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건국투쟁 -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7
박명수 지음 / 백년동안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박근혜가 국정교과서 책동을 벌이기 전 뉴라이트 출판사인 백년동안에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회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출판한 시리즈물 책이 있었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다. 필자는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시리즈들 중에 몇권을 읽어봤다. 순수히 비판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말이다. 그중 가장 처음에 읽은 책은 건국투쟁이라는 책이었고, 읽는 내내 깊은 빡침을 느꼈다. 건국투쟁은 19458.15해방 이후부터 19459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까지 약 20일간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송진우 세력이 과연 어떠한 세상을 이루고자 했는지를 다룬 책이다.

 

책의 저자인 박명수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합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박헌영 세력이 편입됨에 따라 좌경화 되었으며 우파세력은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책에서 지적하며, 송진우가 주도하여 만든 한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송진우 계열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가 지금현재 북한과 남한의 결정적인 차이를 불러왔다는 얘기다. 즉 북한은 인민민주주의라는 것을 택해서 자유도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국가가 됐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서 세계경재 10위권을 자랑하고 신앙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된 국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저자의 독단적인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저자의 주장이 사실과 무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여운형의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된 단체이고 건준의 행적이 과대 포장되었다고 얘기하였다. 물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계열이 대거 합류하고 송진우 세력이 건준가담을 거부하면서 건준이 좌경화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한국현대사 학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서중석 교수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가 저자의 주장대로 처음부터 무분별하게 좌경화 되었던 것은 아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전신인 건국동맹은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48월에 만들어진 건국동맹 시절부터 안재홍,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적극 가담하였고, 임정의 광복군과 일제의 패망을 대비할 계획을 세웠었으며, 좌우익이 연합한 단체였다. 이후 건국동맹은 19458월 일본 천황이 항복방송을 하기 전 총독부와 협의하여 일본항복 이후 국내의 치안을 담당했고,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였으며, 잠시 동안이나마 전국적으로 통일된 형태를 갖추었다. 즉 여운형의 건준세력이 이와 같은 일들을 도맡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과장되었고, 공산당 조직에 가까운 단체로 보는 저자의 주장과 시각은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았고, 사실관계마저도 맞지 않는다.

 

둘째 저자는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소위 송진우의 한민당 계열은 대부분이 친일세력이었다. 물론 조병옥 같이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친일파들을 내세우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독립운동가라 불리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노덕술과 같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하여 친일청산 꿈을 박살내며,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거기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년 후인 1949년에 이르면 한민당 계열 인물 중 많은 사람들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다. 따라서 한민당계열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독립운동 세력이 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한민당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있는 것이다. 즉 저자가 독립운동가 송진우라는 이름을 빌려 한민당을 임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듯이 포장한 것은 한민당 세력이 친일파 세력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저자는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며 현재북한과 남한의 차이를 여운형의 건준과 송진우의 한민당에서 찾았다. 위에 상술했듯이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우익을 망라한 연합단체였지, 사회주의 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몽양 여운형은 사회주의자이기 보단 진보적 민주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다. 위에 상술한 송진우의 한민당 계열은 대부분이 친일세력이다. 물론 여운형이 한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 하면서 레닌,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도 만나 조선독립을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1920년대 그가 비록 사회주의에 좋은 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 적은 있었으나,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도입하자고 했던 적은 적어도 해방정국시기에는 없었고, 그는 해방 이후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이루기 위해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여운형이 인민민주주의를 전적으로 선택한 빨갱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친일파들을 앞세워 노동자 농민을 패죽이고 학살한 친이승만세력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들 입맛에 맞게 여운형 선생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멋대로 왜곡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여운형을 매도하게 될 것이다. 책 저자인 박명수와 같은 이들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공산화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주장은 몽양 여운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이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일 뿐이다. 몽양 여운형은 엄밀히 따지자면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진보적 민족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다. 애초에 좌우합작 운동은 미군정이 필요로 해서 지원한 것이었고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가 미군정의 지원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고 통일된 형태의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앞장선 것이었다. 따라서 좌우합작운동은 적잖은 미군정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고, 미군정이 지지를 철회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또한 미군정이 좌우대표로 내세웠던 인물들마저도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고, 몽양 여운형은 소련보다는 미국 쪽하고 보다 협력하는 인물이었다. 좌우합작은 공산화의 길이었다.”는 주장은 좌우합작의 참 뜻을 폄하하고 이승만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만들어낸 극우세력들의 프로파간다다. 물론 좌우합작의 한계를 중국의 국공합작 사례를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독립투사들을 빨갱이라 모욕하는 짓은 참으로 유치하고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필자는 이 책을 26개월 전 읽었었다. 비록 분량이 짧은 책이기는 했지만, 읽는 내내 혈압이 올라 깊은 빡침을 느끼는 경우가 다반사이기는 했으나,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책 내용이 대부분 사실 관계에 부합하지 않고, 저자 박명수의 독단적인 주장들이 굉장히 많으며, 친일파들을 옹호하려는 저자의 악의적인 의도가 깔려있는 책이기에 매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

