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

(보도연맹 학살,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전쟁범죄였다.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대다수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단독정부가 탄생하는 방향으로 가면서 남한내에선 이에 맞서는 저항이 끊이질 않았다지난번 친일의 힘을 빌리다편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좌우갈등이 극심해지면서그 구도는 친일세력 대 독립운동 세력이라는 모순적인 구조가 생기고독립운동 세력이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려 탄압당하는 상황이 됐다여기에 더해 김두한을 두목으로 하는 대한민청이나 월남한 친일지주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깡패 조직은 온갖 노동자 파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해방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은 대구에서 일어났다. 1946년 9월부터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의 주도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이 한반도 이남에서 시작되었다이 파업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미군정의 극심한 좌익탄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9월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 철도종업원 1만 명이 쌀배금임금인상해고반대노동운동자유민주인사 석방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국적인 시위는 본격화됐다.

(대구 10.1 항쟁,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의 무능과 폭정에 맞서 민중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폭력적이었고, 잔혹했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이쉬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시위는 12월까지 전개되었는데이 과정에서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전국적으로 사망하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이때 당시 사망한 주도급 인사 중 한명은 이후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구에서의 항쟁이 우익들과 미군정의 진압으로 끝난 뒤, 1948년 4월엔 제주도에서 대학살극의 신호탄을 알리는 일이 발생했다바로 제주 4.3 항쟁이다제주도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가 친일경찰을 이용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었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친일 경찰에 의한 발포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차올랐고, 48년 이승만 정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단행하려 하자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민들의 요구는 무시하면서 군정경찰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을 파견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당시 이승만과 같은 편이었던 경찰총장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제주 4.3 항쟁 당시 체포된 민간인)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과 우익단체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입에 담기 힘들정도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이들의 무차별 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의 대다수는 민간인들이었고여성 노인 아이 그리고 유아도 포함되어 있었다제주 4.3 항쟁은 1954년까지 이어졌고 대부분의 사망자는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1948년 11월부터 1949년사이에 나왔다대략 3만 명에서 4만 5000명의 제주도민이 학살이 피해자가 됐고이중 80% 이상은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제주 4.3 항쟁 당시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그는 이 대학살극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선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그는 1948년 7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그 계엄령 조치로 인해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여순민중 항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제주도에서 광란의 학살극이 벌어질 무렵 전라도의 여수와 순천에선 이승만을 놀라게 할 또다른 일이 일어났다이게 바로 여순민중항쟁이다. 194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에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당시 한국군에는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존재했었다이들은 좌익활동을 하다가 체포를 피하기 위해 군에 위장입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제주도에 가서 같은 동포를 진압하기를 원치 않았던 제14연대 군인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이들은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구성하여 저항에 나섰다더 나아가 이들은 친일군경과 지주들을 재판에 세우고 농민들에게 혁명적 대의에 합류해줄 것을 주장했다.

(학살자 김종원,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장교출신으로 잔혹성이 이루 해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여순항쟁 당시 진압군으로써 체포된 민간인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 즉 살인을 즐겼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도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훌륭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여수와 순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진압군을 보냈다여순 봉기를 진압하러간 군대는 이를 아주 잔혹하게 진압했다당시 이승만이 파견한 군대는 과거 친일경력이 있는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로서 잔혹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당시 진압군으로 파견된 이승만의 심복 김종원은 민간인들을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그는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은 민간인들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일본도로 베는게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쏴서 민간인을 하나 둘씩 죽였다김종원은 이후 한국전쟁에서도 수많은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대통령 이승만은 그에 대해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라고 할 정도로 아꼈다여순항쟁을 진압하고자 출동한 군대는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을 통해 봉기를 일으킨 측을 진압했고결국 봉기는 진압됐다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우익측의 강경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의 참혹한 양민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이 일어나면서 극에 달했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도망치기 바빴다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자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른바 거짓방송을 해놓고 도망쳤다그는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파된 한강다리)

 

서울시민 여러분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거짓방송이었다당시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었는데함락되기 전 이승만은 이런 거짓방송을 해놓고 몇몇 정부 관료들과 도망쳤던 것이다이것도 모자라 인민군의 T-34 탱크의 진격을 막는다는 전제하에 이승만 정부는 피난가는 사람들의 길마저 막아버렸다한국군은 인민군의 T-34 탱크를 막는다는 명분을 들어 한강에 있던 모든 다리들을 폭파시켜 버렸다그바람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이승만 정부는 전쟁 초기에 아주 잔인한 전쟁범죄를 계획적으로 저질렀는데그게 바로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다.

 

국민보도연맹이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가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하지만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하게 되었고, 10대인 중·고교생이 가입할 정도로 가입절차가 매우 간단했다쉽게 말해 사상적 전향보단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들이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됐다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고 집단학살했다.

