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 종북좌파? 와 우방 미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이란에 파병하는 종북좌파가 이세상에 어디있냐? 그 세 사람에게 종북좌파라 하는거는 그냥 논리고 뭐시기도 없는 매카시즘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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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8-2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리고 영화 강철비2에서도 스무트한테 아부하는거 봐봐. 이게 한국 대통령의 본 모습이지.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와 그의 죽음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4.19 혁명 이후 시민들은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

 

1960년 4월 26일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이것은 이승만 개인이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 절대 아니었고, 4.19 혁명에서 수많은 민중이 피를 흘리며 투쟁해서 얻어낸 결과였다그로부터 2일 뒤 이기붕 일가는 집단자살로 역사속에서 사라졌고이승만은 그들이 죽은 현장을 직접 가서 참사 현장을 잠시 둘러보고 경무대를 떠나 걸어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 동상 철거 소식을 전한 대한뉴스)

 

1960년 4월 27일 국회의 결의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이 발표되자 허정 외무장관이 자동적으로 대통령 서리에 취임했다이리하여 장면 내각이 들어서고 허정 과도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다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새로운 발걸음이 생겨났다이승만 숭배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던 이승만 동상은 민중의 손으로 무너져 내렸다. 1948년 여순민중항쟁 때나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4.19 혁명 이후 극심한 반공 체제에 도전하며 통일 문제에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운동도 출현했다기존에 이승만 반공 정권이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정복주의적 비젼인 북진통일론에 대립되는 통일 방안이 바로 그것이었다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구호가 가라 북으로오라 남으로!”였다당시 급진적인 지식인과 학생은 자립적 경제 발전을 원하기도 했고이는 종종 반미 구호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으며반제국주의적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했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당시 남한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 혁명 이후 시민들 중 일부는 이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것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북진통일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일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

(장면, 장면은 이승만 정권 당시 야당에서 활동하며 그와 경쟁했다.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을 이끌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해방 이후부터 만들어 놓은 반공주의적 토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가 물러난 이후에도 당시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반공주의자 맥아더의 동상에는 대대적인 헌화가 쌓였었다또한 이승만 정권 이후 등장한 장면의 민주당 정부는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운동을 억누르고자 했다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에 들어선 장면 정부 또한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반공사상에선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은 하야한 지 1달 3일 만에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하와이 동포 몇 사람이 제공한 대만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하였고이것은 이승만 인생에 있어 마지막 망명길이었다이승만은 정말 마지막 까지도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이승만은 4.19 혁명과 자진하야 그리고 망명길에 오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12년간 저지른 온갖 악행과 폭정 그리고 4.19 혁명에서 일어났던 사상자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마치 한국전쟁에서 거짓방송을 해놓고도 국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1960년 한국과 북한의 경제 차이,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지금이야 한국이 앞섰지만 당시 한국은 북한 경제 규모에 두배나 더 작은 규모였다.)

 

이승만이 떠난 한국의 경제상황은 참으로 처참했다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빈곤은 4.19 혁명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이승만의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남한보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보다도 훨씬 경제력에서 밀리는 상황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소련과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그랬듯이 전후재건에 착수했고, 1956년에는 소위 천리마 운동이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여 경제성장과 전후복구에 성공해냈다또한 북한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경제원조도 받았다. 1960년 당시 북한의 경제규모는 세계 50위에 오르게 되었지만남한의 경제규모는 북한보다 2배나 작은 101위였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를 세워 반공보루를 강화하려 했던 미국의 반소련 반공정책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실제로 미국은 4.19혁명 이후 가난한 한국인들이 북한으로 흡수되는 것을 원할까봐 매우 노심초사했고 두려웠다그러던 1961이승만이 하와이에 망명한지 1년이 되던 해 한국에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이것은 과거 이승만에 반대했던 일부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였다바로 5.16 쿠데타였다이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은 바로 박정희(Park Chung-hee, 朴正熙)였다. 5.16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가 했던 일중 하나는 자유주의자 이승만이 하지 않던 일이었다바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었다거기다 박정희는 일제시절에는 만주육사에서 소위로 지냈던 친일경력이 있었고해방 후에는 남로당 경력도 있었으며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도 세웠었다.

 