 

뉴라이트 친일 세력들은 자신들이 옹호하고 존경하는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반대되는 세력을 빨갱이 몰이 한다. 3년 전 국정교과서 사태는 뉴라이트 세력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사례다. 그 결과 민주주의를 역행되었고, 친일친미 독재세력을 건국의 아버지 혹은 부국의 아버지로 미화하는 책들이 시중에 나돌았었다. 당시 뉴라이트 세력들은 틈만 나면 여운형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왜곡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고 극우세력들의 프로파간다였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아직도 뉴라이트 세력은 건재하다. 그리고 지금도 이와같은 극우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책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몽양 여운형을 왜곡하는 건국투쟁과 같은 책들은 집어던지고, 여운형의 통합정신이 주목받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8년 들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통령 문재인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난 뒤, 잠시 50% 중후반의 지지율에서 다시 70%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남북회담을 아주 극찬했다. 이로써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2018년인 올해는 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8815일에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194899일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단은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휴전 상태다.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지만, 일반 국민들의 인식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아직까지는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다. 즉 미국과 한국의 공식 견해인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전쟁을 시작했는데 미국이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것이다.”로써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무조건 악으로만 간주되어야 하고, 대한민국은 선으로 간주돼야만 하는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것 같다. 대체로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거기까지 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국내에서 출판된 논문이나 서적들 중에는 대체로 우익적이고 보수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들이 많다.

 

작년 12월 한국전쟁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이자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인 브루스 커밍스의 새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됐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가 2010년대 들어서 쓴 한국전쟁 서적이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한국전쟁의 핵심을 아주 잘 정리했고,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1. 미국에게는 잊혀진 전쟁

 

우리에게 있어서 6.25라고 불리는 한국전쟁은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전쟁이다. 즉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얘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전쟁에 대한 명칭은 각 나라마다 다르다. 대한민국의 경우 북한군이 T-34탱크를 몰고 내려온 날인 625일에 시작됐다고 하여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한국전쟁(Korean War)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의 경우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칭한다. 반면 북한의 멸망할 위기에 놓이자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걸고 100만 대군을 참전시킨 중국은 이 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른다. 이렇듯 한국전쟁의 주축이 되었던 국가들 마다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사실상 참전했던 미국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까지 전쟁에 참전했다. 많은 병사들이 한반도에 파병되었고, 전쟁기간동안 약 36천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수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다. 미국사회는 한국전쟁에 대해 그다지 크나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국전쟁이 잊혀졌다는 얘기는 미국 민중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제2차세계대전이나, 미국 민중의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베트남 전쟁에 비해 잊혔다는 얘기도 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체계적인 억압과 검열 때문이라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빠져있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움에 떨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 전쟁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위험이 뒤따랐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소련의 핵개발로 인하여 미국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한국전에 큰 장애물 없이 참전할 수 있었다. 매카시즘 덕분에 미국은 한국전쟁 반대세력을 크게 형성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한국전쟁도 1951년 춘계공세 이후 다시 38선 부근에서 벌어지는 고지 쟁탈전 위주의 전투로 바뀌고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 사람들 관심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서 미국의 벌인 만행과, 19452차세계대전 이후 조선반도에 들어온 미군정이 저지른 만행이 미국 내에서 크게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 냉전 이후 미국은 북한이라는 나라를 악의 축으로 결정하는 실책을 범하였다.