(체포당한 보도연맹원, 이승만 정부의 보도연맹 학살로 전쟁 초기 수십만이 학살당했다.)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전쟁 초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극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났다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년 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그 외에도 진해통영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광산 코발트 학살 현장, 이 학살의 현장은 이승만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광란의 학살극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장소다.)

 

이중에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은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가장 악질적인 전쟁범죄였다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짓까지 했다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초기 2~3개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전역에서 최소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국민보도연맹 학살을 포함하여 한국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학살의 희생자는 많게는 100~12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부터 엄마의 젓을 빨다 검거되어 같이 총살당한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다이승만은 한국전쟁에서 이런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이런 학살극은 반공 혹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하에 은폐되고 미화됐다.

 

한국전쟁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이승만은 뻔뻔했다그는 전세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부산에 있던 시기 조봉암 장택상 등의 의원이 국민에게 사과해야한다는 말을 했을 때자신은 지은 죄가 없다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한국전쟁은 미군이 UN군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며 국제적인 전쟁의 양상을 띄었다미국은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영국캐나다프랑스네덜란드호주뉴질랜드 등의 나라를 끌어들였고, UN군의 지원을 받는 한국군은 미군과 더불어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낙동강 전선에 있든 연합국이 반격을 시작하자 그해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서 학살당한 민간인)

 

이승만 정부는 여기서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전쟁 초기 서울을 버리고 떠났던 이승만은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 부역자 색출을 목적으로 또 다시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이러한 무차별 보복 및 학살은 곳곳에서 일어났고여기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또한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숨은 빨치산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여순민중항쟁에서 그랬듯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1951년 공식적으로 700명 이상을 학살했던 거창양민학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도 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저지른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었고이승만 정부의 반공주의의 폭력성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자국민 9만에서 10만을 아사시킨 이 사건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방산비리였다.)

 

더 나아가 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희대의 방산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그게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이다한국전쟁으로 기존에 없던 자원과 기반마저 파괴되면서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그러나 그런 고통속에서도 정부관리들과 군부는 엄청난 부정부패를 자행했다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다시 인민군 측으로 기울어지던 1950년 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켰다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선이 다시 밀리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서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착복했고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자국군인이 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방위군 사건 주모자의 처형, 부패한 이들은 결국 처형당했다.)

 

이들이 착복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결국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서고 1951년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됐으며사건을 일으킨 김윤근 등 4명은 사형해 처해졌다국회조사단이 진상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책정된 예산 209억 원 중 실제 집행한 액수는 130억뿐이었고, 740만 명 정도의 유령병력을 조직하여 23억 5천만 원의 현금과 5만 2천여 섬의 식량을 부정유출했으며그 밖에 귀향 장병의 귀향경비의약품부식비 등이 부정처분되었다김윤근과 같이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적으로 모은 돈을 기생집에 가서 뿌리며 놀기까지 했다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방산비리로 인하여 대략 9만 명의 군인이 아사했다.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이승만, 이승만에게 있어 북진이란 자신의 정치생명과도 같은 구호였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까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도했고 저질렀다더 나아가 방산비리로 자국군인 9만 명을 아사시키기도 했다그는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렸음에도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쳤으며도망치지 못한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두 번 죽이는 일까지 했다이처럼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광란의 학살극을 주도하였으며반공 내지는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로 그 모든 광란극을 합리화했다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정권에서 물러나기 전 까지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라는 정복주의적 통일비젼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이 정복주의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통일비젼은 오히려 전쟁을 끝내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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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군바리 조지 패튼의 생애

한국의 중년 세대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을 뽑으라고 하면,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사막의 쥐 버나드 몽고메리,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휘관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더글라스 맥아더일 것이다. 그 중에 또 한 사람이 빠지지 않는데, 그가 바로 미군 전차부대를 지휘했던 조지 스미스 패튼(George Smith Patton)일 것이다.

한국 중년들이 패튼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1970년대 텔레비전에서 미국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Patton)‘을 방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패튼은 1885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그 또한 더글라스 맥아더의 집안처럼 군인집안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유명한 장군이었으며 압버지도 군인이었다.

1904년 6월 패튼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벌어진 미국 멕시코 국경충돌 분쟁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실전 경력을 쌓았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며 패튼 또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는 프랑스에 있는 전차 훈련 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미군 전차 부대를 조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생미엘 전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당시 사단장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와 함께 참가했고, 거기서 활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미군 최초의 전차부대를 맡았고, 미군 최초의 탱크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군복무를 계속했고,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여단장, 사단장 그리고 군단장을 역임했다. 1942년 패튼이 이끄는 전차 부대는 아프리카 모로코에 상륙하여 활약했고, 1943년 카세린 전투등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이 이끈 부대에 맞서 전공을 세운다. 1943년 7월 엔 미군이 시칠리아 상륙작전에서 팔레르모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1944년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6개월 뒤에 벌어진 벌지 전투에 투입됐다. 패튼은 아르덴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막아냈고, 여기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제101 공수사단을 구출해냈다. 벌지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패튼의 군대는 프랑스에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독일 본토 그리고 체코까지 진격했다.

