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

(보도연맹 학살,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전쟁범죄였다.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대다수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단독정부가 탄생하는 방향으로 가면서 남한내에선 이에 맞서는 저항이 끊이질 않았다지난번 친일의 힘을 빌리다편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좌우갈등이 극심해지면서그 구도는 친일세력 대 독립운동 세력이라는 모순적인 구조가 생기고독립운동 세력이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려 탄압당하는 상황이 됐다여기에 더해 김두한을 두목으로 하는 대한민청이나 월남한 친일지주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깡패 조직은 온갖 노동자 파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해방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은 대구에서 일어났다. 1946년 9월부터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의 주도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이 한반도 이남에서 시작되었다이 파업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미군정의 극심한 좌익탄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9월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 철도종업원 1만 명이 쌀배금임금인상해고반대노동운동자유민주인사 석방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국적인 시위는 본격화됐다.

(대구 10.1 항쟁,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의 무능과 폭정에 맞서 민중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폭력적이었고, 잔혹했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이쉬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시위는 12월까지 전개되었는데이 과정에서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전국적으로 사망하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이때 당시 사망한 주도급 인사 중 한명은 이후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구에서의 항쟁이 우익들과 미군정의 진압으로 끝난 뒤, 1948년 4월엔 제주도에서 대학살극의 신호탄을 알리는 일이 발생했다바로 제주 4.3 항쟁이다제주도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가 친일경찰을 이용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었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친일 경찰에 의한 발포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차올랐고, 48년 이승만 정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단행하려 하자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민들의 요구는 무시하면서 군정경찰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을 파견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당시 이승만과 같은 편이었던 경찰총장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제주 4.3 항쟁 당시 체포된 민간인)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과 우익단체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입에 담기 힘들정도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이들의 무차별 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의 대다수는 민간인들이었고여성 노인 아이 그리고 유아도 포함되어 있었다제주 4.3 항쟁은 1954년까지 이어졌고 대부분의 사망자는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1948년 11월부터 1949년사이에 나왔다대략 3만 명에서 4만 5000명의 제주도민이 학살이 피해자가 됐고이중 80% 이상은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제주 4.3 항쟁 당시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그는 이 대학살극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선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그는 1948년 7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그 계엄령 조치로 인해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여순민중 항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제주도에서 광란의 학살극이 벌어질 무렵 전라도의 여수와 순천에선 이승만을 놀라게 할 또다른 일이 일어났다이게 바로 여순민중항쟁이다. 194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에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당시 한국군에는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존재했었다이들은 좌익활동을 하다가 체포를 피하기 위해 군에 위장입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제주도에 가서 같은 동포를 진압하기를 원치 않았던 제14연대 군인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이들은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구성하여 저항에 나섰다더 나아가 이들은 친일군경과 지주들을 재판에 세우고 농민들에게 혁명적 대의에 합류해줄 것을 주장했다.

(학살자 김종원,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장교출신으로 잔혹성이 이루 해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여순항쟁 당시 진압군으로써 체포된 민간인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 즉 살인을 즐겼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도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훌륭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여수와 순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진압군을 보냈다여순 봉기를 진압하러간 군대는 이를 아주 잔혹하게 진압했다당시 이승만이 파견한 군대는 과거 친일경력이 있는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로서 잔혹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당시 진압군으로 파견된 이승만의 심복 김종원은 민간인들을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그는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은 민간인들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일본도로 베는게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쏴서 민간인을 하나 둘씩 죽였다김종원은 이후 한국전쟁에서도 수많은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대통령 이승만은 그에 대해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라고 할 정도로 아꼈다여순항쟁을 진압하고자 출동한 군대는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을 통해 봉기를 일으킨 측을 진압했고결국 봉기는 진압됐다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우익측의 강경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의 참혹한 양민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이 일어나면서 극에 달했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도망치기 바빴다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자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른바 거짓방송을 해놓고 도망쳤다그는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파된 한강다리)

 

서울시민 여러분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거짓방송이었다당시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었는데함락되기 전 이승만은 이런 거짓방송을 해놓고 몇몇 정부 관료들과 도망쳤던 것이다이것도 모자라 인민군의 T-34 탱크의 진격을 막는다는 전제하에 이승만 정부는 피난가는 사람들의 길마저 막아버렸다한국군은 인민군의 T-34 탱크를 막는다는 명분을 들어 한강에 있던 모든 다리들을 폭파시켜 버렸다그바람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이승만 정부는 전쟁 초기에 아주 잔인한 전쟁범죄를 계획적으로 저질렀는데그게 바로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다.

