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전두환 1~2 세트 - 전2권 - 2판
백무현 글.그림 / 시대의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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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재산 29만원을 가지고 골프를 즐기고 있다는 얘기가 뉴스를 통해 들었다. 그 뉴스가 있기 전까지 그는 알츠하이머가 있어서 재판에 불참석했다는 얘기가 들렸지만, 최근에 나온 뉴스를 보니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대통령인 것 같다. 그런 인물이다 보니 최근들어 백무현 선생께서 집필한 ‘만화 전두환‘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1979년 박정희 사망 부터 그가 일으킨 12.12 쿠데타 그리고 5.18 광주학살까지를 다루고 있고, 2부는 삼청 교육대 부터 1997년 전두환의 석방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은 2007년 골프를 치던 전두환이 경상남도 합천에 자신의 아호를 딴 공원이 만들어 진다는 소식을 들으며 시작되고,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전두환 그는 1979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를 합리화 하기 위해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어 수천명을 학살했고, 이를 철저히 통제하여 정보를 차단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통치체제는 이승만, 박정희가 그랬듯이 반공주의였다. 깡패 소탕이라는 명분하에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삼청 교육대에 보냈으며,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 자신의 정권을 합리화 시켰다.

그는 1980년대 등장한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 기생하기도 했었고, 일본 극우 통치자들의 수법을 실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친미와 친일을 같이 했던 것이다. 1983년 소련이 격추 시킨 것으로 알려진 KAL 007기 격추 사건은 미국 레이건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공작이었고,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명령에 따라 소련 상공에서 대놓고 스파이짓을 했다.

1987년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같은 민주투사들의 투쟁으로 전두환 시대가 끝이 났지만, 노태우의 시대가 열렸고, 그런 과정 속에서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은 늦추어 졌으며, 김영삼 정권이 와서도 그들을 처형하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광주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과 그 유신잔당들 그리고 그 뒤를 봐준 미국에게 많은 분노를 느꼈다. 광주에 투입된 전두환 휘하의 공수부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민간인들을 향해 M-16 소총을 쏘았고, 총검으로 찔러 죽였으며, 심지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다. 이걸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책은 전두환이 저지른 만행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책이다. 즉 전두환이 어떠한 짓을 했는지를 고발하는 책이다. 최근 전두환이 역사적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그의 뻔뻔함과 반성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광주학살자 전두환은 지금당장이라도 처벌받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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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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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남단에 존재하는 섬 제주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관광지 중 하나다. 연애 중인 커플들이나 결혼한 연인들끼리 놀러 가는 곳이기도 한 제주도는 평화롭고 경치도 매우 아름다우며 자연환경도 좋은 섬이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휴양하기 위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도는 미국의 하와이나 일본의 오키나와 중국의 하이난도(해남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같이 참으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고 여행하기 좋은 제주도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참으로 비극적이다 못해, 지옥과도 같은 섬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송장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투명하고 푸른 바다나 계곡은 피로 물들었으며, 한라산에 핀 꽃들은 붉게 물들었었다. 왜냐하면, 1948년 4월 3일을 시작으로 제주도에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광기 어린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주 4.3 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제주도는 해방을 맞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물러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사업을 해나갔고, 제주도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조직되어 그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사업은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이 제주에 들어왔을 초기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인민위원회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은 일제 친일 경찰들을 등용하여 제주도를 통치하려 했고, 이러한 미군정의 행동은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샀다. 더 나아가 미군정의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제주도의 경제 사정 또한 안좋아 졌기에 민중들은 점차 미군정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으며, 미군정 또한 제주도민에게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1947년 초에는 대략 300~400명의 학생이 미군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3.1 운동 제28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제주도민이 참가했던 이 행사에는 국내의 사회주의 조직이었던 남로당도 참가했었는데, 이를 좋지 않게 본 경찰이 어린아이를 말발굽에 부딪치게 만들면서 죽였고, 이에 반발하는 시민에게 총을 발포하여 1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했다. 그 사건 이후인 3월 10일 남로당을 이끄는 좌익 계열 인사들과 민중들은 이에 총파업으로 맞섰고, 미군정과 경찰은 이 집회를 진압했다. 진압한 이후 그들은 서북청년회 출신의 인물들과 더 많은 우익경찰들을 제주도에 배치했고, 대대적인 좌익 탄압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런 탄압은 서북청년단의 민간인 테러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1948년 3월 초 제주도 내에 있던 남로당원들은 이러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인사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켜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나섰다. 이들이 무장투쟁으로 맞서자 이에 당황한 미군정과 경찰은 본토로부터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우익 출신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제주도에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적인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이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나서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우익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에게 학살당했다. 좌익이 저지른 것도 없진 않았으나, 대체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세력들을 대상으로 일어났다.