1945년 5월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이났다. 여기서도 만족하지 않았던 패튼은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러나 염원과는 달리 그는 독일 군정 사령관직에 임명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독일에 머물게 된 패튼은 1945년 12월 21일 자동차 사고로 하이델베르그에서 사망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패튼은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독불장군이었다. 그의 고집은 같은 동맹군이던 영국의 몽고메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또한 패튼은 전투 스트레느 증후군을 일으켜 입원한 병사를 ‘겁쟁이‘라고 하며 두들겨 패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문에 장병 전원에게 사과를 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전형적인 미국주의자였다. 그는 전쟁 이후 만나게 돠 소련 장군의 면전에 대놓고 욕을 퍼부으며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며, 나치당 출신 관리를 다시 기용해서 독일 재건에 투입해야한다는 말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자와는 협력하지 않는다며 소련측 사람들에겐 아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패튼의 죽고나서 그의 부하 중 한명은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그가 바로 낙동강 전선의 다른 말인 워커라인의 워커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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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해체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 소련(Soviet Union)은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국가였다. 1917년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1920년대 공업화를 거치며 강국으로 성장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파시즘을 물리쳤으며, 그 이후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와 경쟁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이기에 소련은 당연히 사회주의 국가였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소련은 개인의 이익과 사적영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국가와는 엄연히 다른 체제였으며, 실제로도 다르고자 했다.

 

반공주의적 산물이 사회전체를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경우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도대체 어떠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알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아마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소련이란 스탈린주의적 폭압 체제, 대숙청으로 인한 2천만 명 학살, 한국전쟁의 주범, 굴라그와 같은 강제 노동이 존재하는 세상 그리고 세계를 적화시키려는 호전적인 국가 등의 이미지일 것이다. 즉 소련이라는 나라는 국방력에 지나치게 투자하여 인민들의 삶과 질적향상은 매우 등한시 한 국가로 착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공주의로 점철된 우익과 서방의 날조된 왜곡이 반영되었다. 물론 소련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 재정의 많은 부분을 국방력 강화 및 개발에 투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 미국처럼 공공분야에 있어 많은 부분을 개인에게 맡기고자 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실제로 소련은 헌법과 법률을 통해 사회주의적 권리를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소련이 추구한 권리는 심지어 20세기 말에도 수많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조차 충분하게 실현되고 있지 못한 권리로 여성의 적극적인 경제활동 참여”.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보증”, “근로의 권리”, “주거와 주택의 권리”, “무상의 의료와 교육의 권리”, “사회보장의 권리”, “사회주의 사회가 보장하는 다양한 문화적·예술적인 서비스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권리등이었다. 이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소련 인민이 구가하거나 얻을 수 있었던 권리와 자유였다.

 

실제로 소련은 공업화에 성공했던 1930년대부터 이러한 권리를 비록 양질은 아니더라도 시스템 적으로 설립했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이른바 의료혁명과 교육혁명을 겪었다. 이 덕분에 소련인민들은 그 시기부터 무상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즉 인민 AB가 병에 걸려 치료가 필요하다면, AB는 국가가 운영하는 병원에 가서 병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권리로써 돈을 지불하지 않고 치료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런 무상의료는 단순히 감기치료만이 아닌 고도의 의료기술이 필요한 것에도 해당되었다. 즉 소련은 이러한 무상의료 서비스가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틀이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소련사회는 해체 이전까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다.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고, 약국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지급됐는데. 아이들 의복에 대한 보조,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도 있었다.

 

소련의 교육혁명은 매우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교육은 인민이 차별없이 받아야 할 하나의 권리로써 자리매김하였고, 공업화 초기 교육율과 대학진학률은 매우 빠르게 상승했다. 이에따라 소련 전역에서 문맹퇴치운동이 일어났다. 문맹퇴치운동으로 인하여 90%가 넘던 소련의 문맹률은 1%때로 줄어들었으며, 인민들 대다수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교육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과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70,80년대 기준으로 소련의 교육시스템은 10년간 무상이었다. 대학교를 가더라도 대학 교육도 무상이었고 대학 다니는 동안에 일종의 수당같은 것을 국가로부터 지급 받는데 한 달에 40루블씩 지원받았다. 이 금액이 계산하면 소련 대학의 기숙사 비용이 1년에 24루블 내면 모두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많은 돈을 수당으로 지급받았던 셈이다.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노동시간을 비인간적으로 늘리는 사회가 아니었다. 물론 스탈린 시절 굴라그를 운운하는 반공주의자들의 얘기는 다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30년대 스탈린시기에도 7~8시간 노동제를 공식적으로 표명했었다. 물론 이 노동제는 193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돌면서 폐지됐다. 하지만 이것은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의 과정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련 시절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소련 사회는 노동에 대해 의무이자 권리라는 개념으로서 받아들였다. 소련 시절의 노동시간은 주5일 주40시간이었고. 모성보호도 있어서 임신 여성은 야간 노동이 안되었다.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항상 유급이었다.

