 도 있다.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그들의 걷기에 있었다. 그들의 걷기는 느긋하게 산책하듯이 어슬렁거리며 거니는 부르주아적인 형태이다. 게이트우드는 늦은 나이에도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50년 애팔레치아트레일을 완주한다.
다시 할로웨이에 서서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에게로 돌아오자. 그가 있는 공간은 과거의 어느 시점을 기억하게 한다. 그 길을 지나간 바이킹과 유목민을 기억하고, 오두막으로부터 출발하는 해안가 길의 유년을 기억한다. 길은 공간에서 시간으로 흐른다. 인간과 장소는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장소일지 모르겠다. 그에게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길이 있다. 마치 손가락이 음계에 따라 기타줄과 피아노 건반, 플루트 키 구멍의 위치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유년기에 자주 찾았던 오두막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이다.
길은 우리를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옮겨가게 한다. 길은 미래의 어딘가 무언가를 향해 가는 경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떠나온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보편적인 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만든 자연환경와 사람들, 우리 조상들을 지나쳐 걷는 것이며, 노동과 여가, 호기심, 일상에서의 탈출을 가로지르는 시간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262p
길은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기억속 길의 시작은 유년기의 오두막이고, 그가 여행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길의 역사는 길 그 자체의 길이보다 더 길다‘는 사실이다.
도시에 사는 나는 하천변이나 공원의 매끈하게 잘 닦여진 산책로를 걷는다. 이 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는 공간이고, 다른 지름길을 모색할 여유도 주지 않는다. 때로는, 도심의 고궁과 빌딩사이의 거리를 걸으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을 상상하기도 하고, 산책자들(Flaneurs)의 느긋한 자유를 즐기기도 한다.
홀로 낯선 길을 걷게 되면, 우리의 의식은 현재의 문제들을 벗어나 낯선 풍경들을 탐색하게 된다. 그 탐색이 끝나고 나면 그 길을 걷고 있는 낯선 나를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 길에만 집중해서 다음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채 무엇이 기다릴지 기대하며 걷는 여행을 생각해 본다.
※ 마침 오늘 6월 19일은 ‘세계산책의 날‘이라고 한다. 수술한 딸내미 병실에서 걷기를 사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