1948년 11월부터 시작되었던 초토화 작전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압을 거부한 여수 순천의 14연대는 이에 저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러한 우익들의 학살로 인하여 제주도민 희생자 80% 이상이 우익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3만 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거의 다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에서 생겼다는 것이다. 제주 4.3 항쟁 시기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아이, 어른, 노인, 여자, 장애인을 가리지 않았다. 진압 작전에 나섰던 토벌대는 초등학교까지 가서 한 아이를 체포하여 운동장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고, 빨갱이라고 의심한 무고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살, 2살짜리 영유아도 마을 주민들과 같이 학살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어떤 마을에선 수백명 단위로 학살되어 마을 하나가 전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광적인 학살은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일어났다. 따라서 제주도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푸른 바다는 죽은 사람의 피가 넘치는 바다가 되었으며, 한라산에 있는 꽃들은 죽은 사람의 피로 붉게 물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제주도의 비극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다시 한번 반복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제주도민들은 다시 한번 검거당해야 했고, 이들 중 대다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해 암매장 되고 했다. 따라서 빨갱이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던 살아남은 제주의 젊은이들은 국군에 자진해서 자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빨갱이’라는 의심의 눈초리하고 연좌제라는 사회 제도적인 공권력 탄압이었다. 4.3을 겪었던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할 권리를 잃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 과거에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기억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건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되면서부터였다.


1948년 제주 4.3 항쟁 당시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 학살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있었고,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리라”라고 말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던 조병옥이 있었으며, 미군정이 있었다. 누군가는 제주 4.3 항쟁을 폭동이라고 한다. 특히나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리는 극우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제주 4.3 항쟁을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던 토벌대와 이승만의 입장에서 제주 4.3 항쟁을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관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다.


허영선 시인이 집필한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픔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책 한 페이지씩 넘기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책 한 페이지마다 지옥도를 경험했던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저자가 시인이다 보니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도 많았기에 더 와닿았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8년 1월 필자는 제주 4.3 박물관을 방문했었다. 당시 그곳을 방문한 필자는 눈물을 흘렸었다. 도대체 왜 이 무고한 사람들이 이렇게 학살당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이번 기회에 허영선 시인의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읽게 된 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의 장점은 제주 4.3 항쟁과 그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따라서 역사 지식이 없더라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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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몰았는데, 그 수법이 너무나도 잔인했다. 이 중 가장 악질적인 만행이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2004년 장동건과 원빈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장동건의 와이프가 아무것도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우익 청년단이 쏜 총에 맞고 죽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에 따르면, 그녀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은 그저 쌀이나 보리를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자본주의가 뭔지 혹은 사회주의가 뭔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무엇이었길래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몬 것일까?

 

1. 보도연맹이란?

  

보도연맹에 관해 얘기하기 이전에 먼저 해방 전후사에 관해 얘기하겠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미군이 진주한 한반도 이남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익 세력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고,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힘을 얻은 이승만은 그런 노력들을 무력으로 무마시켰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과 친일 세력들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은 여러 곳에서 봉기했었는데,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고 난 이후 이승만 정부는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이다. 보도연맹 조직을 확장하면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했다. 심지어 10대인 중·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할 정도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비단 좌익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 및 사정을 들어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생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정리하자면 보도연맹 단체는 해방 후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키려고 만들었지만, 대다수 민간인이 더 많이 가입했으며, 그 절차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었다.

 

2. 학살의 시작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엄청난 보복 및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부텨였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기에, 한국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과의 전쟁 속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전향자들의 배신을 우려하게 되었고, 그런 이승만의 우려가 결국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을 따라 후퇴하던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은 정부의 명령 아래 보도 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이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 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 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그 외에도 진해, 통영, 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중 가장 악질적인 사건은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이었다. 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보도연맹은 19506월부터 8월 혹은 그 이후까지 전개되었는데, 최소 20~30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학살당했다. 통계에 따라선 최대 100만까지 잡기도 하는데, 확실한 건 이승만이 전개한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이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들도 있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들도 존재했다. 이 학살의 중심에는 항상 북진통일과 반공을 부르짖던 이승만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이 한국전쟁 시기 학살당했다.

