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응아이 성 위치, 꽝응아이 성은 베트남 중부에 자리잡고 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던 한국군은 주로 꽝남(Quang Nam)성과 꽝응아이(Quang Ngai)성 그리고 빈딘(Binh Dinh)성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었다전쟁 특성상 남베트남 내부에서 전투를 전개하는 베트남 전쟁은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민중 사이에서 전투를 치르는 이른바 베트콩(Viet Cong)들을 소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따라서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고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또한 적잖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해서 많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그 이전인 1966년에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그것이 바로 꽝응아이 성에서 청룡부대(Blue Dragon Army)가 저지른 빈호아 학살(Binh Hoa Massacre)이다.

 

맹호부대백마부대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부대로 파병됐던 청룡부대는 1966년 9월 19일부터 1968년 1월 6일까지 꽝남 성 인근에 있는 추라이 지역에 주둔하면서 작전을 전개했었다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이 항상 자랑하며 높게 평가하는 짜빈동 전투(Battle of Tra Binh)도 꽝남 성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빈선 현 빈호아 사에서 벌어진 학살은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총 3일간 전개됐다이 과정에서 빈호아 사 9개 촌에서 모두 43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그 중 268명이 여성이었고, 109명이 노인이었으며, 182명이 어린이었다그리고 여기에는 7명의 임산부도 포함됐다.

(한국군 증오비, 현재 빈호아 마을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얘기에 따르면 두 명이 산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며 한 명은 목이 잘렸고 다른 한명은 칼로 배가 갈라졌으며 두 가구가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이런 잔혹한 학살에 원한이 맺힌 마을 여인들은 아기를 재울 때 자장가를 불렀는데그 자장가는 빈호아 사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표현한 것이었다이 자장가는 아기야 이 말을 기억하라로 시작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기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들이 36명을 죽여 폭탄 구덩이에 시신이 가득 쌓였구나

아가야 쭈옹딘 폭탄 구덩이를 기억하거라

 

일반적으로 아기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로는 끔찍한 내용이다하지만 이것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절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식이자 표현이기도 하다후대가 이렇게 기억을 하듯이 빈호아 사 인민위원회 관사 옆 언덕에는 인민위원회가 세운 증오비가 있다그리고 그 증오비 옆 언덕 위에는 영국인이 세워준 위령비가 있으며 희생된 430명의 이름이 적혀있다이 증오비는 1994년 미라이 박물관(My Lai Museum)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자료를 본 한 영국인이 모금 운동을 벌여 위령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아기에게 부르던 자장가)

 

학살은 1966년 12월 3일 빈호아 사 롱빈 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 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 작전을 하면서 일어났다이 중 응옥 흥 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 놓기도 했으며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은 강간당했다또 두 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한 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다그리고 1966년 12월 5일 찌호아 촌과 롱빈 촌에는 한국군들이 들어가 36명의 주민을 체포하고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해 죽였다이 구덩이 자리에 현재 증오비가 서 있다.

 

