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Netflix)에 있는 쿠바 리브레 스토리(Cuba Libre Story)’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평소에 쿠바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로썬 참으로 반가운 다큐멘터리였고, 바쁜 와중에도 이 다큐멘터리를 챙겨봤다. 다큐멘터리는 쿠바 역사의 시작부터 오바마 정부 시기까지의 쿠바 역사를 다뤘고, 8부작으로 구성됐다. 8부작 안에는 수백 년간의 스페인 식민지 지배와 수십 년간의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쿠바의 역동적인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식민지 지배에 맞서 자유와 독립 행복을 찾아나서는 쿠바의 역사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매우 가까이 있는 쿠바는 수백 년간의 스페인 식민지 지배와 50~60년간의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다. 1492년 인도와 향신료를 찾기 위해 쿠바를 방문한 콜럼버스는 그 지역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게 바로 수백 년간 이어질 스페인 지배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1898년에 일어난 미서전쟁(American Spanish War)은 사실상 미국과 스페인 이 두 제국주의 국가 간에 일어난 식민지 쟁탈전이었고, 전쟁의 승자가 된 미국은 쿠바에게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이 부여한 독립은 또 다른 식민지배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기업들은 쿠바를 경제적으로 잠식해 나갔고, 쿠바를 사실상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는 냉전시기에도 계속됐다. 그러던 1959년 이런 미국의 지배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이었다. 이들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대략 3년간 쿠바의 정글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여왔고, 1959년 수도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써 혁명을 성공시켰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정권을 잡게 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에 있는 미국 기업과 마피아들의 생산수단을 국유화 하여, 쿠바 인민들을 위한 여러 조치를 실행했다. 당연히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정권의 이런 조치에 경제제재를 걸었고, 쿠바와의 수교를 끊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수십 년간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다큐멘터리는 쿠바의 총체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쿠바 망명자와 같은 우익 성향의 인물들을 인터뷰하기도 했지만, 쿠바 혁명에 참가했던 혁명 세대들까지 인터뷰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어떤 면에선 우익적인 시각을 강조하기도 한다. 예를들면 쿠바의 카스트로가 우상화를 했다던 지 혹은 독재와 사치를 부렸다는 얘기를 강조하는데, 솔직히 사치나 호화스러운 생활 문제라면 쿠바 위에 있는 나라 미국 정치인들이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들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시각은 필자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줬다.

 

이런 약간의 오류 내지는 우익적 관점을 배제하면 이 다큐멘터리는 정말 잘만든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문제가 있지만, 쿠바의 무상의료나 그외의 사회주의적 성과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다큐멘터리는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의 보루로서 서 있다는 사실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쿠바 혁명에 참가하거나 쿠바를 지켜왔던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쿠바 사회주의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다큐멘터리를 대체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1959년 쿠바 혁명 성공은 미국에게 있어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혁명 이전의 바티스타 정권은 말 그대로 이승만이나 응오딘지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마르코스, 수하르토처럼 미국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미국에게 있어 쿠바는 자신들을 가장 잘 따르는 구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혁명이 성공하면서 모든게 바꼈다. 더 이상 쿠바는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복종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적인 변화를 통해 이에 저항했다. 그러자 미국은 혁명정권이 된 쿠바를 전복시키고자 여러가지 교활한 수법을 사용한다.

 

