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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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 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 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 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영진은 스스로를 모성이라는 게 결여된 잘못된 인간이라고 여겼고 ……

73p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를 유심히 보고, 가엾게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죽음과 같은 출산과 그 출산이라는 것에 딸려오는 여성에게 씌워지는 의미와 구속들.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다가오는 구속들. 그러나 저 마음의 밑바닥에서 부정하고 저항하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식의 폭력 앞에서 들키지 않으려 하면서 얼굴을 굳힐 뿐이지. 강요된 모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 인격으로서의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그 폭력은 은근하게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올 때가 많다.

아이와 간격이 벌어진 후에야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에 공감한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 분신, 피붙이…… 이런 말들이 이기적이고 본질에 덧입혀진 모성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생명, 내가 보호하고 사랑해 주어야 할 생명 속에 나를 닮은 모습이 발견될 때 경이로움, 신비를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강요되고 맹목적인 모성에는 아이에 대한 존중은 결여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순일.

한국전쟁 때 비극을 맞이한 가문에 홀로 남은 여자 아이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마당 눈더미 속에 던져진 자신을 안아 올리던 어머니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 다섯 살 때 동생을 업고 어른들을 따라 도망치다 논두렁에 남겨졌던 외로움과 막막함, 동생 은일을 화상으로 죽게 했다는 죄책감, 외가에서 받은 부당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끌려와 당한 수모, 탈출을 위한 결혼 등이 뒤섞여 있다. 이순일은 자신의 아이들인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가 그 일들을 이야기로도 겪게 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가길 바란다.

아이들이 잘살기를 바랬고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잘 몰라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되뇌인다. 이순일은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고 있는 큰 딸 한영진이 사는 건물로 이사를 한다. 두 집 살림을 돌보면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순일은 딸들에게 자신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그의 바람처럼 딸들은 잘 살고 있는가?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는 이순일이 살았던 여자로서의 고단함이 되물림 되고 있다. 보여 지는 게 달라졌을 뿐.

이순일의 불행은 전쟁이나 이념갈등, 가난보다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것이다. 삶의 형편이 나아진 현재, 딸들이 겪는 갈등은 모습은 다르지만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영진이 감당해야 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요구되어지는 삶의 태도가 그렇다. 모성과 유부녀로 규정 지어진 삶. 생각은 하지만 그저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습관이 된 방식들이 그녀를 가두는 것 같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p


한세진은 그러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삶 곳곳에 엄마 이순일이 겪었던 폭력과 수모는 여전하다. 그녀의 친구 하미영의 삶이 그랬고 미국에서 살다 죽음을 맞이한 이모할머니의 삶이 그랬다. 미군과 결혼해 이주해 살았던 이모할머니의 삶에 그 그림자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포들 사회에서 규정지어지고 평가된 여자로서의 그녀는 불행했다.

뉴질랜드에서 가끔 들르는 동생 한만수는 말한다. 그곳은 여자들에게 살기 좋은 곳이라고…….

과연 그럴까?

연년세세! 우리가 사는 집단 안에 흐르는 정신이 도도하다. 그 안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영진처럼 말이나 행동보다는 생각하는 것으로 버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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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5-14 21: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영화 <미나리>에서 부인이나 할머니의 시선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다면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습니다. ^^

그레이스 2021-05-14 21:43   좋아요 3 | URL
그러네요!

mini74 2021-05-14 2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을 꼬박꼬박 붙여 이름으로 서술되는게 인상깊었어요. 가장 가까운 듯 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참 모르는 게 가족이고 그런 거리감이 느껴지는 장치같았거든요 *^^*

그레이스 2021-05-14 22:17   좋아요 3 | URL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겠군요.
그러네요.

scott 2021-05-14 23:47   좋아요 2 | URL

저도 이름이 아닌 성까지 언급되어서 독자들이 읽을때 가족 구성원 끼리도 서로 다른 개인 이라고 느꼈네요
드라마, 미니 시리즈로 만들어지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