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을 방문한 응오딘지엠)


1963년 11월 2일 새벽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선 일부 군인들이 발사한 총소리와 그들이 운전하는 군용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였고, 대통령과 대통령의 동생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결국 쿠데타군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과 그의 동생은 항복했고, 항복한 그들은 지휘본부로 호송중 총살당했다. 당시 쿠데타 군이 처형한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재자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었다. 응오딘지엠은 한때 미국이 공산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을 들어 내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지원을 받은 내부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왜 응오딘지엠은 암살당한 것일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됐다. 이에 따라 17도선 이북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호치민이 이끄는 정부가 세워졌고, 이남에는 미국이 내세운 정권이 등장했는데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내세웠던 인물은 무능한 황제 바오다이(Bao Dai)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바오다이는 용도가 다 떨어졌고, 여기서 미국이 찾은 인물이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

(남베트남 병사들을 보고 있는 응오딘지엠)


응오딘지엠은 대힌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 Man Rhee)처럼 미국의 구미에 아주 잘 들어맞은 인물이었다. 우선적으로 그는 식민지 시절 20년간 고위 관료로 일했던 경력이 있었고, 망명 초기 벨기에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몇 년간 미국서 살던 인물이었다. 거기다 그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이런 점은 미국 정치인들에게 좋게 비추어졌다. 냉전이 한참이던 당시 미국은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도미노 이론이란 한 나라가 공산화 되면 다른 나라도 덩달아 공산화 된다는 이론으로써, 만일 베트남이 공산주의가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주의가 된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방어벽을 만들기 적합한 곳으로 남베트남을 선택했고, 과거 프랑스가 일정부분 통치하다 물러난 지역에 새로운 민족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은 미국에서 살던 반공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에게 남베트남의 대통령 자리를 앉혀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민중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다. 호치민이 이끌던 북베트남은 정통성에 있어서 항일 항불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찔러 독립을 쟁취했던 업적이 있었다. 그에 반해 디엠 정권의 그렇지 않았다. 새로들어선 남베트남의 군대는 과거 프랑스가 창설한 베트남 괴뢰군에 있던 인물들이 군사에 있어 주요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디엠정권의 내각은 중세시대의 족벌정치를 연상시켰다. 남베트남의 내각은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인물들이 아닌 가톨릭 신자들과 디엠의 일가친척들로 구성됐다. 즉 응오딘지엠이 원하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었다. 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좌관으로, 응오딘 누의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자기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선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응오딘지엠 정권은 토지개혁에도 실패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토지를 할당했고, 민중 대다수가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석가탄신일을 불법화하여 불교도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몇몇 절들을 습격하여 불교도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다. 이것이 결국 민중이 응오딘지엠을 지지하지 않게 된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 남베트남에선 자생적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내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응오딘지엠 정권의 민중탄압은 그 강도가 높아졌다. 그들은 전략촌(Strategic Hamlet)이라 하여, 농민들이 사는 마을에 ‘지역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주민 통제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주민들 보호이기 보단 억압에 가까웠고, 역으로 대다수 농민들이 베트콩을 지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분명히 반민중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정권이었다. 당시 미국은 디엠 정권이 무능과 부정부패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1950년대 후반부터 고문단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규모는 1961년 900명이었지만, 불과 2년 뒤인 1963년에는 1만 6000명까지 증가했다.

(응오딘지엠의 시신)


이렇게 해서 남베트남 안에선 제국주의 모순이 드러났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63년 6월에 있었다. 극심한 불교도 탄압에 맞서 틱광둑(Thich Quang Duc)이라는 한 승려가 수도 사이공에서 몸에 기름을 붙고 소신공양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된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남베트남의 종교 탄압을 아주 정확히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응오딘지엠의 재수인 마담 누(Madame Nhu)는 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신공양한 고승을 ‘바베큐’에 빚대어 얘기하면서 베트남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분노를 샀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남베트남 곳곳에서 승려들이 소신공양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응오딘지엠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도 격렬해졌다. 그 이후에도 응오딘지엠은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여 불교 사원을 습격,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을 체포했으며 사원들 폐쇄시켰으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디엠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디엠은 듣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존F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응오딘지엠을 제거할 계획에 착수했다. 1963년 10월 2일 케네디는 CIA에서 한 달이 넘도록 세밀하게 검토한 수정 계획을 승인했고, CIA는 즈엉반민(Duong Van Minh)을 포함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 있는 남베트남 군부와 접촉하여 쿠데타 계획에 착수했다.

(응오딘지엠 암살을 알렸던 서방의 기사)


쿠데타는 1963년 11월 1일에 개시됐다. 오후 1시 30분에 시작된 쿠데타는 주요 시설들을 장악한 뒤,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당시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 대령은 1개사단을 지휘했었는데, 그 또한 이 쿠데타에 참여했다. 대통령궁을 포위한 쿠데타 군은 응오딘지엠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2번이나 항복을 거부했고, 오후 4시에 쿠데타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다음날인 2일 새벽 3시 30분, 대통령궁에 대한 전투기와 탱크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되자, 응오딘지엠은 경비대에 전화를 걸어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3시간 뒤인 오전 6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항복과 명령 자체는 전화를 통해 이어졌고, 쿠데타군은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쿠데타군이 응오딘지엠을 발견한 곳은 인근 가톨릭 성당이었다. 항복을 선언한 디엠은 동생 누와 함께 무장 호송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호송도중 총살당했다. 이로써 응오딘지엠이 죽고 그의 정권이 무너졌다. 미국은 베트남 분단 초기 그를 호치민에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이라 착각했지만,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응오딘지엠 통치 초기부터 드러났다. 미국은 응오딘지엠 정권이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미노 이론에 빠져 그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이 응오딘지엠을 제거하는 계획에 착수한 것은 1963년 그가 미국의 말을 무시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미국이 보기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신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서 부패하고 무능하며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미국에게는 이대로 가면 남베트남이 분노한 민중에 의해 공산화 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응오딘지엠과 케네디 암살을 같이 주제로 다룬 책)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진 이후 즈엉반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새로운 정권은 또 다른 쿠데타로 전복되고, 남베트남 내부의 쿠데타는 1965년 젊은 군부로 결성된 응우옌 반 티에우와 응우옌 까오 끼가 일으킨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즉 응오딘지엠 암살부터 1965년까지 총 10번 이상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것은 남베트남이 응오딘지엠때부터 무너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남베트남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1965년부터 세계 최강의 군대가 베트남에 대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진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역사학계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당시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을 시점으로 붕괴했을 것이라는 입장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대다수 학계의 주장이다. 즉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학계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그 부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따라서 이런 정권을 옹호하는 일각의 시각은 지극히 반공주의적 시각이며, 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역사를 그저 반공주의에 맞게 해석하는 편협한 관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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