1966년 12월 6일 오전 10시 한국군들은 안 촌과 썸꺼우 촌에서 주민들을 모와 오후 4시경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171명의 주민을 학살했다같은 날 까이자 촌 동쭝 마을에서는 13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이렇게 해서 총 3일간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학살에서 무려 43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전 빈호아 사 당 서기장이자 인민위원회 주석이었던 생존자 팜 반 꾹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빈호아사 입구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이곳은 한국군의 양민 학살이 진행되어 총 422명이 희생된 곳이다이후 영국의 후원으로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이곳에 위령탑이 건립됐다. 1966년 2월 3일과 5뚜이호아 마을에서 15사당 뒤 폭탄구덩이에서 36명 등 5개 지역에서 총 430명이 죽었다또한 1966년 12월 6동쪼이 마을에서 66숲 근처에서 59우물을 파러갔던 청년들 131명과 여기저기에서 흩어져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모두 553명이 학살을 당했다그리고 록선 마을에선 44안푹 사에서 114동쭝 마을에서 134며으 뚜이호아 마을에서 34록뜨 마을에서 13안크엉 마을에서 5명이 학살당했다위의 희생자들 중에는 노인이 109여성 298어린이 28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한국군이 총을 쏘았을 때나도 다리에 총을 맞고 볏단 속에 숨어 있었으며한국군이 물러가자 유격대원들이 나를 집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로 감아 주었다한국군이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일부 주민들만이 집에 있었으며많은 사람들이 논에 일을 하러 갔었다한국군들은 주민들을 여러 그룹으로 모아 놓고 총을 닦았으며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그리고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사람들은 전하기를한국군들이 총을 쏘자 어떤 사람들은 위로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그들 중에는 임신부도 있었고 목이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오후 6일을 나갔던 사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그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죽은 것을 발견하고 경악을 했다어떤 집의 경우엔 20여 명의 가족이 몰살을 당하기도 했고진창구덩이 속에는 몇몇 아이들이 사람들의 밑에 깔려 여전히 살아 있기도 했다어머니의 젖을 찾아 기어 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사람들의 밑에 가려 숨죽여 있던 7명의 이이들은 살아났다베트남과 미국-한국 간의 교전이 이루어지면공중에는 미군 전투기가지상에서는 한국군들이 공격을 해왔고 외곽에서 미군들이 폭격을 가하면한국군들은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폭탄과 수류탄을 터뜨렸다이 지역에서 모두 549명이 학살을 당했으며그중에는 어른과 아이 모두 한데 엉겨 쓰러져 있었다한국군이 들어와 마을을 소탕했을 때그들은 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안심시킨 뒤에 총을 쏘았다희생자들 대부분은 노인과 어린이었으며청년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단지 한국군이 공격을 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만 어처구니없이 죽어갔다대체적으로 많은 양민 학살이 이루어졌고어떤 지역에서는 5~7또 어떤 지역에서는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됐다우리 가족의 경우에도 어머니누이조카 등을 포함 모두 11명이 참사를 당했다. 1994년 영국인 여성 한 명이 이 지역을 조사하러 왔을 때 나는 모든 자료를 그에게 건네주었다영국인 여성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며, 1996년 다시 베트남에 돌아와 이 학살 사건의 희생자 430명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겠다고 정부에 보고했다영국은 이를 위해 4억 동을 지원했고꽝응아이 성에서 2억 동을 지원해 모두 6억 동의 재원이 마련됐다그리해 1998년 그 부인은 위령비 건립을 위해 다시 베트남을 방문했다그는 또한 영국에 돌아가 빈호아 사에 병원이나 학교 건립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지금 여러분들이 처음으로 방문해 준 데 대해 우리 빈호아 주민들은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다만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국민들과 세계 각국의 친구들이 이 학살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기를 희망한다. 1967년 10한국군들이 철수했을 당시 이 지역의 총 희생자는 553명이었으며, 842채의 가옥이 불태워지고, 428마리의 물소, 423마리의 돼지가 불태워지거나 살해되는 등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출처 : 미안해요 베트남 p.175~176

(빈호아 학살 50주년 당시 한국에서 열린 기자회견)

 

2016년 뉴스타파에서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다뤘던 적이 있다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공론화에 앞장섰던 구수정 박사와 평화재단 일행들의 평화기행을 담고 있었는데구수정 박사의 말에 따르면 “4년 전(2016년 기준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평화기행을 인사하기는커녕 눈도 안 마주치고 한국 사람들이 있으면 피해 다녔다.”고 한다그만큼 마을사람들이 한국군의 학살을 잊지 않았다는 얘기다그리고 현재까지 빈호아는 마을 안쪽으로는 아직까지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남아있다.

 

참고자료

 

미안해요 베트남푸른역사, 2011

뉴스타파 목격자들 전쟁 2책임없는 전쟁뉴스타파, 201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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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08-22 0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 국제시장 보면 한국인(황정민)은 베트남 아이를 구한 영웅으로 등장하는데 진심으로 토가 쏠렸씁니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진짜 뻔뻔하구나.. 그런 생각. 베트남전 때 한국군 정말 잔인했죠.. 백 배 천배 사죄해야 합니다..

NamGiKim 2020-08-22 08:28   좋아요 1 | URL
그리고 베트콩을 실제 한국군 처럼 묘사하죠. 역사왜곡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그는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도 무수히 많이 비판받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나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재산피해와 인명피해를 불러왔고, 그런 살육의 현장 속에서 그는 어떠한 인종주의적 내지는 극우 민족주의적 선입견과 편견에 빠져 유대인 대학살(Holocaust)를 계획했고 실행했다. 그 결과 대략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집시와 반 나치 인사 그리고 전쟁포로와 타 인종들이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그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반인륜성과 비도덕성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루스벨트나 처칠 그리고 스탈린과는 달리 당시 시대상과는 다르게 재평가 내지는 중립적으로 보려는 여지가 없다시피 한다.

