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United States already expected the Japanese Attack in Pearl Harbor)?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일본때문이었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중립국(Neutral)‘을 표방했었다.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 9월부터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1941년 12월까지 미국은 총 27월이라는 기간동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그과정에서 대다수의 유럽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때도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을 정도인데, 이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했다는 반증이다.

물론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부터 연합국들(특히 영국)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나치독일의 유보트(U-Boat)가 이에 훼방을 놓기도 했다. 유보트의 어뢰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들이 침몰당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선전포고는 있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험에 있었다.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했던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만 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결국 100만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확보한 미국은 러시아 혁명 이후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한 독일 제국의 군대의 공세를 무찌를 수 있었고, 1918년 11월 독일측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시각은 어떤면에선 전쟁 참전을 회피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지만, 국제 정세는 또다른 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전세계는 전운에 휩싸였고,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국을 표방했지만,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진주만 기습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을 발표했다. ‘전쟁 참가법’은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됐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날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선포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역사적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 진주만 기습 공격이 사실은 ˝미국이 알고서 계획한 것˝이라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나오기도 했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을 미국측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두번째,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세번째,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이와같은 시각이 등장한건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는데, 이 시기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미소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어서, 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역사관은 그 시기 철저히 매장당했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다른 미국인 학자들이 이어받기도 했는데, 1970년대 ‘일본 제국 패망사(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의 저자인 존 톨랜드(John Tolland)가 그러했다. 이후에도 이런 수정주의적 주장들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수정주의적 논란을 확실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즉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은 한편으로 우리에게 큰 논란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일본 제국 패망사를 쓴 존 톨랜드의 주장을 보면, 태평양 전쟁을 백인 대 아시아인의 구도로 보았는데, 그런 구도에 증거하여 ˝미국이 일본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발상도 있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일본 제국의 위험성을 간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조셉 그루(Joseph Grew)‘라는 인물이 루스벨트에게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번 알렸다. 또한 11월 25일 미국의 최후통첩을 일본에 보내기 하루 전날, 루스벨트는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공격이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까지 했다. 이날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백악관에서 헐, 녹스, 마셜 육군 참모총장, 스타크 해군 작전부장 등과 회합을 가진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큰 피해가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할(maneuver) 것인가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생각해볼때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유도했을거라는 주장이 그저 빈말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국의 의도하고 안하고를 떠나 진주만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미국은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한테 밀렸다. 필리핀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필리핀을 등지고 호주로 도망쳤고, 괌과 웨이크 같은 미국측 섬들과 심지어 알래스카령 섬들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거침없이 이어져 버마와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까지 접수했다. 이것은 영국 미국, 중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했던 ‘ABCD 포위망‘의 일시적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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