 

광산노동 등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퇴직을 좀 더 일찍 할 수 있었으며, 출산휴가도 보장되어 있는데 유급으로 18개월 보장됐고, 출산휴가 끝나면 당연히 원래 하던 일로 복귀가 가능했다. 임금도 노동자, 관리직, 기술직의 구별 없이 비슷하게 지급받았다. 야간, 휴일노동은 강제로 하는 경우가 없고, 하겠냐고 요청 받고 동의해야만 하고, 할 경우에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야간은 50%, 휴일노동은 2배 임금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소련은 대중적인 노동자 연금제도를 설립했다. 연금 수급 연령은 여성 55세 남성 60세였다.

 

소련사회는 어떤 공장에 관리자나 청소노동자나 똑같이 존중 받고, 똑같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형태였다. 큰 회사의 경우 사택 같은 걸 지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는데, 노동자들은 임금의 3~4%를 지불하고 모든 것들을 무료로 이용했다. 중요한 건 회사에 일하는 동안 거주를 할 수 있는 곳이지 주택을 팔거나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회사 안에는 스포츠시설도 있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자체적으로 농장을 운영해서 구내식당 식재료로 공급했다. 즉 소련사회는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삶은 인민들에게 구가해줬고, 공식적으로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초기 경제성장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소련은 1920년대후반부터 50년대까지 사회주의 경제 수치를 매우 낮게 잡으려고 했던 서방의 기준으로도 최소 연 12~14%의 성장률을 보였다. 1928년에서 1956년까지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쏘련의 공업 생산은 연평균 12.7%나 성장하였다. 국민총생산은 연율 15% 이상이나 성장했고, 그 기간 문맹은 일소되었으며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적어도 소련은 1972년까지 연평균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사회에 대해 지적하는 것 중에 한가지를 뽑자면 소비재 부족과 일상적인 필수품의 부재일 것이다. 물론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 비하면 풍요로움에 있어서 많이 뒤쳐졌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2700만 명의 희생과 국부의 약 1/3이 사라졌음에도 빠른 전후복구와 회복을 보였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동맹이었던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부흥을 절대 돕지 않았고, 오히려 지연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서유럽 경제학제들의 예견을 무색케 했고 제4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전후복구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이것은 1953년에서 1954년 사이에 배급제를 폐지했던 자본주의 국가 영국보다 6년 내지는 7년이나 빠른 속도였다. 1951년에서 1955년까지 소련의 연평균 식량 생산량은 8859만 톤이었지만 불과 10년 후인 1961년에서 1965년 동안에는 50%가 증가한 13000만 톤을 달성했다. 같은 시기 육류와 유제품 역시 연평균 60%7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다. 따라서 소련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복구를 하면서 굶주리지 않았다. 공업역시 1951년에서 1965년까지 연평균 10.7% 정도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연평균 농업성장률이 4%를 넘어섰고, 농업분야에서도 자립기반이 확보됐다. 1950년대 후반에는 '화학' 공업이 중점으로 육성되어, 합성물질, 석유화학제품, 화학비료 생산 기업이 대규모로 건설됐으며, 이런 전후복구와 경제 성장을 통해 1960년대 소련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 할 수 있었고, 적어도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은 그럭저럭 경제 문제로 크게 고통 받지 않았다.

 

이처럼 소련의 사회주의는 지난 마지막 위기 역시 극복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계속적인 행군을 보증하기에 충분한, 전례가 없는 눈부신 역사적 성과를 집적했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군사적인 안전보장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로 하여금 여러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했으며 핵무기 보유량을 삭감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사회주의는 경제·산업구조를 발전시켰고, 전 세계 공업생산에서 그 점유율을 1/3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며, 공업과 과학·기술의 많은 분야에서 자본주의를 앞질렀다. 사회주의는 근로인민의 생활수준을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켜 모든 국민에게 무상의 교육과 의료를 보장했고, 문맹과 실업을 근절했으며 고등교육을 받아 숙련기술을 가진 노동자계급을 육성했다.