현재 이승만 세력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박정희는 이승만을 매우 싫어했었다그는 이승만을 부패한 권력자 혹은 독재자로 생각했으며그는 18년이라는 세월을 대통령으로 지내면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었다그가 이승만을 대신해서 국가적으로 높게 평가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바로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였다거기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은 5.16 쿠데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고그 또한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어 했다이승만을 싫어했던 박정희는 그 대안으로 백범 김구를 민족영웅 혹은 독립영웅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높게 평가했다또한 이승만이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틈을 타 귀국하려고 하자이를 막은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다즉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의사를 수차례 거부했다.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 이들은 5.16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더 나아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초기에 약속했던 공약과는 달리 독재정권을 유지했으며, 이승만 보다 더 긴 18년간 군림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싫어했지만이승만이 그렇게 강조하던 한가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바로 반공주의(Anti-Communism)’애초에 5.16 쿠데타를 할 시점부터 박정희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겠다고 명백히 입장을 밝혔었고과거 그의 남로당 경력을 의심했던 존F케네디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미국까지 갔었다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 시절의 반공주의를 사회적으로 더 체계화 시켰다박정희에게 있어서도 이승만식 반공주의는 사실상 정치생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962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찍은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하와이에 망명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한 이승만은 점차 늙어갔다. 1962년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하와이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고서서히 기력을 잃어갔다이승만은 반수(半睡상태로 몇 년을 살았다사실상 산 것도,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이다어쨌든 그는 하와이에 망명하여 거의 칩거하면서 살았다그가 반수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은 산삼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이승만이 병상에 누워있던 1964년 이승만이 매우 아끼고 좋아하던 인물이자 극단적 반공주의자 맥아더가 생을 마감했다맥아더가 사망한지 2달 후인 1964년 6월 말 이승만은 갑작스런 급성 위장 출혈로 쓰러졌다그는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의 헌신적 내조를 받았기에 비교적 건강했지만무엇보다 박정희가 귀국을 거절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즉 1964년 6월에 그가 쓰러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그는 결국 서서히 죽어갔다그러던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리니 요양원에서 사망했다그의 나의 90이었다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죽은 7월 19일은 사실상 그가 없애고자 했던 해방정국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괴한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던 날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장례식, 이승만의 귀국요청을 수차례 거부한 박정희는 그가 죽자 귀국을 허락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높게 평가한 것 처럼 얘기하며 그 근거로 장례식에서 박정희가 읽은 추도문을 예시로 들지만, 사실 그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표면적으로 공개석상에서 보인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2020년에 열린 이승만 추모제, 이승만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가 죽은지 55년이 지났음에도 그를 여전히 미국의 조지 워싱턴 마냥 건국의 아버지로 찬양하고 있는 중이다.)

 

이승만이 죽자 결국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마침내 허락했다이승만의 유해는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전 주한 미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마련한 특별기로 한국에 이송됐다특별기가 한국에 귀국하자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이승만은 4.19 민중혁명으로 한국에서 쫒겨난 대통령이었다그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지 않았고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귀국하려고 했다그는 미국유학시절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고전혀 반성하지 않았으며계속해서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그는 뻔뻔스럽게도 국민들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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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과 이기붕)

 

이승만 정부는 정치 분야에선 이승만 개인과 자유당 독재의 길로 가고 있었고경제는 무너져가고 있었다당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 경제원조로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미국의 경제원조는 1957년 3억 8,289만 3천 달러에서 1958년에는 3억 2,217만 2천 달러로 감축되었으며, 1959년에는 2억 2,220만 4천 달러로 거의 1억 달러 가까이 삭감됐다이렇게 미국의 원조가 감축되자 즉각적으로 한국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은 정치경쟁자 조봉암을 사법살인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또한 그는 여전히 건강한 편이었다.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승만은 1958년 12월 소위 보안법파동이라 하여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이것은 여순항쟁 이후 10년만에 새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사실상 자유당 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수단이었다이들은 통과시킨 국가보안법에는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이들이 제출한 새 국가보안법에는 1.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2.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3.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여기에는 정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을 가속화하려는 이승만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의 백남훈조병옥곽상훈장택상 등을 포함한 민주당과 무소속의원 95명은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물론 이승만의 자유당 측도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장택상을 회유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을 붕괴시키고자 했다자유당 정부는 신국가보안법 통과를 위해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00명을 임시 경위로 특채하고, 3일 동안 국회경위의 역할을 담당할 훈련을 시켰다이승만과 자유당의 목표는 오로지 ‘1960년의 재집권에 있었다이승만과 이기붕은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1959년 3월 가장 충직하다고 믿는 최인규를 내무장관으로 하고재무 송인상부흥 신현확농림 이근직교통 김일환을 각각 국무위원에 기용했다또한 그들은 신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 5일전 야당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의원만으로 3분만에 법사위에 상정한 것을 처리하는 변칙을 연출했다당연히 야당의원들은 이에 반대했고국회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이럴걸 예상하고 있던 이승만 세력은 훈련시킨 무술경관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지하실에 감금했다박순천김상돈허윤수김응주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이승만과 이기붕은 자유당 집권 연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비록 이승만과 자유당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법살인 했지만야당은 이승만 정권에 저항했다. 1959년 11월 26일 서울 시공관에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고대통령 후보에는 조병옥부통령 후보에는 장면이 선출됐다이들은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했다당연히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을 내세웠다하지만 민주당은 여기서 큰 타격을 받았다. 1956년 신익희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급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병옥 후보의 사망, 그의 죽음으로 다시한번 민주당에게 대통령 후보 없는 선거를 치르게 됐다.)

 

1959년 12월부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피로가 겹치며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결국 1960년 1월 29일 조병옥은 치료차 도미하게 됐다조병옥이 도미하자 자유당은 선거 시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할 것을 2월 3일에 전격 발표한다. 1960년 2월 조병옥은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다수술 후 경과도 매우 좋은 편이었고주미대사로 있던 양유찬이 문병을 와서 담소를 나눌 정도였다하지만 2월 15일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쾌유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버린 것이다그로부터 6일 뒤 조병옥은 김포공항에 무언의 환국을 했고운구행렬에는 시민들이 뒤따라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4년 전에 그랬듯이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없이 부통령 후보만으로 선거를 치르게 됐다다시한번 고통을 겪게 된 장면은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에 1/3의 표를 주지 말고 재선거를 실시하자라고 하며 유권자에게 호소했다이런 상황속에서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를 위해 온갖 음모와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바로 부정선거였다.

