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당시 3국의 상황이 그려진 만평


1853년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을 했던 일본은 서방으로부터 굴욕을 당했던 시점으로부터 50년 뒤인 1904년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전쟁을 하게 됐다그 전쟁은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과의 전쟁이었고그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이었다지난번 청일전쟁 편에서 다룬 바와 같이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된 대가로 삼국간섭을 받았다특히나 1895년 민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은 강해졌다. 1898년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요동 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했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아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청일전쟁의 결과일본은 한반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대만과 팽호제도를 영유하게 됐다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불과 10년 만에 최소 2배 이상의 육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전함의 숫자도 늘었다. 1896년부터는 103척의 함정을 건조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고종황제, 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아관파천하여 러시아의 조선 영향권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1897년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러시아 제국은 조선으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벌목권 등 많은 이권을 따냈고조선에 군사·재정 고문단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등극했을 때도 계속됐다만주에서도 북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와 남만지선의 부설권을 따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이른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동청철도와 남만지선도가 많이 파괴되었는데러시아 제국은 철도보호를 구실로 만주에 출병하여 아예 만주지역을 점령해버렸다.

(영일동맹을 상징하는 포스터)

 

러시아 제국의 만주 주둔은 다른 열강들의 비판을 받았다제국주의 국가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껴 1902년 1월 30일 수도 런던에서 이른바 영일동맹을 체결했다이 영일동맹은 유사시 군사적 개입을 명문화하고일본이 조선에 대해 특별한 수준의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인정했다즉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영일동맹 이후 이에 압력을 받은 러시아는 1902년 4월 단계적인 만주 철군을 약속했다그러나 일부만 철수하는 데 그쳤다.

 

1903년 7월 일본의 제의로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권을 가르려는 러일교섭이 시작됐다그러나 두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이 맞물려서 합의에는 실패했다양국협상이 결국 결렬되면서 전운의 기운이 돌게 됐다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낙관하지는 못했다그러나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면 승리의 가능성이 더 희박해진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따라서 1903년 말 일본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했다양국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돌자 러시아는 자국 내부에 있는 혁명의 기운을 전쟁으로 끄고자했다.

(러일전쟁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1904년 2월 일본의 함대가 러시아의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일어났다전쟁 전에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패배하고 결국 러시아가 승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일본이 중국에 대해 승리했지만그것은 쇠망하던 국가에 대한 승리에 불과하고 감히 서구강국에 대항하여까지 이길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개전 초부터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면서 바다와 육지양쪽에서 러시아군을 계속 밀어붙였다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해온 일본군을 맹비난했다일본에 대한 맹비난을 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전쟁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203 고지 관련 영화, 대략 1만 명이 전사했던 이 고지쟁탈전은 이후 일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04년 5월 일본군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요양·사하·봉천 등의 전장에서 대병력의 참호전을 치렀다이 과정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급증했다봉천에서만 러시아군 10만 명과 일본군 7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병사들은 땅에 바짝 엎드려서 전진해야 하고막대한 화력이 쏟아 부어지는 가운데 장시간 전투하다 보니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04년 8월부터 1905년 1월까지 전개된 여순 공방전 중 일보인 203고지 쟁탈전의 경우 이곳에서만 최소 1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즉 203고지 전체가 시체로 산이 형성된 것이다이것은 일본군이 지속적으로 돌격전술에 의존했던 것도 있었다어쨌든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157일 간의 포위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시켰다.

(발틱함대)


(대마도에서 일본 군함에게 격침당하는 발틱함대)

 

사실 육지에서의 전투는 것만 보기엔 일본이 이긴 것 같았지만일본은 지쳐가고 있었다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해전이었다러시아 제국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휘하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러일전쟁에 투입시켰다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발틱함대는 말 그대로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러시아 중간에 있는 발트해에 있었다. 19세기 당시 이집트에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어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해로로 더 가까이 연결되었다그러나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따라서 러시아 발틱 함대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으로 향했고, 1905년 5월 27일 대마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함대에게 격파 당했다이로써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발틱함대 이동경로, 발틱 함대는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에 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명실상부 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거듭났다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치러야할 일본의 경제적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미국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의 강화회담을 시작했고, 9월 5일에는 강화조약에 조인했다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인받았고여순과 대련을 이양 받았으며만주철도와 그 부속지의 양도 및 수비 병력 주둔권도 승인받았다또한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의 절반도 얻었다아무튼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강대국으로 급부상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할린, 러시아 령이었던 사할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그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뒤 다시 러시아(소련)이 접수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시아에선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발포를 명령했고, 그 결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앞에서는 학살극이 벌어졌다.)

 

반면에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경우 체면적인 부분에서 많은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국가적으로도 위태로워졌다. 1905년 러일전쟁 기간에 이른바 러시아 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1905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난 이유 중에는 러일전쟁으로 인한 경제상황 악화도 한몫했었다물론 이 혁명은 니콜라이 2세가 군대의 발포를 명령하면서 대학살극으로 끝을 맺었다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쇠약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고자 했는데조선의 식민지화가 바로 그 시작점이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amGiKim 2020-11-18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따라 제 글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는것 같습니다. 다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