1961년 미국의 존F케네디 정권은 1500명으로 구성된 쿠바 망명자들을 상륙시켜 침공을 가했다. 이게 바로 피그스만 침공이었다. 피그스만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피그스만 침공 이후 미국은 쿠바 정권을 군사적으로 전복시키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바탕으로 한 쿠바 상륙훈련을 전개했다. 즉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미국은 군사적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결국 쿠바에게 있어 선택지는 하나였다. 당시 미국과 체제 경쟁중이던 소련과의 관계를 넓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으로 부터 대규모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받았고, 1962년에는 미국 영토 코앞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사실 소련과 쿠바가 미국 앞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것은 미국이 소련 국경 근처인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여 수도 모스크바까지 날릴 수 있는 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련도 쿠바에 핵미사일을 설치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빚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소련이 미국에게 굴복하게 됨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사실 카스트로는 소련과 미국이 자기들끼리 협의한 것에 매우 분노했지만, 소련의 흐루쇼프가 그를 달래는데 각고한 노력을 했다. 그는 카스트로를 소련에 초대하여 전국적으로 돌아다니게 했고, 소련에서 최고 훈장이기도 한 레닌 훈장을 수여함과 동시에 영웅으로서 아주 극진한 대접을 해줬다. 뿐만 아니라 쿠바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도 늘려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의 한 보루로서 설 수 있게 도왔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미국의 탄압과 억압속에서도 사회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바도 1991년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경제난이 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의 사회주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버텨냈다. 또한 쿠바는 국제주의 원리에 따라 의사들을 보내 여러나라와 협력하고 그들을 지원했다. 대표적으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 대한 지원이 그러했다. 1970년대 쿠바는 앙골라 내전에 개입하여 혁명세력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 쿠바 리브레 스토리를 통해 이런 역사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쿠바 혁명 참전용사의 한 인터뷰가 생각이 난다. 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과거에도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나는 그것이 정의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설 것이고, 제국주의 압제에 맞설 것입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인 발언이다. 이 발언에서 쿠바 인민들 대다수가 가난한 인민들과 약자의 편에 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유와 독립 그리고 행복을 찾아나서는 쿠바의 역동적인 역사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켜 그런 사회주의적 가치를 지켜온 피델 카스트로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필자는 그렇게 살다가 2016년에 생을 마감한 그를 매우 존경한다.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정서가 강한 한국에는 쿠바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대다수 한국인이 생각하는 쿠바의 이미지란 낙후 내지는 가난일 것이다. 그러나 쿠바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뤄내지 못한 가치와 인권을 이룩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쿠바의 차이다. 쿠바의 역동적인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이 다큐멘터리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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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
아담 맥케이 감독, 크리스찬 베일 외 출연 / 인조인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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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를 조종한 최고 권력자

지난번 거의없다 유튜버가 만든 4.15 투표 독려 영상을 봤다. 거의없다의 영상에는 아주 흥미로운 영화 한편이 소개되었고, 그는 그 영화를 감상하기를 적극 추천했다. 그 영화가 바로 아들 부시 시절 부통령(Vice President)를 지낸 ‘딕 체니(Dick Cheney)‘의 인생을 블랙코미디로 접근한 영화 바이스(Vice)다.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는 아들 부시가 대통령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점했던 인물로 소위 네오콘 세력을 이끈 인물이었다. 딕 체니와 아들 부시의 관계는 한국의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와 비슷하다. 아들 부시는 딕 체니에게 의존했던 인물이다. 2001년 오사마 빈라덴이 9.11테러를 주도했을때, 그 충격과 혼란속에서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획했다. 그래도 중동과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가 미국인들에게 사라지지 않자, 그들은 희생양을 찾기시작했다. 희생양이 된 나라가 바로 이라크다.

이들 또한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터무니 없는 정보조작과 정치선동을 통하여 2003년 이라크를 침략했다. 이라크 전쟁 개전 초기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하고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는 과정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침략전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포장됐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서 얻은 것은 없었다. 개전 초기의 전황과는 달리 이라크 전쟁은 역으로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이들이 게릴라전으로 나서면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또한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들었던 신무기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 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딕 체니는 자신이 CEO로 있던 석유회사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라크 침공 과정에서 미국은 최소 60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을 학살했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알 수 없는 증오를 가졌던 미군은 포로 수용소에서 이라크군 포로에게 기행적인 고문과 폭행을 저지른은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러한 고문행위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금지된 행위였지만, 민주주의와 테러리즘 박멸이라는 명분아래 일방적으로 허용됐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딕 체니가 보인 모습은 반성없는 철면피였다. 그는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피로 기업 이윤을 창출했음에도 반성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이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진실이 탄로났음에도 여전히 구차한 변명으로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영화 바이스는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킨 인물이자 미국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는 딕 체니의 인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과거 그가 CEO회장이었던 도널드 럼즈펠트 밑에서 비서로 있을때,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이 있었다. 그 침공은 럼즈펠트와 공화당 각료에 의해 결정됐다. 그는 닉슨 정부가 베트남 전을 확전하는 것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럼즈펠트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고 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럼즈펠트는 이에 낄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영화에 나온 딕 체니가 얘기하듯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부와 권력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려 했던 관료들이었고,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할 뿐이다. 결국 그런 그들의 행동과 욕심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제국주의적 전쟁범죄를 양산해 냈고, 중동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성하지 않았고, 하지 않고 있다.