 

1960년 2월 하순 이승만 정부는 내무장관 최인규의 이름으로 선거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국 시장·군수·경찰서장에게 내렸다지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연기권표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한 표 중 합계 유권자 4할에 해당하게 하는 표를 사전에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기표하였다가 투표개시 (오전 7전에 무더기로 투표함에 투입할 것. (소위 4할 사전투표)

 

2.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하는 유권자로서 3인조 또는 9인조를 편성하여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선거위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투입토록 할 것. (소위 3인조 또는 9인조 공개투표)

 

3. 자유당 유권자로 하여금 자유당 완장을 착용하고 투표케 함으로써 투표소 부근 일대의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화하여 야당 측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토록 한다.

 

4.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 못하게 하거나그것이 불여의할 경우에는 변기를 투표소 내에 가지고 왔다는 등 구실로 시비를 걸어서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3.15 부정선거 개표)

 

이 지령문은 1960년 3월 3일 민주당에 의해 폭로되었지만정부와 여당은 이것을 오히려 야당의 날조라 공격했고그들에게 충성하는 어용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3월 15일 투표가 실시됐다예정대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자유당의 부정선거의 핵심은 4할 사전투표로 3인조1·5인조·9인조의 공개투표를 통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를 사전에 달성한다는 것이었다당연히 이들은 부정선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들을 매수해 퇴장시키도록 했다따라서 3.15선거는 자유당의 사전계획대로 철저한 부정선거로 이루어졌다중앙선관위의 선거결과 발표에 따르면 전국의 유권자 1,119만 6,498명 중 1,050만 9,48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63만 3,376표로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부통령에는 833만 7,059표를 얻은 이기붕이 당선되었다장면은 184만 4,257김준연은 24만 5,526임영신은 9만 9,090표였다즉 이승만은 전체 유권자의 92%를 이기붕은 78%를 득표한 셈이다.

(부정선거 이후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3.15 부정선거가 있자 많은 시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마산 시위는 민중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분노한 이들은 저항하기 시작했고가장 용기있게 떨치고 일어선 사람은 바로 경남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었다마산시민들과 용기있는 학생들은 부정선거 날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학생과 시민들이 시윌르 벌이자 경찰은 투석전을 벌인 끝에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만들었다이러자 격분한 시민들은 남성동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했다이 과정에서 시민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전라도 광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12시 50분경 광주 민주당원 50여 명은 <()! 민주주의 장송>이라고 쓴 만장을 선두로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곡성을 외치며 금남로 4가에서 광주지방법원 앞까지 시위하였다그러나 경찰에 저지당해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은 주모자로 26명을 구속했다경찰은 구숙안 이들을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용공분자나 좌익분자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내려 했다또한 정부는 이 마산시위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심지어 경찰은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인 전단을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들의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국민은 더 이상 참으려하지 않았다대통령의 담화나 경찰의 탄압에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3월 17일 진해고교생서울성남고교생전남여고생들이 데모를 벌였다이런데도 부정선거를 저지른 측은 파렴치하고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3월 18일 부통령 당선자로 공고된 이기붕은 마산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총은 쏘라고 (일부는 쓰라고로 들었다 함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다이기붕의 망언은 당연히 시위진압에 나선 일선 경찰들에게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3.15부정선거와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외신을 통해서도 보도됐다. <런던 타임스>(3월 15)는 <고교생도 반항적>이란 기사에서 대구고등학생들의 시위를 상세히 보도하고 <타임>(3월 21)은 <경찰 통제 하의 3인조 선거>, 같은 날짜 <뉴스위크>는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연극>, <워싱턴 포스트>(3월 16)는 <침묵에 잠겼던 한국의 젊은 세대 잠을 깨다>, <르몽드>(3월 18)는 사설 <심각한 투쟁양상>,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3월 16)는 사설 <이씨의 승리중대문제를 야기>, 같은 날짜 <뉴욕타임스>는 사설 <마산사건의 발생>, 은 <양당제도 파탄위기>, <워싱턴 포스트>(3월 17)는 사설 <더러운 승리>, <런던 타임스>(3월 17)는 사설 <차라리 가장(假裝)선거를>, <이코노미스트>(321)는 <이박사의 희미한 승리>, <뉴욕 타임즈>(3월 22)는 사설에서 <이박사의 후계자>문제를 각각 제기하였다.

(김주열 열사의 사체, 시위가 격해지자 경찰은 발포했고, 그로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주열 열사는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고 사망했다. 하지만 경찰측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의 사체를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했던 경찰간부는 바로 친일경찰이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상고생 김주열 학생의 사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함 모습으로 바다에서 떠올랐다참으로 기가막힌 사실은 학생 김주열에게 정면에서 최루탄을 쏴 죽인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일제 악질 경찰출신이다이를 지켜 본 시민들이 궐기했다분노한 시민들은 김주열 열사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혁명의 불길을 앞당겼다2마산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2명 사망, 14명 부상 등의 희생을 치루면서 며칠째 계속되었다정부는 4월 13일 마산의 적색분자를 조사를 한다며 군경의 대공 3부 합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마산에서 일대 검거 선풍을 벌였다이승만은 4월 15일 다시 마산사건은 공산당의 조종이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검찰은 2차 마산사건과 관련하여 시민학생 30명을 구속하고 2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학생들의 시위, 학생들의 시위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이 강해질수록 더 격렬해졌다. 심지어 중학생과 초등학생도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뻔뻔했다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학생들을 끝까지 공산당 조종이란 용공사건으로 몰아 위기의 국면을 벗어나고자 하였다이승만의 추종자들이 3.15 부정선거는 최인규 등 내각에서 저지른 것이고이승만은 몰랐다는 주장은그의 거듭된 용공담화’ 발표에서 거짓임이 확인된다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이에 항거한 마산 시민·학생 학살의 주범이다.