 

2. 전쟁의 기원과 남북한 각 정부의 수립 과정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근현대사를 책에 아주 잘 정리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대한민국을 기습했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한국전쟁 이전인 남북분단정부 수립과 해방 후 분단의 비극을 매우 잘 조명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식민지 통치 시기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세력과 만주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세력이 나중에 분단 속에서 남북한 분단 정권을 수립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의 지도자이자 독재자이기도한 김일성과 북한 초기 내각 거두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잘 재조명 했다. 김일성이 후에 저지른 과오를 떠나서 그의 항일무장투쟁을 과장 없이 충실하게 재조명한 건 분명 대단하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주류 정치세력들은 만주항일무장투쟁 세력들로 구성된 반면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 세력들은 대체로 친일파들이었다. 이와 같은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은 일리가 없는 주장이 절대 아니지만,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이 꼭 친일파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임시정부의 주석이라 할 수 있는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내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적잖게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들어갔다. 신익희, 이범석, 이시영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적잖게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였던 죽산 조봉암도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책에 서술하지 않은 부분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계열 세력들이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었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뭉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친일파들을 웬만큼 처벌했던 데에 비해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을 하나도 청산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북한은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을 문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책 저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이 점을 놓치긴 했지만, 분단과 한국전쟁의 본질을 잘 파악했다는 점에선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해방 이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미군정이 해산한 것부터 시작하여 친일파들을 앞세워 각종 노동자 농민 투쟁을 피로 물들이고 대구와 제주도 그리고 여수 순천을 피바다로 물들인 미군정의 잘못을 아주 정확히 지적했다. 김종원을 비롯한 우익 파시스트들과 친일파들이 벌인 악행도 아주 잘 정리했다. 즉 미군정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했다. 이와 같은 커밍스의 해석은 아주 정확하고 훌륭하다.

 

3. 전쟁의 성격과 민간인 학살

 

3년간 지속되던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로 얼룩져 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에서 벌인 최악이 민간인 학살인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이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학살됐다. 저자 커밍스는 미국의 동맹국 대한민국이 벌인 민간인 학살을 낱낱이 밝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람이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학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숫자를 훨씬 능가한다고 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인민군의 양민학살 또한 책에서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그 또한 전쟁 시기 인민군의 저지른 양민 학살 또한 잘못된학살이라는 사실이라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민간인뿐만 아니라 포로도 포함된다.)은 한 몇 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다만 인민군의 학살은 국군이나 미군에 비하면 어느 정도 기준이 있었다. 2000년대 만들어진 진실화해위원회는 북한이나 남한의 좌익에 의한 처형도 똑같이 다루었는데, 그들의 조사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고 한다. 한 예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그 협력자들은 서울, 대전, 청주 등지에서 수백 명씩 살해하여 전부 1100명을 살해했는데 대개는 억류되어 있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었다. 반면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국군학살에서 수천구의 시신을 찾아냈는데, 이중 10살 미만의 어린이의 시신도 수십 구씩이나 발견되었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자국인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또한 낱낱이 밝혔다. 19507월 미국 제1기병사단에 의해서 200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노근리에서 학살되었다. 그리고 미군은 한국군의 노골적인 학살을 하도록 방지했고, 절대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대상을 포로로 잡아 대책없이 넘기며 그들의 학살을 돕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이 저지른 최악의 민간인 학살은 무차별 폭격이라 할 수 있다. 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 총량이 503000톤이었다. 이중 20만 톤은 일본본토에 떨어졌다. 그러나 1950~53년까지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퍼부은 폭탄의 량은 635000톤이다. 거기다 북한에 쏟아 부은 네이팜 폭탄은 32000톤이고, 이걸 다 합치면 667000톤이 된다. 네이팜탄의 파괴적 효과는 베트남보다 북한에서 더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북한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도시 60곳이 평균 43퍼센트 수준으로 파괴된 반면, 북한 도시와 마을이 파괴된 정도는 40~90퍼센트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북한을 무차별 폭격하며 북한이라는 땅을 달의 표면과 같은 땅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공군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증언에 따르면 10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수치가 과장이든 아니든 간에 미국의 인정사정 없는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4. 이제는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가 아닌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국전쟁을 보아야할 때이다.

