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어떻게 악마가 되었나
[인문견문록] 마리오 소사의 <진실이 밝혀지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책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을 읽고 지금은 없어진 ‘소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구마 에이지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수용소에서 가게 된다. 책은 그의 수용소 시절과 전후 일본에 관한 내용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본군에 비친 소련군의 ‘자유스러움‘이었다. 오구마 겐지는 서슴없이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라고 기억한다. 그의 말이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력집단인 군대의 폭력 수준은 한 사회에서 용인되는 폭력의 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추정치가 된다. 소련군은 포로가 보기에도 매우 자유스럽고 평등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정작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일본군 포로 내부에서 작업량, 식량 배분 등도 지위에 따라 차별받았다. 소련 군인끼리의 평등함을 동경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민주운동을 진행했다. 일본군 내부에서의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조직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이들의 운동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으로 무려 2700만 명의 희생을 치른 직후였다. 이 전쟁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이토록 열악한 시기의 소련에서 게다가 가장 폭력에 친숙한 군대라는 조직이 민주적이고 평등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개인의 성격은 사회의 성격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조직은 사회의 축소판이고 개인은 조직에서 사회화된다. 필자가 알고 있던 소련은 스탈린주의에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지옥이었다. 오구마 겐지가 경험한 소련은 달랐다. 궁금했다. 그래서 마리오 소사(Mario Sousa)의 <진실이 밝혀지다>(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노사과연 펴냄)를 펼쳤다.

저자 마리오 소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포르투갈에서 1949년에 태어난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반식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포르투갈 정부는 독립전쟁 진압을 위해 대규모 징집을 시작한다. 식민주의를 반대하던 마리오 소사는 탈영한 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한다. 스웨덴에서는 버스 노동자로 일하며 급진적 정치운동에 참여해왔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다 보면 꼭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말고 대안은 뭔데? 소련 망한 것 봤잖아.˝ 소련은 보수적인 사람에게도 진보적인 사람에게도 지옥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우리가 아는 스탈린주의 지옥은 실제 소련이 아니라 CIA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버스 노동자(정확하게는 ‘정치 활동가‘)의 말이라 무시할까봐 말해두자면, 소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은 소사 말고도 뉴욕주립대 역사학 교수이자 <배반당한 사회주의(socialism betrayed)>의 저자 로저 키란(Roser Keeran), 몽클레어주립대 교수이자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의 저자 그로버 퍼(Grover Furr) 등이 있다. 이들의 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쏘련(책에서 고유명사는 원음에 가까운 발음으로 사용된다. 필자 주)의 노동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살인과 의문의 죽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못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수백만의 반대파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략) 그렇지만 대체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숫자들의 출처는 누구일까?˝ 우리들은 소련에서 수백만, 수천만이 살해된 것을 당연한 사실이라고 알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이런 이야기들이 특정한 세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반박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사가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소련이 악마화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했다. 나치는 정권을 잡은 뒤 의회 화재 사건을 조작해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의 48%를 확보한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진보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독일은 또한 재무장에 돌입한다. 이때 독일 지도부는 대(大) 독일(greater Germany) 국민생활권이라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현재의 독일보다 훨씬 큰 독일을 건설하려는 욕심이었다. 대독일의 핵심 지역의 하나가 우크라이나였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통합해 독일의 곡물 기지로 변모시킬 야심에 들떠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34년 선전장관 괴벨스는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 선전을 시작했다. 별다른 증거도 없었기에 성과도 미미했다. 그들은 이내 외부에서 도움을 구했다. 외부 그것도 최강국 미국에서 협조자를 찾게 된다.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황색저널리즘을 마케팅전략으로 이용해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등을 소유하게 된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허스트가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는 미국에서만 4000만 명에 달했다. 미국 성인의 3분의 1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1934년 극렬한 보수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독일로 가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독일로부터 받은 뉴스기사는 소련에서의 대량학살, 살육 등으로 채워진 기사들 일색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괴담이 우크라이나 괴담이었다. 1935년 2월 18일 <시카고 아메리칸(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로 소련에서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허스트는 독일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자신의 언론 제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뜨린다.