 

마산을 시작으로 번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서울에서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고특히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이 시위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4천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오후 1시 교내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스크럼을 짜고 안암교종로를 거쳐 9차례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저지선을 격파하여 오후 2시 15분 국회의사당(광화문 소재앞에 도착연좌시위에 들어갔다결집했던 고려대 학생들은 결국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여기서 문제가 또 터졌다청계천 4가에서 잠복해 있던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부삽·쇠갈귀·몽둥이·벽돌 등으로 마구 난타하여 학생 10여 명기자 3명 등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이 정치깡패는 반공청년단 소속으로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동대문 특별단부라는 조직폭력배들이었다여기에는 임화수유지광 등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현장,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고 있는 동대문파 깡패들은 고려대 학생을 폭행했다.)


(유지광, 유지광은 동대문파 깡패다. 그는 이정재, 임화수등과 더불어 4.18 고대생 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중 하나다.)

 

정치깡패의 고려대학생 폭행사건은 오히려 민중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다다음날인 4월 19일 여러 대학 학생들은 총궐기했다그날 고교생과 대학생을 비롯한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다서울대생 2천여 명이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체주의에 항거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출발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였다이와 함께 건대생 1,500동국대생 1천 여 명서울사대생 1,500여 명동성고등학생 1천여 명서울의대약대생 1,600여 명성균관대생 1,500여 명고대생 2천여 명연대생 4천여 명경희대생 1천여 명경기대서울음대생 2백여 명단국대국학대한양대서라벌예대성심여대홍익대강문중고생흥국중고생대광중고생 등 도합 10만 여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밀려왔던 것이다시위대중 일부는 경무대로 향했고또 다른 일부는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다른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의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 시위를 벌였다.

(곽영주, 곽영주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던 경찰 간부다. 그는 4.19 혁명 당시 경무대로 몰려온 시민과 학생에게 발포했다. 그 결과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무대 앞에서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은 곽영주가 경찰에게 발포를 명령하여 무차별 총격이 시민들에게 가해졌다이날 하룻동안 서울시내 곳곳에서 수 차례 시위대와 경찰의 접전이 이루어지고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학생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업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단말마적인 경찰은 최루탄실탄기관포를 가리지 않고 난사하여 사상자가 더욱 늘어났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의 사망자와 6,2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즉 많은 이들이 경찰의 발포로 이날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경무대에서 후퇴하는 경찰병력)

 

여기서도 이승만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그는 4월 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국무원 공고 83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16시 30분 부산·대구·광주·대전 지구에도 계엄을 선포하여언론을 사전 검열하고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을 금지시켰다이승만은 시위를 진압하고 싶어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임명한 송요찬 중장은 시위 진압을 거부했고오히려 시민들 편에 섰다결국 4월 21일 내각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2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밝혔다이어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며 부통령직을 사퇴했다여기서 민중들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6일 후인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이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시위를 감행했고시가를 행진했다교수단의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켰고다음날인 26일에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키면서 이승만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매카나기 대사, 주한미국대사인 매카나기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이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사퇴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바로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가 미국의 뜻을 전달했는데거기에는 이승만이 물러나길 바라는 미국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즉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이기붕 일가도 끝이나 버렸다이승만의 양자였던 아들 이강석은 권총으로 가족을 쏴죽인 뒤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승만 하야소식을 보도한 신문기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1960년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은 12년이라는 기간 동안 독재자로써 군림했다.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권력욕은 민중혁명으로 막을 내렸다일각에서는 이승만이 마치 민중을 생각해서 하야한 것처럼 얘기한다그러나 이 시리즈를 다루면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는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광적인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이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겐 그러한 양심따위는 전혀 없었다그는 그 시점에서 노욕만 있었을 뿐이다. 3.15 부정 선거 이후 민중혁명 과정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전형적인 독재 권력자의 모습이었다단지 미국이 물러나라 해서 물러났을 뿐그가 물러난 이후 그의 지원자였던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이기붕 일가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다시 한국을 떠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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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어떻게 악마가 되었나
[인문견문록] 마리오 소사의 <진실이 밝혀지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책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을 읽고 지금은 없어진 ‘소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구마 에이지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수용소에서 가게 된다. 책은 그의 수용소 시절과 전후 일본에 관한 내용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본군에 비친 소련군의 ‘자유스러움‘이었다. 오구마 겐지는 서슴없이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라고 기억한다. 그의 말이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력집단인 군대의 폭력 수준은 한 사회에서 용인되는 폭력의 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추정치가 된다. 소련군은 포로가 보기에도 매우 자유스럽고 평등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정작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일본군 포로 내부에서 작업량, 식량 배분 등도 지위에 따라 차별받았다. 소련 군인끼리의 평등함을 동경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민주운동을 진행했다. 일본군 내부에서의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조직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이들의 운동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으로 무려 2700만 명의 희생을 치른 직후였다. 이 전쟁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이토록 열악한 시기의 소련에서 게다가 가장 폭력에 친숙한 군대라는 조직이 민주적이고 평등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개인의 성격은 사회의 성격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조직은 사회의 축소판이고 개인은 조직에서 사회화된다. 필자가 알고 있던 소련은 스탈린주의에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지옥이었다. 오구마 겐지가 경험한 소련은 달랐다. 궁금했다. 그래서 마리오 소사(Mario Sousa)의 <진실이 밝혀지다>(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노사과연 펴냄)를 펼쳤다.