 

따라서 히틀러는 그가 자살한지 7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도 인류최악의 범죄자로서 기록되고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대변하듯이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선 외계인, 악마, 좀비, 로봇과 더불어 악역을 도맡는 5대 트로이카이다. 반일 불매운동이 번지던 작년에 많은 사람들을 읽게 했던 <일본 제국 패망사 :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의 저자이자 논픽션 작가인 존 톨랜드(John Tolland)1970년대 독일의 독재자이자 반인륜적 범죄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게 작년에 와서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2 : Adolf Hitler Definitive Biography>.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에서 근무했던 톨랜드는 이 책을 쓰면서, 소위 우리 기억 속에 악인의 이미지로서 각인된 아돌프 히틀러의 삶을 우리가 정치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보는 100년 전 인물(1970년대 기준인 것 같다.)인 것처럼 쓰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거나 강하기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포괄하여 인터뷰 했고, 국립문서보관소를 포괄한 수많은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비록 1970년대에 집필한 책이라 톨랜드의 책보다 비교적 최근에 출한된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이나 이언 커쇼의 <히틀러 1,2>보다는 히틀러에 대한 최신 자료나 연구를 담지 못하고 있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한계점을 보완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일반인들이 읽기 쉬운 문체로 히틀러의 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존 톨랜드 특유의 문체는 책의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힌다. 논픽션이 저작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던 1889년부터, 히틀러가 독일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알려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빌미로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까지의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필자의 개인사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다. 필자가 역사라는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시절 아돌프 히틀러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부터였다. 다른 독빠(독일빠) 밀리터리 덕후들이 그랬듯이 필자 또한 전쟁광 히틀러에게 일시적으로 매료되었으며(물론 이런점은 성장하면서 극복해냈다.), 긍정 부정의 의미를 떠나 이는 필자가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였다. 하지만 필자는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해 딱히 읽어본 책이나 논문이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를 내려놓고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을 펼치게 되었다.

 

히틀러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는 젊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삶에서의 여러 우여곡절과 어머니의 죽음,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그리고 독일의 패배 등의 환경은 화가가 아닌 그가 나치당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는 연설을 매우 잘했고, 나치당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 모았다.

 

책을 읽으면서 과거 히틀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생각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 예를들면 오스트리아의 관리였던 히틀러의 아버지가 생각보다 많은 자식을 낳았고, 여러 명의 여자와 결혼한 사실이나, 히틀러의 일가친척 중 한명이 영국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다는 그런 내용들 말이다. 이런 사실들은 히틀러 일대기에 대한 필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히틀러에게 친한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숙자 시절 히틀러에게 노숙자 쉼터에서 방을 쓰게 해준 것도 유대인이었고, 매너하임에서 지낼 당시 그가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2명은 유대인이었다. 또한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당시 그의 상관 또한 유대인이었다. 히틀러가 유대인 친구를 두었다는 사실은 책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매너하임에서 히틀러가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2명은 유대인이었다. 1명은 애꾸눈 열쇠공 로빈손으로 그를 자주 도와주었고, 다른 1명은 요제프 노이만이라 불린 헝가리인 파트타임 미술품 거래인이었다. 노이만은 히틀러가 다 해진 옷을 입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프록코트를 벗어주었다. 히틀러는 노이만을 매우 존경했는데 한번은 그에 대해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그림을 사준 다른 3명의 미술품 거래인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말을 했다 히틀러의 대리인이었더 하니슈는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그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에 히틀러의 호감을 산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93

 