 

책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이 책을 통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대한민국을 기습했다.”와 같이 한국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나 견해에 반대하여 한국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지난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미국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에 대해 조리 있게 비판했다. 이와 같이 그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분명 미국의 주류역사학계가 가지고 있는 시각과는 완전히 상반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내에 있는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책 평점과 amazon(미국의 인터넷 소매점)에 나와 있는 이 책의 평점을 잠깐 찾아보았다. 두 사이트에서 이 책에 대해 평점을 매우 낮게 준 사람들이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공통점은 이 책이 좌편향 적이다.’라거나 저자가 빨갱이라는 것이다. 이렇든 이 책은 한국이나 미국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하고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을 평가 절하하는 세력들은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 전쟁의 위협은 한반도를 맴돌았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뻔 했다. 19681,21사건과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때, 1994년 클린턴 정부가 북폭을 준비했을 때,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부시 정부 안에서 북한도 공격해서 없애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2017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은 화염과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라고 했을 때 말이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긴장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늘상 일어났고, 한반도에 사는 국민들을 긴장관계로 몰아넣었다.

 

최근 들어 한반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쟁을 불사하겠다던 북미관계도 차츰 완화되어 2018612일에는 사상최초로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폴에서 개최되기 까지 했다. 소위 보수 꼴통으로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과 북한에게 보인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과 남한의 대통령 문재인을 극찬했다. 그리고 얼마 전인 2018918에는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은 잘 진행되었다. 이번 정상 회담에서 김정은은 조만간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번 회담에서 보인 반응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작년의 북미관계를 고려해보자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일이 올해 들어 일어났다. 이렇듯 한반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즉 한반도 관계가 다시 변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지극히 우익적인 관점에 빠져있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바뀌듯이 한국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도 앞으로 보다 더 넓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과 같은 책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와야 할 거고, 그런 책들이 대중들에게 많이 읽혀야 할 것이다. 이번 남북관계과 개선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한번 가져본다.

 

분단적폐 물리치고 가자 평화로!!!!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8-09-27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은 건국 이래 국지적 전투에서는
졌어도 전쟁에서는 진 적이 없는 나라
였습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처음으로 이기지
못한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에게는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어쩌면 잊고 싶은 전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NamGiKim 2018-09-27 10:0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미국이 최초로 이기지 못한 전쟁이죠.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깨지죠. 이후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던 트라우마에 빠졌지만, 걸프전쟁으로 자존심을 회복했죠.

겨울호랑이 2018-09-27 1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Ho Chi Minh 님 글을 읽다보니, 두 사람이 싸울 때 ‘누가 먼저 주먹을 휘둘렀느냐‘보다 ‘왜 싸웠는가?‘가 중요함에도 한국전쟁에서 이 질문은 제기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NamGiKim 2018-09-27 20:03   좋아요 1 | URL
오 그랬군요.ㅎㅎㅎ 사실 그런 질문이 던져지지 못한 것은 분단이라는 현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지금까지 분단이라는 모순속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 키워왔고, 그 상황에선 생각치 못한 것이겠죠. 그리고 울나라 사람들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넘기는것 같습니다. 김칫국 부터 마시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더 좋아지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좀 더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15년 독립운동사중에 의열투쟁사를 주제로 했던 영화 암살이 천만관객을 돌파했었다.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이다. 영화 암살이 흥행한 뒤로부터 대중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보통사람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가 하면 안중근, 김구, 유관순, 윤봉길, 안창호, 이봉창 정도다. 그런 일반인들이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보면서 매우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이들중엔 왜 김원봉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졌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일제시기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잊혀졌던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그는 누구일까?