저자 마리오 소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포르투갈에서 1949년에 태어난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반식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포르투갈 정부는 독립전쟁 진압을 위해 대규모 징집을 시작한다. 식민주의를 반대하던 마리오 소사는 탈영한 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한다. 스웨덴에서는 버스 노동자로 일하며 급진적 정치운동에 참여해왔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다 보면 꼭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말고 대안은 뭔데? 소련 망한 것 봤잖아.˝ 소련은 보수적인 사람에게도 진보적인 사람에게도 지옥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우리가 아는 스탈린주의 지옥은 실제 소련이 아니라 CIA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버스 노동자(정확하게는 ‘정치 활동가‘)의 말이라 무시할까봐 말해두자면, 소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은 소사 말고도 뉴욕주립대 역사학 교수이자 <배반당한 사회주의(socialism betrayed)>의 저자 로저 키란(Roser Keeran), 몽클레어주립대 교수이자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의 저자 그로버 퍼(Grover Furr) 등이 있다. 이들의 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쏘련(책에서 고유명사는 원음에 가까운 발음으로 사용된다. 필자 주)의 노동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살인과 의문의 죽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못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수백만의 반대파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략) 그렇지만 대체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숫자들의 출처는 누구일까?˝ 우리들은 소련에서 수백만, 수천만이 살해된 것을 당연한 사실이라고 알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이런 이야기들이 특정한 세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반박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사가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소련이 악마화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했다. 나치는 정권을 잡은 뒤 의회 화재 사건을 조작해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의 48%를 확보한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진보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독일은 또한 재무장에 돌입한다. 이때 독일 지도부는 대(大) 독일(greater Germany) 국민생활권이라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현재의 독일보다 훨씬 큰 독일을 건설하려는 욕심이었다. 대독일의 핵심 지역의 하나가 우크라이나였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통합해 독일의 곡물 기지로 변모시킬 야심에 들떠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34년 선전장관 괴벨스는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 선전을 시작했다. 별다른 증거도 없었기에 성과도 미미했다. 그들은 이내 외부에서 도움을 구했다. 외부 그것도 최강국 미국에서 협조자를 찾게 된다.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황색저널리즘을 마케팅전략으로 이용해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등을 소유하게 된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허스트가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는 미국에서만 4000만 명에 달했다. 미국 성인의 3분의 1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1934년 극렬한 보수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독일로 가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독일로부터 받은 뉴스기사는 소련에서의 대량학살, 살육 등으로 채워진 기사들 일색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괴담이 우크라이나 괴담이었다. 1935년 2월 18일 <시카고 아메리칸(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로 소련에서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허스트는 독일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자신의 언론 제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뜨린다.

마리오 소사가 말하는 기근의 진실은 무엇인가? 나치와 허스트의 언론은 볼셰비키의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소사는 사실상 계급투쟁이었다고 전한다. 1929년 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부를 독점하고 인구의 10%에 불과했던 농촌의 부농 쿨라크와의 마찰을 촉발했다.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을 빈농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내기 전에도 기근은 주기적으로 왔었다. 소사의 설명이다. ˝직간접적으로 1억 2000만 명의 농민들이 연관된 이 거대한 계급투쟁은 농업생산 불안정을 야기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식량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의 면역체계는 유약해졌고 전염병과 유행병에 걸려 죽을 확률도 높아졌다.˝ 빈농들을 구제하기 위해 농업집단화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마찰도 있었고 기근도 있었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스페인독감으로 죽어간 유럽인만 2000만 명에 이른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기까지 전염병 앞에서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련은 지속적으로 서구의 심리전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사와 그로버 퍼는 볼셰비키가 그런 희생을 의도적으로 전개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마오쩌둥의 정책 때문에 30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는 선동이 언론지상에 오르내린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는 약 1억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다. 아무도 인도인 희생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도 자본주의에는 희생자가 사라지고 중국 사회주의에만 희생자로 넘친다. 허스트 계열의 언론은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아사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이었다고 지속적으로 선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의 약발이 압도적이진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한 신화를 다시 퍼뜨린 것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였다. 소련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던 레이건 시기 콘퀘스트는 <서글픈 추수(Harvest of Sorrow)>라는 이름의 책을 펴낸다. 콘퀘스트는 어떤 사람이었나? 영국 정론지 <가디언(The Guardian)>이 폭로한 그는 영국 정보국의 정보조작부서인 IRD(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의 전 기관원이었다. 이 부서의 임무는 진보진영과 관련한 조작된 흑색선전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부서는 1977년 극우파와의 협력이 문제돼 해체될 때까지 수많은 언론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정보를 전달했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은 1942년 유대인학살에 앞장섰던 우크라이나 극우 전쟁범죄자들이었다.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미국 정보부와 협력했던 언론인, 학자들 덕분에 이런 프로파간다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꾸 접하다 보면 사실로 착각하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드디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庫)를 개방했다. 소련을 비난해왔던 사람들은 비밀문서고가 열릴 날만을 기다렸다.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문서고가 개방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서구의 선전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젬스꼬프(Zemskov)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진행한 연구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9000쪽에 달하는 그의 연구보고서가 1990년 나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반(反)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개,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다.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 정치범의 수는 콘퀘스트의 주장과 달리 45만 400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37~1939년 사이에 죽은 인원도 300만 명이 아니라 16만명이었다.