히틀러가 유대인을 혐오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당시 반유대주의는 유럽 포퓰리즘이라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입대해 참전했던 히틀러는 항상 애국심과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 또한 동료들을 아끼고 전장터에서 발견하여 키운 폭슬이라는 강아지에게 매우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소위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피하려는 사람들을 매우 혐오했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는 전쟁을 방해하는 세력에는 유대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반유대주의적 감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 공격을 받아 잠시 눈이 멀었던 이후 전쟁의 종결과 사회주의자들의 시위가 독일에 일어나면서 더 극심해졌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회주의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군인으로 복무했을 당시 사회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감을 동료들에게 마음껏 드러냈으며, 전쟁을 회피하는 사회주의자들 중심에는 항상 유대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혁명을 겪으면서 더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나, 벨라 쿤, 트로츠키 등은 실제로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히틀러는 이들을 증오하고 혐오했다. 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히틀러는 만연한 혁명 때문에 동요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조국에 대해 이처럼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최근 인종주의에 관한 팸클릿(아마도 에카르트가 발행한 것일)을 접하게 되었는데 비엔나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인생에서 다시 진화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마음속에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들끓고 있었는데 뮌헨 거리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가속화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스너, 톨러 같은 무정부주의자, 마지막으로 러시아 출신의 빨갱이 레비네 등 유대인들이 어디서나 권력을 잡고 있었다. 베를린의 로자 룩셈부르크, 부다페스트의 벨라 쿤, 모스크바의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모두가 다 유대인이었다. 히틀러가 이전에 의심을 품어온 음모 이론이 현실로 다가왔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154

 

192311월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성공한 사례를 본받아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 쿠데타는 진압당했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재판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히틀러는 자신의 비서인 루돌프 헤스와 함께 책 한권을 썼는데, 그 책이 바로 <나의투쟁 : Mein Kampf>였다. 나의투쟁은 히틀러 개인이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를 이론화시킨 것이었다. 여기서 히틀러는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라고 하여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실현해야 한다고 햇는데, 이것은 제국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정복주의적 비젼이었다. 히틀러에 따르면 독일 민족이 더많은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선 타국을 정복해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1939년 히틀러가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은 엄밀히 말해서 이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을 실현화 시킨 예시다.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자로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경제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의 경제는 휘청거렸다. 1920년대 독일 경제는 휘청거렸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독일 경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에 직면했었다. 전쟁 전 단 1마르크사 6014,300마르크로 평가절하되고, 달걀 1개의 값이 3천만 마르크가 됐고, 200조 마르크 지폐는 800달러 정도면 환전이 가능했다. 이렇게 독일 경제는 인플레이션을 직격타 맞았었다. 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런 실업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갔는데, 그런 노력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미국발 경제 대공황으로 실업률이 급증하자 독일의 나치당은 민중의 투표를 통해 지지받을 수 있었다. 그런 지지가 결국 1933년 히틀러를 독일 수상 자리에 올려놓았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한 일은 바로 실업률 해소와 경제발전이었다. 사실 우리가 부르는 나치의 뜻을 번역하면 민족 사회주의가 된다. 일각에선 국가 사회주의라 번역하지만, 독일 파시즘이 추구하는 것이 민족 공동체라는 점에서 민족이라 번역하는 게 보다 정확하다. 소위 히틀러의 국가는 단기간에 실업률을 해소하고 노동자 복지 정책과 아우토반 건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경제난을 해소했다. 히틀러 집권기에 이런 변화가 있자, 나치당 집권 초기 민중의 지지율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독일인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이유다. 하지만 히틀러의 계획에는 오직 독일민족만 포함되었지, 타인종에 대한 배려정책은 없었다. 특히나 유대인들은 더더욱 그랬다. 당시 독일에 있던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은행에 있던 재산이 동결되기 까지 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사회에서 억압당하고 탄압당했다. 하지만 유대인 인구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대다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계속 지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자신의 당 정적이었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제거할 수 있었고, 독일을 재무장 할 수 있었으며,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까지 개최하여 전 세계에 나치독일을 홍보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빼앗겼던 라인란트 지방을 무력으로 되찾았고, 스페인 내전에 이탈리아와 더불어 군대를 파병했으며,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관계, SA 대장 룀의 동성애와 숙청 그리고 에바 브라운을 포함한 히틀러를 사랑했던 여인의 스토리를 흥미롭게 읽었다. 존 톨랜드 특유의 필체 덕분에 책이 술술 읽혔지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공산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를 얘기할 때, 빨갱이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책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시대적 배경에 맞는 번역에서 사용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런게 맞지 않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 내지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라는 단어로 표기한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히틀러의 초기 생애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까지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내용은 조만간 2부를 읽고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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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치를 향한 발걸음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2011년에 나온 영화 고지전(The Front Line)’을 보면 휴전회담이 진행중이던 1952년에서 1953년 사이 38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던 남북한의 병사들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전을 한다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남북한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이러한 전투는 휴전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지속됐다. ‘반공포로 석방’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외쳤다한국전쟁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승만이 했던 또 다른 일은 바로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부통령 이시영, 이시영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동생이다. 그는 이회영과 더불어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였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6형제 중 한명인 이시영은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새 국가건설에 노력을 다했던 인물이었다물론 이승만의 견제는 점점 심해졌고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다결국 부통령 이시영은 1951년 5월 1일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하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이승만은 부통령의 존재를 고깝지 않게 여겼다그는 매사에 유아독존적이었다정부의 각종 행사장에서는 부통령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국정의 주요 정책 결정에 소외시키기 일쑤였다국회는 5월 17일 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하여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 끝에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74표를 얻은 이갑성을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김성수도 부통령직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1952년 5월 29일 폭탄적인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부산의 임시수도 정부청사,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사용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선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원래대로라면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지만이승만은 노회함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다거기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이렇게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신이 주도하는 당을 발족했다그 당이 바로 자유당이다당시 자유당은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는데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원외파는 이범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구도였다이승만은 이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자유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생각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28일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났다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한청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소위 이들은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 요구 등을 내건 이승만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하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관제데모는 결과적으로 반 이승만 정서를 고조시키는 역풍을 불러왔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동원한 헌병들은 대낮에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연행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하기 위해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그는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 전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최전선에서 인민군과 대치중이던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을 선포했다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했고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다음날인 5월 26일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로 향하던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몰고 가서 연행했다이게 바로 부산정치파동 사건이었다이런 상황까지 가자 이시영김창숙김성수장면 등 반이승만 야당원로들이 부산에서 이른바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불리는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그러나 6.25기념식상에서 전 의열단원 유시태와 김시현 등이 주도한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야권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해방 후 친일경찰 채용에 앞장섰던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경찰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으로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직선제로 실시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발췌개헌 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서 충직한 심복 노릇을 한 이범석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권력욕이 강한 이승만은 족청을 등에 업은 이범석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결국 이범석을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자파라도 세력이 커질 것 같으면 그 뿌리부터 자르는데 머뭇거림이 없는 노회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투표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사되면서 한국전쟁은 막을 내렸다하지만 한국전쟁의 종결은 국내 정치적으로 남한의 반공보수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만 미만이었던 한국군은 60만 대군으로 급격히 자라났고경찰력도 증강되어 반공안보체제를 강화했다그리고 반공이라는 체제의 가치는 국시로서의 지위로 더 강화되었고소위 사회주의 노선이나 민주사회주의 노선 할 거 없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색체를 보이면이단취급 받는 광적인 사회가 되었다.

