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인 시민이 될 수 있다면 국가는 그들에 대한 투자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특수학교로 보내져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과 지원을 받았다. 교육 불가능", 나치가 사용했던 용어로
"무가치한 어린이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비엔나에서 이런 판정과 살해 과정은 슈피겔그룬트spiegelgruna 라는 시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겉보기에는 어린이병원을 닮은 시설이었다. 어린이를 살해하는 데는 수일에서 수주가 걸렸다. 항경련제인 페노바비탈phernsburbital 을 매일 먹이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분유나 코코아에 타 먹이거나 좌약 형태로 투여한 약물은 폐 기능을 조금씩 손상시켰다. 사망 원인은 보통 폐렴으로 기록되었다. 동원된 의료인들은 향후 연구를 위해 어린이의뇌를 적출하여 보존한 후, 가족들을 불러 자녀의 시신을 수습하게했다.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의사 중에 나치가 장악한 의료관료주의의영향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틀림없이 아스퍼거는 매일 그들을 만났을 것이다. 비엔나 대학병원의 스승 프란츠 함부르거 Hamburger 는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다. 아스퍼거 자신도 비엔나 시의다양한 자문위원회에 소속되었다. 조직의 최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으레 충성스러운 히틀러주의자였다. 눈꼽만치라도 야심이 있는오스트리아인이 전문직종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로 나치의 반감을 사서는 안 되었다. 그들과 잘 지낸다는 것은 곧 체제에 맞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 P446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세탁용 세제의 상표명은 퍼실persil이다. 원래 독일에서 생산된 퍼실은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세제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그 단어는 일종의 음산한 유머로서 당시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들이 나쁜 평판을지우기 위해 기울인 맹렬한, 때로는 터무니없는 노력을 가리키는말이었다. 연합군 측의 "비나치화 정책에 힘입어 영향력있는 위치에서 나치당원과 부역자를 몰아내려는 노력이 전개되자 사람들은허둥지둥 결백을 입증해줄 증인을 찾아다녔다.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사로잡힌 시대에 친절하거나 인간적으로 품위있는 행동을 했던순간을 유대인이 나서 증언해준다면 특히 가치가 있었다. 오명을씻으려는 사람은 종종 게슈타포에게 체포 협박을 당했다거나, 나치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희생자로 묘사했다. 나치에 보조를 맞춘 것은 책략일 뿐, 사실은 몰래 저항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노력이성공을 거두면 결백함 또는 "깨끗함을 인증하는 서류를 발급받았다. 그 서류를 페르질샤인, persilschein, 즉 "퍼실 증명서Persil certificate" 라고 불렀다. 그러나 심지어 그때도 페르질샤인에 대한 냉소가 팽배했다.
- P466

 "집에 둔다면 아이는 건강한 아이 다섯을 돌봐야 하는 어머니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될 것이다." 헤르타의 어머니에 대한 공감을 표현한 후 아스퍼거는권고한다. "슈피겔그룬트에 영구적으로 입원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그 아래에 서명이 있었다. 한스 아스퍼거."
모든 청중이 아스퍼거의 편지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그것은사형선고였다. 실제로 크체하는 헤르타가 1941년 7월 1일 슈피겔그룬트에 입원했으며, 세 번째 생일 다음날인 1941년 9월 2일 그곳에서 살해당했음을 확인했다. 기록상 사인은 폐렴이었다. 병원 문서보관소에 남아있던 기록에는 아이 어머니가 평생 비참한 꼴로 조롱당하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이런 길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데 눈물을흘리며 동의했다고 적혀 있었다. 헤르타의 부모 역시 나치 이념을지지했다는 것이 크체히의 평가였다. 그의 이야기가 불러일으킨 효과는 강력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청중은 프로그램 표지에 실린 아스퍼거와 소년의 사진을 힐끔거렸다. 크체히가 조용하고 감정없는목소리로 나치의 과거에 대해 더욱 마음 불편한 소식들을 전하는동안 축제 같던 분위기는 급변했다. - P475

레오 카너가 첫 번째 논문에서 기술한 지 거의 40년이 지난 1980 년에 발간된 DSM-III까지도 자폐증은 진단명으로 등재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정의 자체가 자주 달라져 1987년에 크게 바뀌었고,
1994년에도 다시 변경되었다. 2000년에는 약간 달라졌을 뿐이지만, 2013년에는 격렬한 논쟁과 함께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내용의김이 역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증상 체크리스트를 구성하는단어 수는 처음에 약 70개였지만 한때는 600개를 넘었으며, 다음판에서는 300개로 줄었다가, 판이 두 번 바뀐 뒤에는 다시 확장되어 거의 900단어를 헤아렸다. 진단명 자체도 유아자폐증에서 자폐장애로, 다시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계속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폐인을 식별하기 위해 개발한 증상 체크리스트가 끊임없이 개정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판에서는 16가지 진단기준 중 8가지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만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 12개 기준 중 6개인 때도 있었다. 또 다른 판에서는 볼크마와 예일 대학의 브리안 라이카우Batan Recilions 의 주장에 따라 2,000개 이상의 진단 조합 중 하나에해당하면 자폐증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양상은 1994년 아스퍼거 장애가 독립적인 진단명으로 추가된 이후 더욱 복잡해졌다. - P521

친구들이 갑자기 연락해 아이가 전화번호부를 외우는지, 이쑤시개 숫자를 기막히게 빨리 세는지 물어보는 바람에 귀찮아 죽겠다는 부모들이었다. 그러나 레인 맨>은 자폐증의 가장 초기부터 끈질기게 부모들을 괴롭혔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외부인에게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오래도록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지만마침내 모든 사람이 적어도 대충은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된 것이다.
루스 설리번이 옳았다. 〈레인 맨>은 자폐증의 서사를 영원히 바꾸었다. 자폐인의 진정한 어려움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본절대 다수에게 그것은 여전히 타인의 급박함일 뿐이었다. 하지만1988년 이후 대중은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했고, 동시에 전반적으로 자폐인의 모습에 우호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분명 진보였다. 자폐증이란 세계에서 최초로 배출한 스타인레이먼드 배빗 symond Eathat 이 가공의 인물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다 먼곳까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살아숨쉬는 자폐인 중에서 스타가 탄생해야 했다.
- P5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