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응아이 성 위치, 꽝응아이 성은 베트남 중부에 자리잡고 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던 한국군은 주로 꽝남(Quang Nam)성과 꽝응아이(Quang Ngai)성 그리고 빈딘(Binh Dinh)성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었다. 전쟁 특성상 남베트남 내부에서 전투를 전개하는 베트남 전쟁은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민중 사이에서 전투를 치르는 이른바 베트콩(Viet Cong)들을 소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고,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또한 적잖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해서 많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 이전인 1966년에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꽝응아이 성에서 청룡부대(Blue Dragon Army)가 저지른 빈호아 학살(Binh Hoa Massacre)이다.
맹호부대, 백마부대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부대로 파병됐던 청룡부대는 1966년 9월 19일부터 1968년 1월 6일까지 꽝남 성 인근에 있는 추라이 지역에 주둔하면서 작전을 전개했었다.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이 항상 자랑하며 높게 평가하는 짜빈동 전투(Battle of Tra Binh)도 꽝남 성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빈선 현 빈호아 사에서 벌어진 학살은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총 3일간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빈호아 사 9개 촌에서 모두 43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 중 268명이 여성이었고, 109명이 노인이었으며, 182명이 어린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7명의 임산부도 포함됐다.
(한국군 증오비, 현재 빈호아 마을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얘기에 따르면 두 명이 산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며 한 명은 목이 잘렸고 다른 한명은 칼로 배가 갈라졌으며 두 가구가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이런 잔혹한 학살에 원한이 맺힌 마을 여인들은 아기를 재울 때 자장가를 불렀는데, 그 자장가는 빈호아 사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자장가는 “아기야 이 말을 기억하라”로 시작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기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들이 36명을 죽여 폭탄 구덩이에 시신이 가득 쌓였구나
아가야 쭈옹딘 폭탄 구덩이를 기억하거라”
일반적으로 아기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로는 끔찍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절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식이자 표현이기도 하다. 후대가 이렇게 기억을 하듯이 빈호아 사 인민위원회 관사 옆 언덕에는 인민위원회가 세운 증오비가 있다. 그리고 그 증오비 옆 언덕 위에는 영국인이 세워준 위령비가 있으며 희생된 430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증오비는 1994년 미라이 박물관(My Lai Museum)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자료를 본 한 영국인이 모금 운동을 벌여 위령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아기에게 부르던 자장가)
학살은 1966년 12월 3일 빈호아 사 롱빈 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 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 작전을 하면서 일어났다. 이 중 응옥 흥 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 놓기도 했으며,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은 강간당했다. 또 두 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한 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다. 그리고 1966년 12월 5일 찌호아 촌과 롱빈 촌에는 한국군들이 들어가 36명의 주민을 체포하고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해 죽였다. 이 구덩이 자리에 현재 증오비가 서 있다.
1966년 12월 6일 오전 10시 한국군들은 안 촌과 썸꺼우 촌에서 주민들을 모와 오후 4시경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171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같은 날 까이자 촌 동쭝 마을에서는 13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이렇게 해서 총 3일간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학살에서 무려 43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전 빈호아 사 당 서기장이자 인민위원회 주석이었던 생존자 팜 반 꾹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빈호아사 입구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이곳은 한국군의 양민 학살이 진행되어 총 422명이 희생된 곳이다. 이후 영국의 후원으로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이곳에 위령탑이 건립됐다. 1966년 2월 3일과 5일, 뚜이호아 마을에서 15명, 사당 뒤 폭탄구덩이에서 36명 등 5개 지역에서 총 430명이 죽었다. 또한 1966년 12월 6일, 동쪼이 마을에서 66명, 숲 근처에서 59명, 우물을 파러갔던 청년들 131명과 여기저기에서 흩어져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모두 553명이 학살을 당했다. 그리고 록선 마을에선 44명, 안푹 사에서 114명, 동쭝 마을에서 134며으 뚜이호아 마을에서 34명, 록뜨 마을에서 13명, 안크엉 마을에서 5명이 학살당했다. 위의 희생자들 중에는 노인이 109명, 여성 298명, 어린이 28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군이 총을 쏘았을 때, 나도 다리에 총을 맞고 볏단 속에 숨어 있었으며, 한국군이 물러가자 유격대원들이 나를 집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로 감아 주었다. 한국군이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 일부 주민들만이 집에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논에 일을 하러 갔었다. 한국군들은 주민들을 여러 그룹으로 모아 놓고 총을 닦았으며,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하기를, 한국군들이 총을 쏘자 어떤 사람들은 위로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임신부도 있었고 목이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오후 6시, 일을 나갔던 사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죽은 것을 발견하고 경악을 했다. 어떤 집의 경우엔 20여 명의 가족이 몰살을 당하기도 했고, 진창구덩이 속에는 몇몇 아이들이 사람들의 밑에 깔려 여전히 살아 있기도 했다. 어머니의 젖을 찾아 기어 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 사람들의 밑에 가려 숨죽여 있던 7명의 이이들은 살아났다. 베트남과 미국-한국 간의 교전이 이루어지면, 공중에는 미군 전투기가, 지상에서는 한국군들이 공격을 해왔고 외곽에서 미군들이 폭격을 가하면, 한국군들은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폭탄과 수류탄을 터뜨렸다. 이 지역에서 모두 549명이 학살을 당했으며, 그중에는 어른과 아이 모두 한데 엉겨 쓰러져 있었다. 한국군이 들어와 마을을 소탕했을 때, 그들은 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안심시킨 뒤에 총을 쏘았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노인과 어린이었으며, 청년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단지 한국군이 공격을 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만 어처구니없이 죽어갔다. 대체적으로 많은 양민 학살이 이루어졌고, 어떤 지역에서는 5~7명, 또 어떤 지역에서는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됐다. 우리 가족의 경우에도 어머니, 누이, 조카 등을 포함 모두 11명이 참사를 당했다. 1994년 영국인 여성 한 명이 이 지역을 조사하러 왔을 때 나는 모든 자료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영국인 여성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며, 1996년 다시 베트남에 돌아와 이 학살 사건의 희생자 430명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겠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영국은 이를 위해 4억 동을 지원했고, 꽝응아이 성에서 2억 동을 지원해 모두 6억 동의 재원이 마련됐다. 그리해 1998년 그 부인은 위령비 건립을 위해 다시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는 또한 영국에 돌아가 빈호아 사에 병원이나 학교 건립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처음으로 방문해 준 데 대해 우리 빈호아 주민들은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국민들과 세계 각국의 친구들이 이 학살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기를 희망한다. 1967년 10월, 한국군들이 철수했을 당시 이 지역의 총 희생자는 553명이었으며, 842채의 가옥이 불태워지고, 428마리의 물소, 423마리의 돼지가 불태워지거나 살해되는 등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출처 : 미안해요 베트남 p.175~176
(빈호아 학살 50주년 당시 한국에서 열린 기자회견)
2016년 뉴스타파에서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다뤘던 적이 있다.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공론화에 앞장섰던 구수정 박사와 평화재단 일행들의 평화기행을 담고 있었는데, 구수정 박사의 말에 따르면 “4년 전(2016년 기준) 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평화기행을 인사하기는커녕 눈도 안 마주치고 한국 사람들이 있으면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마을사람들이 한국군의 학살을 잊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현재까지 빈호아는 마을 안쪽으로는 아직까지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남아있다.
참고자료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2011
「뉴스타파 목격자들 “전쟁 2부, 책임없는 전쟁”」, 『뉴스타파』, 201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