주인공 딕 체니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거라고 하며 적반하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국민들이 자신을 지도자로 뽑았고, 난 국민의 부름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한다. 그렇기에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다가선다.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가 보여주듯이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안다. 어리석은 선택은 결과가 무엇인지 말이다!

오랜만에 정말 의미심장한 영화 한편을 봤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길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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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2024-02-05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라크 침략 전, 미국은 이라크에 경제 제재를 가해 200만 명의 이라크인들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중 50만 명이 5살 미만의 어린이들이었죠.
 

미국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United States already expected the Japanese Attack in Pearl Harbor)?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일본때문이었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중립국(Neutral)‘을 표방했었다.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 9월부터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1941년 12월까지 미국은 총 27월이라는 기간동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그과정에서 대다수의 유럽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때도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을 정도인데, 이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했다는 반증이다.

물론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부터 연합국들(특히 영국)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나치독일의 유보트(U-Boat)가 이에 훼방을 놓기도 했다. 유보트의 어뢰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들이 침몰당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선전포고는 있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험에 있었다.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했던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만 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결국 100만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확보한 미국은 러시아 혁명 이후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한 독일 제국의 군대의 공세를 무찌를 수 있었고, 1918년 11월 독일측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시각은 어떤면에선 전쟁 참전을 회피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지만, 국제 정세는 또다른 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전세계는 전운에 휩싸였고,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국을 표방했지만,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진주만 기습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을 발표했다. ‘전쟁 참가법’은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됐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날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선포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역사적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 진주만 기습 공격이 사실은 ˝미국이 알고서 계획한 것˝이라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나오기도 했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을 미국측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두번째,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세번째,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이와같은 시각이 등장한건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는데, 이 시기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미소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어서, 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역사관은 그 시기 철저히 매장당했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다른 미국인 학자들이 이어받기도 했는데, 1970년대 ‘일본 제국 패망사(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의 저자인 존 톨랜드(John Tolland)가 그러했다. 이후에도 이런 수정주의적 주장들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수정주의적 논란을 확실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즉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은 한편으로 우리에게 큰 논란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일본 제국 패망사를 쓴 존 톨랜드의 주장을 보면, 태평양 전쟁을 백인 대 아시아인의 구도로 보았는데, 그런 구도에 증거하여 ˝미국이 일본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발상도 있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일본 제국의 위험성을 간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조셉 그루(Joseph Grew)‘라는 인물이 루스벨트에게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번 알렸다. 또한 11월 25일 미국의 최후통첩을 일본에 보내기 하루 전날, 루스벨트는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공격이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까지 했다. 이날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백악관에서 헐, 녹스, 마셜 육군 참모총장, 스타크 해군 작전부장 등과 회합을 가진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큰 피해가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할(maneuver) 것인가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생각해볼때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유도했을거라는 주장이 그저 빈말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국의 의도하고 안하고를 떠나 진주만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미국은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한테 밀렸다. 필리핀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필리핀을 등지고 호주로 도망쳤고, 괌과 웨이크 같은 미국측 섬들과 심지어 알래스카령 섬들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거침없이 이어져 버마와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까지 접수했다. 이것은 영국 미국, 중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했던 ‘ABCD 포위망‘의 일시적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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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도모르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라는 것이다. 즉 1932년에서 1933년에 발생한 기근에는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겠다는 스탈린의 의도적인 목표가 있었고, 또 그의 명령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붉은 기근(Red Famine 1932~1933)‘의 저자 애플 봄도 자신의 책에서 홀로도모르를 볼셰비키 정권의 태생적 잔인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려 했다는 사료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

또한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지만, 기근이 일어났을때 곡물 징발은 됐어도 목표치를 보다 더 낮게 잡는 완화된 초치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홀로도모르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고 본다. 