마리오 소사가 말하는 기근의 진실은 무엇인가? 나치와 허스트의 언론은 볼셰비키의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소사는 사실상 계급투쟁이었다고 전한다. 1929년 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부를 독점하고 인구의 10%에 불과했던 농촌의 부농 쿨라크와의 마찰을 촉발했다.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을 빈농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내기 전에도 기근은 주기적으로 왔었다. 소사의 설명이다. ˝직간접적으로 1억 2000만 명의 농민들이 연관된 이 거대한 계급투쟁은 농업생산 불안정을 야기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식량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의 면역체계는 유약해졌고 전염병과 유행병에 걸려 죽을 확률도 높아졌다.˝ 빈농들을 구제하기 위해 농업집단화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마찰도 있었고 기근도 있었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스페인독감으로 죽어간 유럽인만 2000만 명에 이른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기까지 전염병 앞에서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련은 지속적으로 서구의 심리전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사와 그로버 퍼는 볼셰비키가 그런 희생을 의도적으로 전개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마오쩌둥의 정책 때문에 30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는 선동이 언론지상에 오르내린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는 약 1억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다. 아무도 인도인 희생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도 자본주의에는 희생자가 사라지고 중국 사회주의에만 희생자로 넘친다. 허스트 계열의 언론은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아사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이었다고 지속적으로 선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의 약발이 압도적이진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한 신화를 다시 퍼뜨린 것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였다. 소련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던 레이건 시기 콘퀘스트는 <서글픈 추수(Harvest of Sorrow)>라는 이름의 책을 펴낸다. 콘퀘스트는 어떤 사람이었나? 영국 정론지 <가디언(The Guardian)>이 폭로한 그는 영국 정보국의 정보조작부서인 IRD(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의 전 기관원이었다. 이 부서의 임무는 진보진영과 관련한 조작된 흑색선전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부서는 1977년 극우파와의 협력이 문제돼 해체될 때까지 수많은 언론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정보를 전달했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은 1942년 유대인학살에 앞장섰던 우크라이나 극우 전쟁범죄자들이었다.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미국 정보부와 협력했던 언론인, 학자들 덕분에 이런 프로파간다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꾸 접하다 보면 사실로 착각하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드디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庫)를 개방했다. 소련을 비난해왔던 사람들은 비밀문서고가 열릴 날만을 기다렸다.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문서고가 개방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서구의 선전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젬스꼬프(Zemskov)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진행한 연구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9000쪽에 달하는 그의 연구보고서가 1990년 나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반(反)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개,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다.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 정치범의 수는 콘퀘스트의 주장과 달리 45만 400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37~1939년 사이에 죽은 인원도 300만 명이 아니라 16만명이었다.

아마 여기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래요. 정보 조작한 사람들이 엄청 과장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45만 명의 정치범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잖아요?˝ 우리는 이 숫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의 판단은 덧붙이지 않고, 일단 마리오 소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우리는 쏘련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 쏘련의 인구는 거의 1억6000만~1억7000만 명이었다. 30년대는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힘겨운 시기였다. 독일의 나찌즘,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자본주의국가. 필자 주)들은 쏘련에게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힘겨운 시기 동안, 쏘련에서 형벌체계 하에 있었던 사람은 최고 250만 명이었다. 이는 대략 성인 인구의 2.4%였다.˝ 감이 안 잡힐 수 있기에 한국의 예를 들자면 교정시설 수용인원 총수는 2017년 현재 5만 7000명, 보호관찰 대상자 수는 2017년 현재 10만 5000명이다. 인구 대비 대략 0.3%가 된다.