 

하지만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 사회는 이러한 진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사회주의 국가의 성공적인 업적은 탐욕, 경쟁, 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를 합리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고 말이다. 여기서 로자가 말하는 야만은 바로 자본주의를 뜻한다. 지난 세기 소련해체 이후의 소위 승리했다는 자본주의가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 특히 사유화, 공공 부문의 폐지, 개방적 무역정책의 강요, 정부에 의한 모든 형태의 경제계획의 배제, 모든 형태의 국가 보조금·보상금과 사회적 보호의 폐지 등의 신자유주의적경제정책을 이용하여 3세계국가의 경제를 억지로 개방시켰고, 그려러고 한다. 국제자본과 다국적 기업의 전면적 진출을 위한 길을 닦고 있다. 세계은행이나 IMF와 같은 제국주의 국제기관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이들 정책의 목적은 선진 자본주의 중심부로의 잉여가치의 유입을 강화·촉진하는 데에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러한 정책의 논리적 귀결은 이들 국가의 천연자원 및 인적자원에 대한 수탈의 증대, 그들 국가 경제에서의 자본형성 과정의 봉쇄, 그들의 경제발전고정의 전면적인 정지 내지 심지어 퇴행, 그들의 생활수준의 급격한 저하,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대다수 세계 인민의 빈곤·질병·궁핍·노숙자화의 계속적인 증대다.

 

따라서 이런 야만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해야하는 길은 사회주의라고 필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생각하고 있고, 또 그 가치를 믿고 있다. 사회주의는 실패하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의 해체를 빗대며 단순히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로 단순도식화 하는 부르주아지들의 악랄하고 교묘한 선전선동에 놀아나서는 안된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소련은 비록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지금도 업신여기고 있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믿었고, 실천하고자 했으며 또 어느부분에선 달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소련 사회주의가 가지는 역사적 정치적 인류사적 의미다.

 

참고자료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09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대국굴기, 크레듀, 2007

 

러시아 혁명사 강의, 나무연필, 2017

 

소비에트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레디안, 20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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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미국을 방문한 응오딘지엠)


1963년 11월 2일 새벽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선 일부 군인들이 발사한 총소리와 그들이 운전하는 군용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였고, 대통령과 대통령의 동생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결국 쿠데타군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과 그의 동생은 항복했고, 항복한 그들은 지휘본부로 호송중 총살당했다. 당시 쿠데타 군이 처형한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재자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었다. 응오딘지엠은 한때 미국이 공산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을 들어 내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지원을 받은 내부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왜 응오딘지엠은 암살당한 것일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됐다. 이에 따라 17도선 이북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호치민이 이끄는 정부가 세워졌고, 이남에는 미국이 내세운 정권이 등장했는데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내세웠던 인물은 무능한 황제 바오다이(Bao Dai)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바오다이는 용도가 다 떨어졌고, 여기서 미국이 찾은 인물이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

(남베트남 병사들을 보고 있는 응오딘지엠)


응오딘지엠은 대힌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 Man Rhee)처럼 미국의 구미에 아주 잘 들어맞은 인물이었다. 우선적으로 그는 식민지 시절 20년간 고위 관료로 일했던 경력이 있었고, 망명 초기 벨기에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몇 년간 미국서 살던 인물이었다. 거기다 그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이런 점은 미국 정치인들에게 좋게 비추어졌다. 냉전이 한참이던 당시 미국은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도미노 이론이란 한 나라가 공산화 되면 다른 나라도 덩달아 공산화 된다는 이론으로써, 만일 베트남이 공산주의가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주의가 된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방어벽을 만들기 적합한 곳으로 남베트남을 선택했고, 과거 프랑스가 일정부분 통치하다 물러난 지역에 새로운 민족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은 미국에서 살던 반공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에게 남베트남의 대통령 자리를 앉혀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민중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다. 호치민이 이끌던 북베트남은 정통성에 있어서 항일 항불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찔러 독립을 쟁취했던 업적이 있었다. 그에 반해 디엠 정권의 그렇지 않았다. 새로들어선 남베트남의 군대는 과거 프랑스가 창설한 베트남 괴뢰군에 있던 인물들이 군사에 있어 주요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디엠정권의 내각은 중세시대의 족벌정치를 연상시켰다. 남베트남의 내각은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인물들이 아닌 가톨릭 신자들과 디엠의 일가친척들로 구성됐다. 즉 응오딘지엠이 원하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었다. 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좌관으로, 응오딘 누의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자기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선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응오딘지엠 정권은 토지개혁에도 실패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토지를 할당했고, 민중 대다수가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석가탄신일을 불법화하여 불교도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몇몇 절들을 습격하여 불교도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다. 이것이 결국 민중이 응오딘지엠을 지지하지 않게 된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 남베트남에선 자생적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내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응오딘지엠 정권의 민중탄압은 그 강도가 높아졌다. 그들은 전략촌(Strategic Hamlet)이라 하여, 농민들이 사는 마을에 ‘지역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주민 통제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주민들 보호이기 보단 억압에 가까웠고, 역으로 대다수 농민들이 베트콩을 지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분명히 반민중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정권이었다. 당시 미국은 디엠 정권이 무능과 부정부패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1950년대 후반부터 고문단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규모는 1961년 900명이었지만, 불과 2년 뒤인 1963년에는 1만 6000명까지 증가했다.