 

1.김원봉 일대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16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9년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받은 뒤 그해 11월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을 만들었다. 1920,30년대 의열단은 주로 사보타주, 요인암살등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열단이 주도했던 사건 중에는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의거도 있었고 그러한 투쟁방식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1926년 김원봉은 장제스가 만든 황포군관학교에서 유학했고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2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고 1938년에는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중일전쟁 시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맞서 수많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까지 수많은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치르던 김원봉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조선의용대 병사들도 광복군국내탈환작전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빨리 항복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해방 이후 김원봉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귀국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합류하였다. 1947년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괴한들로 부터 테러를 당하는 일이 적잖게 일어났다. 그때문에 김원봉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그러던 중 당시 수도 경찰청장인 장택상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이용하여 그를 체포한 뒤 고문했다. 악질 중에 가장 악질인 노덕술에게 고문받은 김원봉은 그 모욕을 견디지 못하여 몇일동안 울었고 결국 1948년 월북했다. 1948년 9월 북한정부가 수립됐고 김원봉은 국가검열위원장에 올랐다. 이 밖에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1953년 박헌영 체포로 시작된 남로당 탄압과 1956년 김일성 일인독재체제에 반대하여 연안파 소련파들이 일으켰던 8월 종파사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은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1958년 부위원장을 사임했다. 1958년 11월 그는 북한에서 죽었다.

 

2.의열투쟁과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무차별 테러.

 

1919년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920,30년대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었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김원봉이 전개한 의열투쟁이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상대로 전개했던 의거를 무차별 테러라고 주장한다. 일본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에게 적극협력하는 앞잡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독립투사들의 의거를 테러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테러와 의거를 구분하지 못한 관점일 뿐이다. 일단 김원봉의 이끌던 의열단의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 7가지"가 어떤 것인지 보자.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4.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제거해야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이렇듯 의열단이 만든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주의자, 친일파, 일본제국주의를 이롭게 하는 기업과 정치단체 그리고 일제 경찰 군인에 한해서 였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조선인 일본인 할 거 없이 민간인들을 타겟으로 테러를 일삼지 않았다. 즉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나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민간인 테러를 일으키고 현재 중동지역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탄테러와 무차별 살상을 일삼고 있는 IS하고는 엄연히 다른 단체였다. 이런 구분없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들의 거사를 무차별 테러라 칭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점이다.

 

3. 김원봉은 과연 북한정권에 의해 죽은 것일까?

 

해방후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월북했다. 월북한 이후 김원봉은 북한에서 고위직을 거쳤고 1953년 북한에서 불어온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숙청시기 살아남았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주도한 연안파 소련파 숙청시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었지만 1956년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1958년 김원봉은 자신이 있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김원봉의 행적은 1958년 이후 알려진게 없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김원봉이 1958년에 사망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일각에서는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자살설, 총살설 등을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길 1958년 북한 고위직에서 내려온 이후 그가 죽었을거라 예상하고 있고 북한정권이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어 죽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고, 북한정권에 의해 간첩혐의를 받고 죽었는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이 진상규명을 해야할 것이다.

 

4. 김원봉은 과연 공산주의자였을까?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계열에서는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빨갱이라 매도한다. 2015년 영화 암살이 떳을때도 수구세력들은 김원봉을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했다.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은 박정희식 반공주의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도 매우 부족하고 매우 편향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김원봉은 1920,30년대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1940년대에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애초에 의열단 자체가 아나키즘적인 성향이 강했고 약간의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없다고는 할 순 없지만 기본 이념은 아나키즘이었다. 일각에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인데 솔직하게 얘기해서 김원봉은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악질친일경찰로 알려진 노덕술이 그를 고문했다. 그런 악질 친일매국노에게 고문당한 김원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해방 후 여운형이 괴한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당했듯이 김원봉도 괴한으로 부터의 테러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괴한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몇번 있었다. 즉 김원봉이 월북한 이유는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닌 괴한으로 부터의 위협과 친일경찰 노덕술의 고문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철저한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하는 수구세력의 관점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5. 글을 마치며

 

김원봉은 남북모두에게 잊혀진 독립운동가다. 한국에서는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를 가지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1인체제가 강화된 이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저자 김삼웅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2007년 평양에 갔을때 애국렬사릉에서 가이드에게 김원봉에 대해 물어봤는데 가이드가 김원봉을 몰랐다고 한다. 오랜세월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된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한국에서 다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영화 암살이 개봉하면서 부터였다. 그로부터 1년뒤인 2016년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이 개봉했고 요즘 대한민국에선 전반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적폐세력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도하기 급급하다. 최근 경남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참 좋은 일이다. 앞으로 김원봉 선생님이 더 재조명 받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8-04-2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NamGiKim님께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신듯 합니다^^:) 앞으로도 의미있는 독서 좋은 리뷰 기대해 봅니다 !