 

국민보도연맹이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가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하지만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하게 되었고, 10대인 중·고교생이 가입할 정도로 가입절차가 매우 간단했다쉽게 말해 사상적 전향보단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들이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됐다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고 집단학살했다.

(체포당한 보도연맹원, 이승만 정부의 보도연맹 학살로 전쟁 초기 수십만이 학살당했다.)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전쟁 초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극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났다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년 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그 외에도 진해통영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광산 코발트 학살 현장, 이 학살의 현장은 이승만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광란의 학살극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장소다.)

 

이중에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은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가장 악질적인 전쟁범죄였다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짓까지 했다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초기 2~3개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전역에서 최소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국민보도연맹 학살을 포함하여 한국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학살의 희생자는 많게는 100~12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부터 엄마의 젓을 빨다 검거되어 같이 총살당한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다이승만은 한국전쟁에서 이런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이런 학살극은 반공 혹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하에 은폐되고 미화됐다.

 

한국전쟁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이승만은 뻔뻔했다그는 전세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부산에 있던 시기 조봉암 장택상 등의 의원이 국민에게 사과해야한다는 말을 했을 때자신은 지은 죄가 없다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한국전쟁은 미군이 UN군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며 국제적인 전쟁의 양상을 띄었다미국은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영국캐나다프랑스네덜란드호주뉴질랜드 등의 나라를 끌어들였고, UN군의 지원을 받는 한국군은 미군과 더불어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낙동강 전선에 있든 연합국이 반격을 시작하자 그해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서 학살당한 민간인)

 

이승만 정부는 여기서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전쟁 초기 서울을 버리고 떠났던 이승만은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 부역자 색출을 목적으로 또 다시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이러한 무차별 보복 및 학살은 곳곳에서 일어났고여기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또한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숨은 빨치산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여순민중항쟁에서 그랬듯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1951년 공식적으로 700명 이상을 학살했던 거창양민학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도 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저지른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었고이승만 정부의 반공주의의 폭력성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자국민 9만에서 10만을 아사시킨 이 사건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방산비리였다.)

 

더 나아가 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희대의 방산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그게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이다한국전쟁으로 기존에 없던 자원과 기반마저 파괴되면서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그러나 그런 고통속에서도 정부관리들과 군부는 엄청난 부정부패를 자행했다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다시 인민군 측으로 기울어지던 1950년 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켰다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선이 다시 밀리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서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착복했고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자국군인이 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방위군 사건 주모자의 처형, 부패한 이들은 결국 처형당했다.)

 

이들이 착복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결국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서고 1951년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됐으며사건을 일으킨 김윤근 등 4명은 사형해 처해졌다국회조사단이 진상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책정된 예산 209억 원 중 실제 집행한 액수는 130억뿐이었고, 740만 명 정도의 유령병력을 조직하여 23억 5천만 원의 현금과 5만 2천여 섬의 식량을 부정유출했으며그 밖에 귀향 장병의 귀향경비의약품부식비 등이 부정처분되었다김윤근과 같이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적으로 모은 돈을 기생집에 가서 뿌리며 놀기까지 했다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방산비리로 인하여 대략 9만 명의 군인이 아사했다.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이승만, 이승만에게 있어 북진이란 자신의 정치생명과도 같은 구호였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까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도했고 저질렀다더 나아가 방산비리로 자국군인 9만 명을 아사시키기도 했다그는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렸음에도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쳤으며도망치지 못한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두 번 죽이는 일까지 했다이처럼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광란의 학살극을 주도하였으며반공 내지는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로 그 모든 광란극을 합리화했다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정권에서 물러나기 전 까지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라는 정복주의적 통일비젼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이 정복주의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통일비젼은 오히려 전쟁을 끝내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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