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를 유심히 보고, 가엾게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죽음과 같은 출산과 그 출산이라는 것에 딸려오는 여성에게 씌워지는 의미와 구속들.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다가오는 구속들. 그러나 저 마음의 밑바닥에서 부정하고 저항하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식의 폭력 앞에서 들키지 않으려 하면서 얼굴을 굳힐 뿐이지. 강요된 모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 인격으로서의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그 폭력은 은근하게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올 때가 많다.
아이와 간격이 벌어진 후에야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에 공감한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 분신, 피붙이…… 이런 말들이 이기적이고 본질에 덧입혀진 모성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생명, 내가 보호하고 사랑해 주어야 할 생명 속에 나를 닮은 모습이 발견될 때 경이로움, 신비를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강요되고 맹목적인 모성에는 아이에 대한 존중은 결여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순일.
한국전쟁 때 비극을 맞이한 가문에 홀로 남은 여자 아이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마당 눈더미 속에 던져진 자신을 안아 올리던 어머니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 다섯 살 때 동생을 업고 어른들을 따라 도망치다 논두렁에 남겨졌던 외로움과 막막함, 동생 은일을 화상으로 죽게 했다는 죄책감, 외가에서 받은 부당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끌려와 당한 수모, 탈출을 위한 결혼 등이 뒤섞여 있다. 이순일은 자신의 아이들인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가 그 일들을 이야기로도 겪게 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가길 바란다.
아이들이 잘살기를 바랬고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잘 몰라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되뇌인다. 이순일은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고 있는 큰 딸 한영진이 사는 건물로 이사를 한다. 두 집 살림을 돌보면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순일은 딸들에게 자신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그의 바람처럼 딸들은 잘 살고 있는가?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는 이순일이 살았던 여자로서의 고단함이 되물림 되고 있다. 보여 지는 게 달라졌을 뿐.
이순일의 불행은 전쟁이나 이념갈등, 가난보다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것이다. 삶의 형편이 나아진 현재, 딸들이 겪는 갈등은 모습은 다르지만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영진이 감당해야 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요구되어지는 삶의 태도가 그렇다. 모성과 유부녀로 규정 지어진 삶. 생각은 하지만 그저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습관이 된 방식들이 그녀를 가두는 것 같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