첫번째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기후가 최악이 었다는 점이다. 그 시기의 기상기록을 보면 날씨가 좋지 않은 날들이 많았고, 지금보다 농업기술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두번째는 소위 우익들이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농민 학살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사용해가며 비판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소작농 입장에서 보면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소위 쿨락(Kulak)이라 불리는 부농은 땅을 일반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고 있던 계급으로 볼셰비키에 저항하려 했다. 쉽게 말해 해방 후 월남한 서북청년단과 같은 부류라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이 소작농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싫어 소유하고 있던 농촌의 곡식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했다. 결국 부농들의 비협조 또한 기근의 영향이 분명 있었다. 따라서 경작할 토지가 없는 소작농들 입장에선 이들에 맞선 계급투쟁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남부러시아 그외의 스탄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국가들에서도 기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물론 기근의 심각도에 있어서 우크라이나가 심각하긴 했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에서의 기근을 가지고 학살이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종합적인 결론은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무엇보다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혼내주기 위해 스탈린이 조장했다는 얘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소리다. 기근 도중에 곡물 징발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볼셰비키가 정책을 잘못잡았다는 주장은 할 수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학살이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기근에서의 아사자 수치가 서방에 의해 지극히 과장되었다는 것도 무시해선 안된다. 대숙청을 지극히 과장했던 로버트 콘퀘스트는 1980년대 자신이 쓴 책에서 기근으로 1500만이 죽었다고 했는데, 이게 니얼 퍼거슨이나 다른 우익학자들 구미에 맞아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수준이다. 전원책이 쓴 ‘자유의 적‘들에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런 과장된 학설들은 1990년대 소련 문서가 개방되면서 수정주의적 학자들에 의해 반박당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600만 아사라는 숫자단위의 제1차 출처가 1930년대 나치의 괴벨스 연설에서 사용됐다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나치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했던 집단이었고, 소련에 대한 악마화를 했었던 집단이다. 나치가 제시한 자료는 반소정책이 강하던 미국이나 영국의 구미에도 맞아 1930년대 영국이나 미국의 신문사에서도 괴벨스 연설 자료가 그대로 인용됐다. 즉 충분히 아사자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스탈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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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모아 - [할인행사]
테리 조지 감독, 에이미 메디건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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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고 이 리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개봉하던 1998년 베트남 전쟁 관련한 한 영화가 개봉했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초 남베트남에서 미군사고문단을 지냈던 존 폴 밴(John Paul Vann)’이라는 인물의 일생을 영화화 한 것으로 종군기자 닐 시핸(Neil Sheehan)’이 쓴 밝게 빛나는 거짓말(A Bright Shinning Lie)’라는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바로 크레모아(A Bright Shinning Lie 1998)’. 왜 국내에선 영화 이름이 크레모아로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레티비에 있길래 한번 감상했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인 존 폴 밴(John Paul Vann)’의 장례식부터 시작한다. 장례식에서 존 폴 밴에 대해 설명하는 나레이션이 나오더니 냉전 초기 전 세계적으로 있었던 사건(마릴린 먼로나 인공위성 발사,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유리 가가린의 모스크바 방문, 무하마드 알리 등)들이 영상속에서 흘러나오며, 미군 장교들과 건배를 나누는 주인공의 모습부터 시작한다. 거기서 외치는 밴의 대사는 여러분 서베를린으로, 내년에는 모스크바로라는 대사를 외친다. 이 대사에서 밴은 미국의 가치를 믿는 미국주의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베트남에 군사고문단으로 배치된 밴은 남베트남군과 함께 여러 군사작전을 전개해 나간다. 그는 부패한 남베트남군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전략전술을 구사하도록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하지만, 워낙 부정부패가 심각한 남베트남군은 밴의 충고와 조언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나 1963년 밴이 비행기를 탄 채로 작전을 지휘했던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의 무능한 모습은 여실히 드러난다. 최신식 전투헬기와 수송헬기 15대와 APC 장갑 차량 10대 그리고 수천 명의 병사를 동원한 남베트남측 동원된 전투에서 무기나 화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200~300명의 베트콩에게 아주 처참하게 패배하는데, 여기서 문제의식을 느낀 밴은 농민들이 왜 베트콩을 지원하는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밴은 남베트남군의 무능과 부패를 본국에 폭로하고자 했지만, 남베트남에서 비밀스런 작전을 전개하던 밴의 군 사령관은 그를 다시 본국으로 보낸다. 그것과는 별개로 밴은 미국에 아내와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베트남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바람을 일삼는다. 귀국한 이후 그의 바람행위에 와이프는 질타하고 경고하지만, 그의 바람기는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있었고, 결국 남베트남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임신시키고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며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해어지기까지 한다. 그의 과거는 참으로 처참했다. 밴의 어머니는 매춘부였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살아왔다. 결국 이런 배경이 그의 바람행위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본국으로 귀국한 밴은 미군 지휘부 인사들에게 자신이 찾게 된 미국과 남베트남군의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가 보기에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같은 인물들은 농민들에게 정당한 토지를 분배하기로 약속한 인물들이었고,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있어 베트콩은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베트콩이 농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정강정책을 내세우고 있고, 반면 이점에서 아무런 도움이 없는 미국이나 남베트남측은 지지를 얻지 못한 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파악했다. 또한 그는 미국이 생각하는 데로 베트남 전쟁이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를 자신이 아는 기자에게 폭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에 대한 사실적인 분석과는 달리 미국입장을 대변하는 결론을 지었다. 그는 이들의 지지를 베트콩이 아닌 미국과 그의 동맹 측으로 바꿔 전세를 역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 중반 그는 베트남에서 민간 선무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인물이 되는데, 여기서 자신의 베트남 비젼을 마을에 실현시키고자 했다. 거기서 그는 낡은 마을과 학교에 있는 나이든 여교사와 초등학생 아이들을 위해, 낡은 건물을 고쳐주고 사탕과 물자를 공급해준다. 하지만 이런 밴의 행동은 그 지역을 담당하던 남베트남군 지휘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부패한 남베트남군 장교는 그 지역을 베트콩 출몰지역으로 규정한 뒤 마을을 네이팜 폭탄으로 폭격해버린다. 결국 그 폭격으로 마을은 파괴되고, 애꿎은 민간인들이 죽게되며 밴이 지원했던 초등학교의 학생들 또한 폭격으로 죽게 된다.