아마 여기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래요. 정보 조작한 사람들이 엄청 과장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45만 명의 정치범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잖아요?˝ 우리는 이 숫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의 판단은 덧붙이지 않고, 일단 마리오 소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우리는 쏘련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 쏘련의 인구는 거의 1억6000만~1억7000만 명이었다. 30년대는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힘겨운 시기였다. 독일의 나찌즘,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자본주의국가. 필자 주)들은 쏘련에게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힘겨운 시기 동안, 쏘련에서 형벌체계 하에 있었던 사람은 최고 250만 명이었다. 이는 대략 성인 인구의 2.4%였다.˝ 감이 안 잡힐 수 있기에 한국의 예를 들자면 교정시설 수용인원 총수는 2017년 현재 5만 7000명, 보호관찰 대상자 수는 2017년 현재 10만 5000명이다. 인구 대비 대략 0.3%가 된다.

소사의 글에는 당시 소련 인민들이 가졌을 긴장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좌파 이론가인 채만수의 논문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노동사회과학> 제7호, 2014)의 일부 글을 인용해본다. ˝당시 나찌 독일의 대대적인 전쟁 도발, 따라서 쏘련 침략은 누가 보기에도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독일과 쏘련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전쟁, 즉 피차가 모두 그 흥망 자체를 걸어야하는 전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면서도 그 전쟁을 늦추며 시간을 벌기 위해서 1938년 9월 뮌헨협정을 통해서 체코를 진상하면서까지 쏘련을 침략하라고 히틀러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독점자본들 역시 사회주의 쏘련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궤멸시키도록 히틀러를 부추기며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 된 당시의 정세였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 교정시설 내부의 인권은 어떨까? 2005년 8월 19일 자 <시사저널>에 실린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교도소 수형자의 인권을 개선시키자는 여론은 미국에서 거의 없다. 오히려 이런 열악한 인권을 소재로 삼아서 <프리즌 브레이크>(2005년 8월~2017 5월까지 FOX에서 방영)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2017년 3월 시작해 현재 시즌 6 방영 중. 넷플릭스 제작)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미국 교도소의 수형자는 범죄자이지만 소련의 노동수용소인 굴라그(Gulag)에 있던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니지 않은가? 일단 공개된 문서고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 범죄를 저지른 죄수다. 게다가 당시 소련 인민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러시아 연구자인 서울 과학기술대 김남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의 논문 ‘굴라그 귀환자들과 흐루쇼프 하의 소련 사회‘(<러시아연구> 25권 1호, 2015)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흐루시초프의 소련은 스탈린이 사망한 3주 후 굴라그 죄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한다. 그 수는 무려 120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하면 방면된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넘칠 것 같았지만, 넘쳤던 것은 인민들로부터의 냉대였다. 당시 소련 인민들은 귀환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편지를 소련당국에 보내었다.

노동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수적 변화도 극적이다. 1934년 5.2%에서 1953년 0.3%로 크게 낮아졌다.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은 항상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사실과 사회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사망률이 매우 낮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량의 경우는 어떨까? 1939년을 보면 5년 미만의 형 95.9%, 5~10년의 형 4%, 10년 이상의 형이 1%로 나타난다. 무한정 긴 징역형이라는 괴담은 소련에 대한 심리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에는 이것 말고도 우리가 막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조작된 정보였음을 말해준다.

고전에 대한 서평을 주로 올리다가 뜬금없이 소련을 둘러싼 프로파간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이유는 필자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다. 필자의 목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급진 사상을 지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된 신념체계, 허구적 사실에 기초한 문화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사실이 아닌 믿음의 덩어리다. 마르크스, 알튀세 이래 이데올로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상가는 지젝이다.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논문 ‘지젝의 사회정의론에서 바라본 바울 이해‘(<신약논단> 제2권 제2호, 2017)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환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산물, 곧 언어를 통해 매개된 하나의 상징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마치 그것이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지젝은 이런 환상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환상 가로지르기라 부른다. 자본주의와 같이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체계로부터의 동력차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련을 악마로 만들면 사회 개혁세력을 악마의 동조자로 몰아갈 수가 있다.

격심한 빈부격차를 반복하던 북·서유럽은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미국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언어로 구축되는 질서인 담론과 상징계에서 사회주의를 지워버렸다.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수단이 정보기관을 통한 소련에 대한 프로파간다였다. 부족한 사회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개혁을 회피한다. 사회주의 소련과 바로 인접했기에 악마화(demonization)가 잘 먹히지 않았던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온건한 복지국가로 나아갔다. 대신 미국은 극단적 불평등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기득권은 외부의 적을 설정한다. 외부의 악마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사고 회로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사회개혁 세력은 늘 외부의 악마와 비교당해야 한다. 외부의 악마를 설정하면 정작 피해를 보는 것은 개혁이 힘들어지는 우리 사회다. 미국 사회의 거대한 불평등이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바로 이것이다.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출처: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45981?no=245981&fbclid=IwAR08N-7VgxFDgK5kbVDjnlzt6cKBCXd1qz1TgYk0d-vEDu7h30mfP8XbIZY#08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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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체제 그리고 조봉암 사법살인