 

1953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가 한국에서 실시되었다3대 총선은 2년 앞으로 다가온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이승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우선적으로 이승만은 국회에서 이범석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이승만은 먼저 대통령령을 발포하여 각종 청년단체를 불법화하였고자유당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이범석의 족청을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그러고 난 뒤 이승만은 헌법 속에 들어있는 의원내각제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가능하게 하는 다수의석을 차지하고자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을 통한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공고화 되기 시작하자 대한민국 국회는 점차 반이승만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했다해방 후 이승만과 한편에 섰던 조병옥이나 이범석 그리고 신익희 등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했고이승만을 위해 백색테러를 일삼다가 국회의원 자리까지 들어가게 된 조직폭력배 김두한 또한 반이승만세력이 되었다아무튼 제3대 총선은 이승만이 이와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자유당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긁어모아 유권자를 매수하는 한편 깡패들을 동원하여 야당의 유세장을 기습하고 야당 후보 및 무소속 후보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갖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특히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등록 서류를 탈취하여 후보등록을 못하게 하고장면의 측근 오위영에게 후보를 사퇴하도록 압박하였다.

(자유당, 자유당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을 대변했던 정당이다.)

 

온갖 부정타락선거의 결과 자유당은 114석으로민국당 15대한국민당 3국민회 3제헌동지회 1무소속 67석에 비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당초 목표인 개헌정족수를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1954년 9월 7이승만의 자유당은 선거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이기붕 의원을 포함한 135명의 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국회에 제안했다이렇게 하여 제2차 개헌파동이 시작된 것이다개헌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투표제의 채택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②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민의원에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임권 부여.

 

③ 참의원 의원을 2부제로 개선.

 

④ 참의원에 대법관 기타 고급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 부여.