(응오딘지엠의 시신)


이렇게 해서 남베트남 안에선 제국주의 모순이 드러났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63년 6월에 있었다. 극심한 불교도 탄압에 맞서 틱광둑(Thich Quang Duc)이라는 한 승려가 수도 사이공에서 몸에 기름을 붙고 소신공양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된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남베트남의 종교 탄압을 아주 정확히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응오딘지엠의 재수인 마담 누(Madame Nhu)는 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신공양한 고승을 ‘바베큐’에 빚대어 얘기하면서 베트남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분노를 샀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남베트남 곳곳에서 승려들이 소신공양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응오딘지엠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도 격렬해졌다. 그 이후에도 응오딘지엠은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여 불교 사원을 습격,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을 체포했으며 사원들 폐쇄시켰으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디엠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디엠은 듣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존F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응오딘지엠을 제거할 계획에 착수했다. 1963년 10월 2일 케네디는 CIA에서 한 달이 넘도록 세밀하게 검토한 수정 계획을 승인했고, CIA는 즈엉반민(Duong Van Minh)을 포함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 있는 남베트남 군부와 접촉하여 쿠데타 계획에 착수했다.

(응오딘지엠 암살을 알렸던 서방의 기사)


쿠데타는 1963년 11월 1일에 개시됐다. 오후 1시 30분에 시작된 쿠데타는 주요 시설들을 장악한 뒤,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당시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 대령은 1개사단을 지휘했었는데, 그 또한 이 쿠데타에 참여했다. 대통령궁을 포위한 쿠데타 군은 응오딘지엠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2번이나 항복을 거부했고, 오후 4시에 쿠데타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다음날인 2일 새벽 3시 30분, 대통령궁에 대한 전투기와 탱크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되자, 응오딘지엠은 경비대에 전화를 걸어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3시간 뒤인 오전 6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항복과 명령 자체는 전화를 통해 이어졌고, 쿠데타군은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쿠데타군이 응오딘지엠을 발견한 곳은 인근 가톨릭 성당이었다. 항복을 선언한 디엠은 동생 누와 함께 무장 호송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호송도중 총살당했다. 이로써 응오딘지엠이 죽고 그의 정권이 무너졌다. 미국은 베트남 분단 초기 그를 호치민에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이라 착각했지만,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응오딘지엠 통치 초기부터 드러났다. 미국은 응오딘지엠 정권이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미노 이론에 빠져 그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이 응오딘지엠을 제거하는 계획에 착수한 것은 1963년 그가 미국의 말을 무시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미국이 보기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신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서 부패하고 무능하며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미국에게는 이대로 가면 남베트남이 분노한 민중에 의해 공산화 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응오딘지엠과 케네디 암살을 같이 주제로 다룬 책)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진 이후 즈엉반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새로운 정권은 또 다른 쿠데타로 전복되고, 남베트남 내부의 쿠데타는 1965년 젊은 군부로 결성된 응우옌 반 티에우와 응우옌 까오 끼가 일으킨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즉 응오딘지엠 암살부터 1965년까지 총 10번 이상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것은 남베트남이 응오딘지엠때부터 무너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남베트남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1965년부터 세계 최강의 군대가 베트남에 대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진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역사학계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당시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을 시점으로 붕괴했을 것이라는 입장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대다수 학계의 주장이다. 즉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학계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그 부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따라서 이런 정권을 옹호하는 일각의 시각은 지극히 반공주의적 시각이며, 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역사를 그저 반공주의에 맞게 해석하는 편협한 관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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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나라 소련은 70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라는 제1의 자본주의 경제대국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경쟁을 했던 나라로 냉전(Cold War)을 장식했던 국가였다. 미국하고 경쟁했던 소련이 미국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던 부분은 바로 체제에 있었다. 미국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소련은 집단과 공동체의 이익과 소유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사회였다.