(민주당,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됐다. 현재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하면서까지 권력욕을 꺾지 않았던 이승만은 1954년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전대미문의 수학공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등 독재정치를 일삼았다나이가 80이 다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을 그칠 줄을 몰랐다. 1951년 이승만이 주도하여 창당된 자유당은 사실상 이승만을 위한 당이었다특히나 한국전쟁 기간부터 갈등을 하게 된 정치세력들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시작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는데그것이 바로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되었다신익희조병옥장면윤보선이철승박순천유진산 등이 민주당에서 활동했다또한 사사오입 개헌 당시 개헌에 반대했던 자유당 인사들도 떨어져 나오면서 민주당에 합류하기도 했다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대다수가 해방 이후 우익으로써 이승만 편에 서서 소위 좌익반대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거기다 조병옥은 이승만 악행사 민간인 학살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8년 제주 4.3 항쟁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이들의 반공의식은 이승만 못지않게 강경했지만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승만이 개인적인 권력욕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갈라지자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족벌정치와 독재정치를 실행하기 시작했다그는 충직한 비서출신 이기붕에게 자유당을 맡겼고초대 대통령 중임제를 철폐하는 개헌안을 관철시킴으로써 영구집권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었다당연히 여기서 이승만은 과거에도 항상 그랬듯이 비판세력에게는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의 개념을 내세워 빨갱이(Commie)’ 딱지를 붙였다한국전쟁 이후에도 이승만은 반공정서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그는 1954년 7월 28일 그는 미국 상하의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연설을 했다그의 연설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물론이고 소련과의 전쟁까지도 지체없이 벌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 반공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1950년대 판자촌, 이승만 정부 시절은 참으로 가난한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와 친일파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무능은 최악의 경제체제로 이끌었다. 이때분에 민중의 생활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대찌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는 사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먹다 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을 한국사람들이 한국화해서 먹으면서 생긴 음식으로, 가난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이다.)

 

이승만이 이끄는 반공국가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경제가 참으로 피폐했다휴전 협정 이후 대한민국의 GNP 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1953년 당시 GNP 성장률이 25.7%였지만 1954년에는 5.2%, 1955년은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까지 떨어졌다인플레이션도 매우 심각했다휴전 이후 4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은 26.4%, 51%, 42.9%, 37.8%였다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던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라고 했지만자유주의와 반공주의를 신봉하던 이승만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것이기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렇게 원하는 이승만식 자본주의는 사실 그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현재 한국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복지제도의 전면적 철폐에 가까운 어리석은 논리다따라서 현재 전세계적 펜데믹 COVID-19의 무상진료도 이승만의 논리대로라면 자비로 치료받아야 한다즉 뉴라이트들은 이 정도의 상식도 없는 맹신적 자본주의자들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민중의 생활은 참으로 가난했다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이 먹다 벌인 음식 즉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우는 한국인들이 부지기수였고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이들이 미군이 먹다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였다한국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일 때 자유당을 비롯한 친일파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었다대표적으로 이승만에게 자신의 아들을 이강석을 양아들로 넘겼던 이기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1960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기붕 소유와 그의 아내 박마리아 소유의 건물과 땅주식재산 등은 상상을 초월했다이기붕 일가에 비하면 이승만은 양호한 편이었다다른 관료들 또한 이들 못지않는 부정부패와 재산축적을 일삼았다.

(이승만 동상, 이 동상은 이승만 생일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무려 24m나 된다. 이승만은 전 사회적 영역에서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실행했다.)

 

이승만 개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숭배가 있었다이승만 80회 생일을 기념하며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됐다. 59년 10월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 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서울 뚝섬에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송덕관우남회관우남정등의 건물이 건축됐고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중앙대학교 도서관은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심지어 서울시를 우남시로 변경하려는 시도도 있었을 정도였다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찬양가를 지어 배포했는데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 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리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기리기리 빛나오리라.

오늘은 리대통령 탄생하신 날.

꽃피고 새노래하는 좋은 시절.

우리들의 리대통령 만수무강을.

온겨레가 다같이 비옵나이다.

우리들을 리대통령 뜻을 받드러.

자유평화 올 때까지 멸공전선에.

몸과 맘을 다 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몸과 맘을 다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반공청년단 관련 기사, 반공청년단은 이승만을 맹신적으로 따르는 단체였다. 그들은 이승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이승만 정귄 시기 각종 어용 조직 단체가 활기쳤다이승만은 반공청년단’, ‘상이군경회’, ‘서북청년단’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을 압력단체로 이용하였고이들 압력단체들은 여당 기간단체 내지는 산하 단체로서 애초부터 정부권력 및 정당의 뒷받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이승만은 1957년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본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미국에서 사망하고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출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물론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이후 1957년 신학기를 맞아 서울법과대학에 부정 입학시킨 것이 탄로가 났었다.

(이승만 일가,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유당 독재 국가로 이끌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와 제4대 부통령 선거가 실행됐다집권당인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이 이기붕을 러닝메이트로 하고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내세웠다또한 혁신계의 진보당은 전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1956년 선거 당시 민주당은 불행을 겪었다이승만에 대적하기 위해 자신들이 내세웠던 후보 신익희가 열차에서 심장병으로 급사했기 때문이다그것도 투표일 10일을 앞둔 사망이었다투표 당시 이승만을 따르는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획책했지만개표결과 이승만 504만 6,437조봉암 216만 3,808신익희 추모표 185만 표가 나왔다이승만 득표율 80%라는 예측은 완전히 빚나갔다그리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401만 2,654표로 380만 5,502표인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됐다사실상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패배한 셈이다.