 

⑤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원칙.

 

⑥ 현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 폐지.

 

⑦ 기타 8개 항의 개정사항을 포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불과 2년전 부상정치파동을 주도했던 이승만은 종신대통령을 꿈꾸며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러 자유당이 원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이승만은 자유당의 개헌안을 공고기간에 거쳐 11월 18일 본회의에 상정했다또한 이승만은 국회상정에 앞서 우파 반공주의의 본산인 민국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개헌안 통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개헌안은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부 60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부결이 선포되었다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로 부결되었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전대미문의 수학계산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일요일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정부는 공보처장 갈홍기의 이름으로 203명의 2/3는 135라도 무방하다는 특별성명을 내는 등 개헌안 부결 번복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 27일 저녁 자유당 수뇌부는 서울대학의 수학교수 최윤식 등을 동원하여 203의 3분의 2가 135라는 희한한 방식에 착안하고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여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 의총은 성명을 통해 어제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부결임을 선포한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숫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 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해괴망측한 발표를 했다다음날 29일 최 부의장이 개회 벽두에 전차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자국회는 난장판이 되었다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이었다.

(사사오입 개헌의 논리)

 

이승만은 이런 전대미문의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토대를 마련했다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불법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이었다는 점에서도 한국의 헌정사상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이승만의 악행은 대통령으로서 독재정권을 강화하면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일을 가리지 않았으며,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이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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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지도)

 

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시작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주사변중일전쟁스페인 내전 등이 시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이지만종결은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Atomic Bomb)은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었고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결국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그러나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진격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고, <폭격의 역사>를 쓴 아라이 신이치나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등과 같은 인물들도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 공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그러나 미국은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렀고치열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겨우 함락시켰다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면 대략 100만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실제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군사작전을 계획했었으며그렇게 될 경우 태평양 전쟁을 1,2년 더 진행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반소련감정을 내려놓고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심지어 반공주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고 독일에 맞선 소련의 공로를 매우 높게 인정했을 정도며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들어진 동영상도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하지만 이런 미국의 입장은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쯤 되어 핵폭탄 실험이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외곽 사막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핵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지했었지만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그가 생각하기에 핵 보유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미국이 원하는 조건대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길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루스벨트가 급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매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트루먼은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더 이상 소련의 참전을 환영하지 않게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슬며시 다가가 지나가는 말투로 미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물론 소련은 이미 정보부를 통해 맨해튼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따라서 스탈린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소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결국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Little Boy)를 탑재한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 섬 기지를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고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원폭투하 이후 미국의 트루먼은 환호했다당시 원폭투하의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소련은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는데 원자폭탄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사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경우 주저 없이 소련에도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신호로 생각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일본 외무성 최고위급 관리 4명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나쁜 소식을 알렸다스즈키의 반응은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였다일본이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소련군의 공세가 있자 비상 내각회의를 소집한 일본 관리들은 회의도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실을 알게 됐다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깃발을 세우는 소련군)

 

무엇보다 소련의 만주 공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당시 소련군은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고이들은 만주와 몽골중국한반도 이북 그리고 그 외의 쿠릴열도와 사할린 이남을 통틀어 공격을 개시했다당시 일본이 소련군의 만주진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것은 이러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방정책으로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했고미군과의 전투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비록 보급이 안되긴 했어도 일본군은 주로 만주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보급물자와 지원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즉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만주와 중국 한반도를 포함한 지역에서 지원을 받음으로써 미국에게 격렬히 저항할 생각이었다그러기 위해선 소련과 접촉하여 외교적인 해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런 계획은 무산되었다또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동부전선에서의 4년간의 경험은 소련군을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기술을 발전시켜 놓았고만주에서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만주전선을 붕괴시켜버렸다비단 만주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중국 일부와 쿠릴열도사할린 이남그리고 한반도 이북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있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소련의 참전을 통해 알게 됐다스즈키 총리의 경우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의 길을 선택했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추축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기사)

 

종전 후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의 이유를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만주 진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일본의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 역시 원자폭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본다라고 말했으며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장도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따라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진짜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기 보단 소련의 만주 진격 작전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 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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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새조선 역사의 첫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일본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조각돌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누구를 위하여 당신들이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 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굴욕한 것은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군대는 조선 인민들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산업 기업소들을 개시하라. 붉은군대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군대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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