 

이후 밴은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한 늙은 베트콩 여성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보니 그 여성은 과거 밴이 지원했던 학교의 교사였다. 이걸 목격한 밴의 동료는 우리가 애꿎은 민간인들을 베트콩으로 만들고 있어. 저 여자는 그 일만 아니었으면 베트콩이 되지 않았을 거야라고 하며, 베트남을 떠난다. 1968년 구정공세가 시작되는 당시에도 베트남에 남에 군생활을 계속한 밴은 군에서 높은 직종을 맞게 되고, 본국에서 반전시위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전투에 임한다. 결국 존 폴 밴은 1972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콘툼 성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존 폴 밴의 행동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상당히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동맹군인 남베트남이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오히려 이에 맞서는 베트콩은 일본과 프랑스에 싸웠던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영화 초반에 야 그 국(Gook, 동양인 비하 단어다.)들이 프랑스을 무찔렀어라고 한다. 그는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이 소수의 베트콩에게 참패하는 것을 지켜봤고, 베트남 전쟁 승리 대안으로 농민지지 획득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도와줬던 한 여교사가 남베트남군이 저지른 학살행위를 보고 베트콩이 된 것을 봤다. 하지만 그는 절대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 숭리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왜 밴이라는 인물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면서도 미국편에 서서 싸웠던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존 폴 밴이 가지고 있던 미국주의라는 사상에 있다고 본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전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그는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구심점으로서 필요하다면 미국이 개입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작중 초반에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남베트남측의 보도가 나오는데, 그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다는 보도를 듣고 아주 열광한다. 글 초반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농담으로 내년에는 모스크바에서라는 구호를 건배구호로 사용했다. 이는 마치 영화 공작에서 흑금성을 보내는 조진웅이 탱크밀고 평양까지 가야지라는 구호를 연상시키기 까지 한다. 즉 밴의 이데올로기에는 기본적으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한 미국주의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밴이라는 인물의 치명적인 한계와 실책이 아주 명확히 보였다. 심지어 그는 대니얼 엘즈버그가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것을 들었음에도 자신과 친한 기자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결국은 최악의 실수인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서 그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이게 바로 반공과 미국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한계다. 영화 크레모아는 존 폴 밴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이 저지른 베트남 전쟁의 실책을 꽤나 잘 파악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주의를 향한 존 폴 밴의 투지에 감명 받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존 폴 밴은 미국입장에서 보면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영화 크레모아는 미국주의자의 치부를 파악하기 매우 좋은 영화였던 것 같다. 결국 그러한 잘못된 믿음과 신념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냉전 최악의 대학살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깨달아야 하는 교훈은 반공주의와 미국 우월주의의 한계와 치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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