(조병옥, 해방 이후 반공노선으로 가며 이승만과 함께 했던 조병옥은 한국전쟁을 이후 이승만과 대립했다. 그 결과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반이승만 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반대세력들에게 탄압과 공작을 일삼았다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부통령 장면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56년 9월 28일 오후 2시 30분 이승만과 자유당 측이 고용한 암살범이 명동 시공관에서 장면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하지만 이 사건은 살인미수에 그쳤다저격사건의 범인은 자유당 정책위원이자 이기붕의 측근 임홍순의 조종을 받는 하수인 김상봉이었다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찰에 넘겨졌다권총을 발사했던 김상봉은 권총 발사 이후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범행을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는 치졸한 연극을 연출했다물론 이것은 사전이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이정재, 이정재는 자유당의 끄나풀로 소위 동대문파를 이끌었다. 그는 한때 김두한 밑에 있던 조직 폭력배였으나, 1950년대 동대문파를 이끄는 조직 폭력배 두목으로 성장했다. 결국 그는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 의해 처형된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이승만은 반공청년단과 같은 여러 청년 단체와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을 좋아했다대표적으로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들 수 있다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임화수유지관 등 동대문파 정채깡패들은 1957년 5월 25일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시국강연회를 방해하는 사건을 벌였으며당연히 이것은 이승만과 자유당 세력이 의도한 것이었다.

(경향신문 폐간 관련 기사, 이승만 정부는 1958년 경향신문을 폐간조치했다.)

 

언론탄압도 심했다. 1958년 1월 27일 서울시경은 만화작각 김성환을 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신문사에는 허위사실을 게재했다는 혐의로작가를 즉결 심판에 회부하여 과태료 450환에 처했다이른바 <고바우 만화필화사건이다당시 정부 정책에 비판적 성향을 보이는 언론사는 대표적으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이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을 지속적으로 쓰자이승만은 그 신문사를 폐간시켰다결국 경향신문은 4.19 혁명 이후에 복간될 수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이승만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모든 분야에서 이승만이 강조됐다부정부패한 관료들은 이승만에게 아부떨기 바빴고이승만과 자유당은 영구집권을 위한 시도들을 정치적으로 해나갔다반공교육은 전사회적으로 실행됐다. 1958년 1월 12일과 15일 조봉암을 포함한 진보당 인사들을 검찰이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이승만 정부가 조봉암을 구속한 죄명은 이른바 간첩죄였다.

(죽산 조봉암,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일제시절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에서 유학했던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지만, 박헌영과의 노선갈등으로 탈당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됐고, 간첩죄로 구속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대중적인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일제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가 해방 이후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남로당을 탈당한 조봉암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써 유상매수 유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인물이었다그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며이승만과 갈등하게 됐고이승만의 정치적 경쟁자로 등극했다특히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이승만에게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거기다 조봉암은 이승만과는 달리경제적 평등을 추구했다경제적 분야에서의 개혁을 추구했던 조봉암은 통일론에서도 이승만과 달랐다그 또한 반북주의가 있었지만이승만과는 달리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1948년 이후부터 계속 구호에만 그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던 이승만하고는 달랐다.

 

이승만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고 싶었다그래서 그는 조봉암과 진보당을 간첩죄로 몰아 체포했다이렇게 구속된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1958년 7월 2일 1심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하지만 이승만을 지지하는 반공세력들은 판결 뒤 청년들을 동원하여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라며 난동을 부렸다결국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았고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사형선고를 받은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 조봉암 무죄 선고, 죽산 조봉암은 사형선고 52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판결받으면서 명예가 회복됐다.)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음모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는 등 사건조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들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봉암 집에 있는 서재에서 마르크스 관련 책이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았다또한 그가 주장하던 평화통일론을 빨갱이 사상이라며 폄하하기 바빴다조봉암 간첩 누명은 사형집행 52년 만인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무고함이 확인됐다당시 조봉암이 구속되자 아이러니 하게도 이승만 반대편에 있으며한때 자유당과 같이 진보당을 좌익으로 몰았던 조병옥이나 장택상 등이 그를 변호하기도 했었다즉 이것만 보더라도 조봉암은 애초부터 간첩이 아니었고이승만 정권의 억울한 희생자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장면 암살을 시도하고반공청년단이나 이정재의 동대문파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했으며자유당과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도 마다하지 않았다북진통일론을 끝까지 주장했으며 북한과의 적대적인 노선 추구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하고 전쟁을 해야 한다며 세계적인 반공투사를 자임했다즉 이승만은 외교적으로도 반공을 주장했던 것이다. 195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나세르 정권이 국유화한 수에즈 운하를 폭격하자, “우방 영국과 프랑스를 위해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망발을 했었다그의 집권 기간 동안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민중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미국이 경제개발을 요구해도 뼈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사법살인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조봉암 사법살인에서 알 수 있듯이당시 한국 사회는 약간이라도 진보적인 주장을 하면 사법살인이 가능한 반공독재국가였다반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얼마든지 공권력을 동원해 처벌할 수 있었고이승만은 이를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악용했다죽산 조봉암이 사법살인 당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막장을 향해 더욱 질주하고 있었다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플레이션과 경제구조는 무너질 상황이었고간신히 미국의 원조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그러던 중 이승만 정부를 끝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그게 바로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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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2024-02-04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1공화국 시절에는 물자가 하도 모자라서, 화장실에서 대변을 닦은 휴지도 재활용을 해서 그걸로 책을 만들었는데 재활용 기술도 형편없어서 대변 처리도 제대로 안 되어 대변에 포함된 고춧가루 같은 물질이 그대로 묻은 재생지로 이루어진 책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가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의 1950년대 편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NamGiKim 2024-02-04 23:25   좋아요 0 | URL
워낙 가난한 나라니 가능성 있죠. 거기다 전쟁으로 인프라 다 파괴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