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숨을 멈추고 모든 삶의 행위들을 생각하게 된다. 뻗었던 팔을 안으로 거두게 되고, 함부로 걷던 걸음의 보폭을 줄이게 되고, 말의 단어들을 고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주변인들 혹은 타인들에게 폭력적인 삶을 살아왔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호흡을 안으로 들이마시고, 발가락을 오므리고 전신을 움츠리는 자신을 상상한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손을 내밀어 빗물에 손을 적시던 두 부부. 아파트가 답답해서 살 수 없다고 하는 아내의 우울질의 피가 흐르는 깡마른 몸뚱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내 여자의 열매24p)”, 남편은 두 손에 가득 받고 있던 빗물을 아내의 얼굴에 끼얹으며 짜증을 낸다.

 

오래전 지인에게 들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났다. 대학생인 딸아이와 가볍게 언쟁을 하던 아빠가 손가락으로 말고 있던 쌀알크기의 휴지조각을 던지고 일어났는데, 그게 우연히 딸의 머리에 맞았고, 화가 난 아이를 달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쌀알 만 한 휴지조각이고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남편에게 돌을 들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했다는 지인의 말에 웃으면서, 딸이 서운했던 것은 그 휴지조각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 서슬에 담겨있는 분노와 행위의 폭력성 때문이란 생각을 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말라가고 온 몸에 멍이 들어가던 아내는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어버린다. 남편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식물을 돌본다. 식물이 시들고 열매를 화분에 심으며,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단편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베란다 사건은 인간의 작고 무심한 동작 하나에도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던 분노를 담을 수 있으며,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 여자의 열매채식주의자로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보인다. 이 단편이 미완성이라든가 습작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과 거부하는 심리가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강의 작품들은 노벨위원회 강연에서 밝힌 것처럼 몇 개의 질문들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쓰는 동안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 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질문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장면은 정육점 앞을 지날 때 침이 고이는 입을 틀어막고 지나가는 영혜의 꿈이다.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채식주의자42p)

 

그녀의 반복되는 악몽들은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개에 물리고, 아버지가 그 개를 잔인하게 죽이고, 개고기를 먹었던 누린내의 기억에서 그 꿈은 생겨났다. 불고기를 먹던 남편이 칼 조각을 입에서 뱉어낸 사건은 영혜가 일련의 꿈을 꾸게 된 트리거가 되었다. 아마도 그 칼 조각은 영혜 안에 있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의 꿈,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꿈은 어린 시절 먹었던 개고기가 명치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절망감과 연결되어 있다. 영혜가 육식과 섭식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혜는 인간 종이길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먹는 행위는 에로스(eros, 성적충동)만큼이나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충동)과 관련이 있고, 생명만큼이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육식은 도살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몽고반점에서 영해의 형부인 화자는 성적 충동과 예술가의 양심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몽고반점으로 촉발된 욕망은 예술가의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를 향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예술가의 것이라면,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 있는 폭력성을 구별하는 경계가 모호한 까닭에 더욱 많은 폭력이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채식주의자50p)”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를 향해 하는 아버지의 눈물 나는 애원은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 의해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욱 극적으로 폭로된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해를 하는가?

 

영혜와 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견디고, 그 시간은 두 사람에게 다른 모양의 흉터를 남겼다. 여전히 그녀들에게 고통은 진행형이다. 영혜가 입원해 있는 지방 병원을 찾아간 언니는 죄의식을 느낀다. 유독 아버지의 손찌검의 대상이었던 영혜는 자매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냥 돌아가지 말자고 했다. 산길을 내려와 경운기를 얻어 타고 집을 향하던 길에 저녁 빛에 불타던 미루나무를 말없이 바라보던 영혜를 떠올린다.(192p) 영혜의 고통을 모른 척 했던 것은 그때도 지금도 자신 역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영혜를 실은 앰뷸런스 안에서 창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221p)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불평등을 외면했었던가, 요구 받은 정의를 얼마나 많이 회피했던가를 생각했다.

 

우리 안에는 원래부터 폭력이 내재 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폭력 아래 놓여 있고, 폭력을 습득하고, 행사하는가를 생각한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문을 쾅 닫고, 서류를 사납게 낚아채고, 볼펜을 탁탁 거린다. 내뱉는 단어, 휘젓는 손짓은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식물이 되기 전 온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지가 나오고 점점 나무로 변해간다. 그녀를 멍들게 하는 것은 도시의 주거 형태의 폭력성과 그녀가 추구하는 삶에 무심한 반려라는 이름의 타자, 그리고 짜증 섞인 말과 행동들이다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직접적이며 주관적폭력은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인 폭력과 사회체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구조적인 객관적 폭력이 존재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런 폭력을 행사하게 됨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한 한강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 답으로서 인간 종이길 거부했던 영혜에게는 죽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재되어 있었든 학습된 것이든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해결하는 길은 두 사람이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는 생각이다. 나무 불꽃은 유년시절의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고, 이제 영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하는 언니가 바라보는 풍경이다. 세계와 인간의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밀어내고 관심과 배려와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표지는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가 담겨 있다. 그는 날카로운 선들로 야위고 핍진(乏盡)한 자화상과 피멍 투성이의 육체를 그렸던 화가다. 노을진 하늘과 땅, 나무들조차 병든 육체의 멍을 떠올리게 하는 검푸른 점과 선들이 섞여 있다. 사랑이 육체에 남긴 폭력적 질병과 죽음의 트라우마를 지닌 화가의 그림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희망을 찾은 화가의 삶과 작가의 질문들이 겹쳐진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5-02-08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여자의 열매가 그런 의미였군요 ㅋ 한강작가님의 폭력성에 대한 묘사는 너무 강렬한거 같아요 그래서 더 공감이 된다는~!!

그레이스 2025-02-08 18:52   좋아요 0 | URL

단편을 읽으면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폭력, 빛 등의 주제들인듯요.
맞아요 공감!

stella.K 2025-02-08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데 좀 당혹스러운 작품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일견 그렇구나 싶은데 아마 저는 채식주의자 이후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회의스럽더군요.ㅠ

그레이스 2025-02-08 18:55   좋아요 1 | URL
저의 경우, 노벨위원회 강연과 관련해서 읽으니 더욱 선명해져요.
작가가 자신의 몸을 도구로 해서 글을 쓰고, 혼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풀어가서 불편한게 아닌가 했어요.
사실 채식주의자는 이번이 세번째인데,,, 처음엔 저도 불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