 

냉전시기 그 냉전의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던 한국사회에선 공산주의는 절대로 긍정받을 수 없는 혹은 긍정해서는 절대로 안 될 악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대중들이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좋게 볼 리 만무했고, 소위 서방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리거나 과장한 내지는 왜곡해온 소련에 대한 인식이 한국의 대중들에게도 먹혀들어갔다. 1990년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소련(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 섬에 살던 한인 1세대 중 한명은 19913월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왔는데, 2일 뒤 기분이 매우 나쁜일을 겪었다. 수십년만에 고국에서 친척을 만났지만, 친척들이 인식하는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천박했기 때문이다.

 

그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사할린 동포)을 마치 감자와 빵만 먹고 사는 즉 못먹고 사는 가난뱅이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 공산주의 국가는 가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소련 시절 일반 인민들의 삶은 절대 빈곤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굶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저 빵과 감자만 먹는 사회가 아니었단 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회주의 국가하면 가난하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아주 불행한 국가 취급을 했다. 그리고 이런 편향된 우익적 편견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남아있다.

 

소련에 대한 이와 같은 편견은 비단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한국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소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서구 국가들 또한 소련과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 대표적으로 서방세계가 소련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학살, 독재, 강제수용소, 비밀경찰, 언론탄압, 굶주림과 같은 단어들이다.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북한을 볼 때 막연히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익적 편견에 맞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집단이 유럽에 있다. 그게 바로 그리스공산당(KKE)이다.

 

1918년 창당이래로 지금까지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항상 행동으로 실천해왔던 그리스공산당(KKE)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혁명적 업적과 대의를 이어받고자 고군분투하는 단체다. 지난 2013년 그리스공산당에선 소련에 대한 우익들의 왜곡에 맞서 3가지 파트로 나눈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이다. 책의 구성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economy)’, 두 번째는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power)’, 세 번째는 역사왜곡에 대하여(On the falsification of history)’.

 

첫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계획경제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를 이루는 요소인지, 그리고 그 계획경제를 통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어떻게 달랐는지 또 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필요한지 거기서 인민들에게 부여되는 경제적 혜택이 무엇인지를 얘기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자본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들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하면 그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크다. 즉 이렇게 이상적이기에 사회가 발전할 수 없고 생산력이 낮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1930년대 소련이 추진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은 사회주의를 왜곡하는 서방의 기준으로도 연 최소 14%의 경제성장률과 생산력을 보였으며, 단기간의 발전을 통해 무상복지를 인민들에게 부여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이란 똑같이 분배한다는 개념이라기 보단 인민이 받아야할 하나의 권리로써 의료나 교육 공공시설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개념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모두가 똑같이 월급을 공평분배 받는 사회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선 노동한 만큼에 따라 급여를 받는 사회였다. 즉 더 많이 일한 사람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1930년대 소련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이 일어났다. 책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하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로 사회주의 건설 첫 해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노동자들이 조직한 자발적 노동인 공산주의 토요노동(Communist Subbotniks)”이 있다. “공산주의 토요노동은 사회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인 공산주의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 태도를 형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했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규율을 장려하고 노동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였다. 또한 주목할 만한 사례로 1930년대 소련에서 발전한 스타하노프(Stakhanovite) 운동이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사회주의 생산에서의 혁신적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운동으로 새로운 기술의 응용에 기초하여 노동 생산성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26~28

 

두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 서방과 우익들이 가장 많이 악의적으로 얘기해온 주제로써 거기에 대한 반박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공산당의 독재라던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가 같다던지 하는 우익들과 서방세력들의 악의적인 주장들에 대한 반박 말이다.

 