NamGiKim 2018-04-22 15:40   좋아요 1 | URL
사실 제 전공이 역사입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있어요. 현재는 휴학생입니다. 내년에 복학하면 3학년이고요. 우리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와 민주화운동사를 보면 잊혀진 인물들이 매우 많은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 역사에서 재조명 받기를 매우 바랍니다. 특히 여운형 선생이나 조봉암 선생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무튼 감사합니다.^-^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택동 전기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우의 아내 님웨일즈가 쓴 김산의 일대기 아리랑을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 김산 그는 비록 조선인이었지만 중국혁명에 참가하여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으나 1938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당했다. 억울한죽음이었다. 세월이 흘러 1980년대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고 김산도 재조명 되었다. 대한민국의 김산이 알려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았던 박정희 정권하에서 사회주의자 김산의 일대기 아리랑이 공개적으로 출판될수 없었다. 없는 죄도 만들어 민주인사와 시민들을 간첩으로 몰던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주의자 김산의 일대기를 공개적으로 소지할경우 빨갱이로 몰리기 만무했을것이다. 한국 진보사상의 아버지 리영희는 1950년대 일본에서 우연히 아리랑을 읽고 감명받아 이 책을 운동권 민주투사들에게 제목을 가린채 유포시켰다. 유신정권하에서는 운동권 내에서 그렇게라도 알려졌지만 1980년대 중반들어서면서 동녘출판사에서 출판할수 있게 되었고 2005년 노무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조선의 체게바라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김산의 생애를 읽으며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젊은나이에 의열투쟁과 중국혁명 그리고 항일운동에 참가한 그의 행적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했기 때문인것 같다. 몇몇 수구세력들은 김산을 빨갱이로 매도한다. 그들 눈에는 사회주의 계열독립운동가들은 무조건 다 빨갱이인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무튼 난 아리랑을 읽었으니 기회가 된다면 모택동의 붉은별도 읽어볼 생각이다. 아리랑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국투쟁 -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7
박명수 지음 / 백년동안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 1945년 9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까지 약 20일간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송진우 세력이 과연 어떠한 세상을 이루고자 하였는지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합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박헌영 세력이 편입됨에 따라 좌경화 되었으며 우파세력은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송진우가 주도한 한민당 계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송진우 계열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가 지금현재 북한과 남한의 현실 즉 북한은 인민민주주의를 택해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가 됬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서 세계경재 10위권을 자랑하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본다.


 저자의 주장이 사실과 무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여운형의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된 단체이고 건준의 행적이 과대포장되었다고 얘기하였다. 물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계열이 대거 합류하고 송진우 세력이 건준가담을 거부하면서 건준이 좌경화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편입하며 좌경화가 되기 전 1944년 8월에 만들어진 건국동맹 시절부터 안재홍, 조만식 그리고 임정의 광복군과 일제의 패망을 대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안재홍을 비롯한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도 건국동맹에 가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황이 항복방송을 하기 전 총독부와 협의하여 국내의 치안을 담당했던 세력이 여운형의 건준세력이다. 


둘째 저자는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은 대부분이 친일세력이었고 1949년에 이르면 한민당 계열 인물중 많은 사람들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다.따라서 한민당계열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독립운동 세력이 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한민당에게 있는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저자는 현재북한과 남한의 차이를 여운형의 건준과 송진우의 한민당에서 찾았는데 여운형은 사회주의보다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에 가까웠고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친일세력이다. 여운형은 한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 하면서 레닌,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도 만나 조선독립을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비록 사회주의에 좋은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 적은 있어도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도입하여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자고 했던 적은 해방정국시기에는 없었다. 오히려 조국이 통일되기 위해선 좌우 갈등을 막고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며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여운형이 인민민주주의를 전적으로 선택한 빨갱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작년 국정교과서 문제가 이슈화 되기 전에 나온 극우파계열 책으로써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 볼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그러나 왜곡된 부분을 비판없이 받아들이지는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