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군바리 조지 패튼의 생애

한국의 중년 세대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을 뽑으라고 하면,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사막의 쥐 버나드 몽고메리,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휘관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더글라스 맥아더일 것이다. 그 중에 또 한 사람이 빠지지 않는데, 그가 바로 미군 전차부대를 지휘했던 조지 스미스 패튼(George Smith Patton)일 것이다.

한국 중년들이 패튼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1970년대 텔레비전에서 미국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Patton)‘을 방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패튼은 1885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그 또한 더글라스 맥아더의 집안처럼 군인집안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유명한 장군이었으며 압버지도 군인이었다.

1904년 6월 패튼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벌어진 미국 멕시코 국경충돌 분쟁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실전 경력을 쌓았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며 패튼 또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는 프랑스에 있는 전차 훈련 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미군 전차 부대를 조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생미엘 전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당시 사단장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와 함께 참가했고, 거기서 활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미군 최초의 전차부대를 맡았고, 미군 최초의 탱크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군복무를 계속했고,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여단장, 사단장 그리고 군단장을 역임했다. 1942년 패튼이 이끄는 전차 부대는 아프리카 모로코에 상륙하여 활약했고, 1943년 카세린 전투등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이 이끈 부대에 맞서 전공을 세운다. 1943년 7월 엔 미군이 시칠리아 상륙작전에서 팔레르모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1944년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6개월 뒤에 벌어진 벌지 전투에 투입됐다. 패튼은 아르덴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막아냈고, 여기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제101 공수사단을 구출해냈다. 벌지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패튼의 군대는 프랑스에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독일 본토 그리고 체코까지 진격했다.

1945년 5월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이났다. 여기서도 만족하지 않았던 패튼은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러나 염원과는 달리 그는 독일 군정 사령관직에 임명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독일에 머물게 된 패튼은 1945년 12월 21일 자동차 사고로 하이델베르그에서 사망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패튼은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독불장군이었다. 그의 고집은 같은 동맹군이던 영국의 몽고메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또한 패튼은 전투 스트레느 증후군을 일으켜 입원한 병사를 ‘겁쟁이‘라고 하며 두들겨 패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문에 장병 전원에게 사과를 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전형적인 미국주의자였다. 그는 전쟁 이후 만나게 돠 소련 장군의 면전에 대놓고 욕을 퍼부으며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며, 나치당 출신 관리를 다시 기용해서 독일 재건에 투입해야한다는 말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자와는 협력하지 않는다며 소련측 사람들에겐 아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패튼의 죽고나서 그의 부하 중 한명은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그가 바로 낙동강 전선의 다른 말인 워커라인의 워커 장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