소련 사회는 1924년 소련 첫 헌법에서 확립되었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직접적임 참여가 대표적인 단체들에서 간접선거에 의해 수행됐다. 1936년까지 소련에선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공장, 생산단위, 마을에서 노동자권력의 중핵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련의 대중 조직들의 기능을 통해 이루어졌고, 국가의 법률을 승인하기 위한 절차에선 노동자권력의 중핵 조직들의 회합이 개최되었으며 그 모임에서 노동자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 기관들의 작동은 정치활동에서 대중들의 전례 없는 참여를 보여주었다. 1977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국가권력의 지역기관(예를 들어, 대표자 소비에트)은 국가 전역에 5만개 이상이 존재했다. 이러한 소비에트에는 220만 이상의 선출된 대표자들, 즉 소련 전체 주민의 대략 1%가 있었다. 11936년 헌법부터 41년 만에 2,500만 명 이상의 인민들이 비스와 콜호즈(집단농장)에 있는 인민의 통제기관 안에서는 노동자 회합에서 2년마다 대표자를 뽑는 선거가 있었고 대략 9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관들에 참여했을 정도다. 즉 소련이라는 사회에는 최소한 이러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에서의 중심은 노동자 권력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서구식 민주주의를 얘기하면 마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인냥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면에선 민주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포옹한다는 논리로 간혹 나가기도 한다.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 계급이 일반적으로 공산당들이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당들이 자신들을 전복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공산당들에 대해 더 가혹한 수단들을 동원한다.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그리스에서 그리스공산당(KKE)의 역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로 점철돼 있다. 공산당의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은 노동자 계급의 승리이다. 그리스에서 1929년 엘레우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민주정부는 공산주의를 법률 위반으로 선언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법률로 금지했다. 그리스공산당은 27년 동안(1947-1974) 불법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기간 중 20년은 파시스트나 군사독재 기간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부의 기간이었으며, 그 시절 테러, 고문, 추방, 처형 등이 자행됐다. 최근까지 민주주의의 정점으로서 위선적으로 유럽연합(EU)을 대표했던 의회민주주의와 다당제 체제의 옹호자들이 유럽연합의 많은 국가들에서 공산당들과 청년조직, 공산당의 상징들을 법으로 금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체코 공화국에서 공산주의 청년조직은 최근까지 불법이었다. 부르주아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 내렸다. “공산주의 청년조직 강령에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대체할 필요성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범죄이다! 폴란드와 어디에서든지 공산주의 상징물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존재한다. 발트해 국가(Baltics)는 공산당을 금지하는 반면 나치 친위대(Nazi SS)를 찬양한다.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공식사상을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게 만들어버렸고 파시즘과 공산주의, 반공주의를 자극적으로 동일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공산당들이 합법적인 경우조차도,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선전되는데 많은 장애를 두고 있으며 물론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하에서 부르주아는 공산당들에게 권한을 주는 것을 허용한다. 부르주아 정치체제와 부르주아 국가에게 공산당들이 그들의 최고의 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법은 노동자들의 권리"이지만 역시 대중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들(파업, 부르주아 정책 등에 반대하여 저항하고 통제되지 않는 조직)은 합법의 경계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공산당은 얼마나 오랫동안 정치사상을 압축한 당의 구호 때문에 공격을 당했던가?”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과 거짓 p.74~76

 

마지막으로 다루는 세 번째 파트인 역사왜곡에 대하여는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항상 악의적으로 왜곡해온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왜곡을 다루고 있다. 서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룰 때 항상 얘기하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나, 폴란드 분할, 핀란드 침공, 카틴 대학살, 베를린 장벽, 헝가리 봉기 등에 대한 서방의 과장 혹은 왜곡을 반박한다. 사실 필자는 이 주제가 가장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여기서 깊게 다루는 역사왜곡은 현재 서구 세력들 구미에 맞게 포장되어 있으며, 소련의 처지를 악마화 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동독과 베를린 장벽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베를린 장벽이나 동독에 관한 것은 지극히 서방과 서독 입장에서 서술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 구도는 대표적으로 동독은 못살고 자유가 없지만, 서독은 잘살고 자유가 없어서 대다수 사람들이 동독을 떠난다인데,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실제로 냉전 초기 동독과 소련의 자료에 따르면 서독에서도 최소 60만 이상이 동독으로 이주를 갔는데, 설사 서방의 논리를 적용하여 그것이 과장된 수치라 할지라도 분명한건 서독에서도 그 체제에 반대되는 사람들이 동독에서의 탈출자 못지않게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독일의 분할은 소련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서방국가들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스탈린은 1952년 당시 포츠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게 독일의 재통일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한 것은 서구세력들이었다. 1955년 소련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동독이 합류한 것은 1954년 서구 세력들이 제국주의적 목적에 따라 창설된 NATO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을 책은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은 우리가 우익과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근거 출처를 밝혀가며 입증하고 있다. 책을 통해 필자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혹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부르주아적 이익에 따라 의도적으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가치들을 책임지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회가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의도적으로 사회주의가 추구하던 가치를 부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타주의 보단 이기주의와 욕심을 강조하고, 그런 가치들을 폄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91년에 해체됐다. 해체 원인에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작용이 있었지만,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추구했던 가치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자본주의 국가들이 추구했던 가치보다 훨씬 아름답고 인간적인 가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련은 냉전시기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혁명의 편에 섰으며, 제국주의자들의 반혁명적 책동을 분쇄시키고자 했다. 중국 혁명, 베트남 혁명, 쿠바 혁명에서 소련의 지원은 그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소련 사회가 추구했던 가치는 지금도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남아야 한다. 인민 모두가 무상으로 교육받을 권리,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 공공시설을 이용할 권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책 끝부분에 나온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청년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역사를 공부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전 혁명 세대들의 가치 있는 모든 경험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당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인 전통을 끌어낸다. 앞으로의 투쟁과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투쟁에서 더욱 더 유능하고, 효과적으로 되도록. 우리는 조직된 인민들의 정당하고 억누를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깃발, 국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깃발 아래 우리는 투쟁을 계속할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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