소사의 글에는 당시 소련 인민들이 가졌을 긴장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좌파 이론가인 채만수의 논문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노동사회과학> 제7호, 2014)의 일부 글을 인용해본다. ˝당시 나찌 독일의 대대적인 전쟁 도발, 따라서 쏘련 침략은 누가 보기에도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독일과 쏘련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전쟁, 즉 피차가 모두 그 흥망 자체를 걸어야하는 전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면서도 그 전쟁을 늦추며 시간을 벌기 위해서 1938년 9월 뮌헨협정을 통해서 체코를 진상하면서까지 쏘련을 침략하라고 히틀러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독점자본들 역시 사회주의 쏘련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궤멸시키도록 히틀러를 부추기며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 된 당시의 정세였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 교정시설 내부의 인권은 어떨까? 2005년 8월 19일 자 <시사저널>에 실린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교도소 수형자의 인권을 개선시키자는 여론은 미국에서 거의 없다. 오히려 이런 열악한 인권을 소재로 삼아서 <프리즌 브레이크>(2005년 8월~2017 5월까지 FOX에서 방영)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2017년 3월 시작해 현재 시즌 6 방영 중. 넷플릭스 제작)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미국 교도소의 수형자는 범죄자이지만 소련의 노동수용소인 굴라그(Gulag)에 있던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니지 않은가? 일단 공개된 문서고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 범죄를 저지른 죄수다. 게다가 당시 소련 인민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러시아 연구자인 서울 과학기술대 김남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의 논문 ‘굴라그 귀환자들과 흐루쇼프 하의 소련 사회‘(<러시아연구> 25권 1호, 2015)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흐루시초프의 소련은 스탈린이 사망한 3주 후 굴라그 죄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한다. 그 수는 무려 120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하면 방면된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넘칠 것 같았지만, 넘쳤던 것은 인민들로부터의 냉대였다. 당시 소련 인민들은 귀환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편지를 소련당국에 보내었다.

노동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수적 변화도 극적이다. 1934년 5.2%에서 1953년 0.3%로 크게 낮아졌다.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은 항상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사실과 사회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사망률이 매우 낮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량의 경우는 어떨까? 1939년을 보면 5년 미만의 형 95.9%, 5~10년의 형 4%, 10년 이상의 형이 1%로 나타난다. 무한정 긴 징역형이라는 괴담은 소련에 대한 심리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에는 이것 말고도 우리가 막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조작된 정보였음을 말해준다.

고전에 대한 서평을 주로 올리다가 뜬금없이 소련을 둘러싼 프로파간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이유는 필자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다. 필자의 목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급진 사상을 지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된 신념체계, 허구적 사실에 기초한 문화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사실이 아닌 믿음의 덩어리다. 마르크스, 알튀세 이래 이데올로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상가는 지젝이다.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논문 ‘지젝의 사회정의론에서 바라본 바울 이해‘(<신약논단> 제2권 제2호, 2017)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환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산물, 곧 언어를 통해 매개된 하나의 상징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마치 그것이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지젝은 이런 환상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환상 가로지르기라 부른다. 자본주의와 같이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체계로부터의 동력차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련을 악마로 만들면 사회 개혁세력을 악마의 동조자로 몰아갈 수가 있다.

격심한 빈부격차를 반복하던 북·서유럽은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미국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언어로 구축되는 질서인 담론과 상징계에서 사회주의를 지워버렸다.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수단이 정보기관을 통한 소련에 대한 프로파간다였다. 부족한 사회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개혁을 회피한다. 사회주의 소련과 바로 인접했기에 악마화(demonization)가 잘 먹히지 않았던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온건한 복지국가로 나아갔다. 대신 미국은 극단적 불평등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기득권은 외부의 적을 설정한다. 외부의 악마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사고 회로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사회개혁 세력은 늘 외부의 악마와 비교당해야 한다. 외부의 악마를 설정하면 정작 피해를 보는 것은 개혁이 힘들어지는 우리 사회다. 미국 사회의 거대한 불평등이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바로 이것이다.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출처: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45981?no=245981&fbclid=IwAR08N-7VgxFDgK5kbVDjnlzt6cKBCXd1qz1TgYk0d-vEDu7h30mfP8XbIZY#08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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