 

3. 반공주의가 침묵을 강요했다.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물론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학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주나 자본가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나 군경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이 규모나 무차별 학살이라는 측면에서 인민군보다 더 했고, 더 잔인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을 겪었던 유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고, 연좌제가 두려워 이런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유가족회가 결성되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부 또한 이승만 정부 못지않게 이를 막았고, 유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결국,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9월에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2009년까지 진행되었다. 보도연맹 학살을 2000년대 조사하면서 대략 5000구 정도의 보도연맹원 시신이 밝혀졌고, 많은 증언과 한국군 자료들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나오면서, 역사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얘기할 때, 항상 인민군의 학살만 강조됐다. 그러나 2000년대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던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의 학살은 한국군의 학살에 비해 훨씬 적었고, 거의 16 비율이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인민군보다 더 잔인했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아직도 6.25가 되면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만 강조하며, 마치 우리는 피해자다라는 식의 피해의식을 국가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장치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숨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금기시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보도연맹 학살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한국군의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그런 만행을 우린 한국전쟁일인 오늘 기억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4. 참고 자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르스 커밍스 저, 조행복 역,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저, 2005

이승만 평전, 김삼웅 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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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일 뒤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있을 예정이다. 비록 이번 베트남에서 열리는 회담은 북한과 미국과의 정상회담이지만,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우리나라도 이번 정상회담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 북한과 한반도 정세 관련한 글을 써오며 누누이 강조했던 거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의 정세는 점차 평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잘 성사된다면, 남북관계가 변화가 있을거라는 얘기가 있듯이 말이다. 분단 세월 70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는 다시 한번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되기 이전 좌우갈등과 미소대립을 극복하고 통일정부수립을 꿈꿨던 태양과도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여로모로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해방시켰던 그는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년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함으로써, 3.1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었다. 일본의 그 어떠한 회유와 억압에도 견뎌냈던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친일로 변절하던 시기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대비를 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국내 치안을 유지했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좌우갈등이 극심해지자 좌우합작을 전개하여 분단을 막고자 했다.

 

이렇듯 몽양 여운형은 업적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너무나도 잊혀진 존재다. 최근들어 한반도 관계가 평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보니, 더더욱 그의 정신을 본받고 싶어지고, 그의 염원이던 분단극복과 통일이 빨리오길 보다 더 바라게 된다. 따라서 오늘은 그를 기억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내가 읽은 여운형 관련 서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여운형 평전

 

몽양 여운형의 비서로서 활동했던 저자 이기형 선생께서 쓴 여운형 평전이다. 저자 이기형은 암울하던 전두환 정권 시기 통일운동을 했었고 ,그 시기 몽양 여운형의 평전을 집필했다. 2013년 별세하기 전까지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저자는 통합진보당에서도 활동했었다. 1988년 그가 쓴 여운형 펑전은 2004년 실천 문학사에서 이 책을 새로 출판했다. 사실 평전이라기보다는 인물 사나 회고록 성격이 강하다. 여운형 생애에 대한 웬만한 자료는 다 있다.

 

 

 

 

 

 

 

 

 

 

 

 

2. 찢겨진 산하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그리고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가 사후에 만나 한국 근현대사와 통일을 논한다는 전개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혀진 역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3. 혈농어수

 

여운형 사망 60주기를 앞두고 여운형이 고마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제목으로 삼아 3권으로 묶어 출간한 정치 소설이다.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는 시점부터 1947 몽양 여운형이 암살될때 까지가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리고 1945년 당시에 대한 내용이 굉장히 방대하다. 다만 해방전후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의 일제 시절 독립운동이나 몽양 여운형의 전반생애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짧게 넘어간다. 책을 읽다가 심심해질때쯤 꼭 한번씩 야한얘기가 나와 읽는이의 정신을 번쩍들게 만든다. 당시 해방 전후사를 아는데 있어서 좋은 책이다.

 

 

 

 

 

 

 

 

 

 

 

 

4. 여운형 평전

 

전독립기념관장이자, 민주화운동가인 김삼웅 선생께서 쓴 여운형 평전이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에 출판됐다. 저자 김삼웅에 따르면 여운형 평전이 기존에 꽤 많이 나왔지만 대개는 너무 학술적이거나 대개는 해방 전후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여운형 평전을 다시썼다 한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인물 평전을 30권 이상 쓴 사람이라 책 또한 굉장히 잘 썻다.

 

 

 

 

 

 

 

 

 

 

 

5. 몽양 여운형

 

산하 출판사에서 나온 여운형 평전이다. 서문은 해방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여운형의 생애를 이야기 하고, 끝부분에선 그의 암살과 그의 딸 여연구 여사의 아버지 묘소 방문을 다룬다. 기존의 인물 평전이나 몽양 여운형 관련 서적을 읽는 것이 버겁다면, 입문격으로 읽어볼만 하다.

 

 

 

 

 

 

 

 

 

 

 

 

6. 나의 아버지 여운형

 

몽양 여운형은 비명횡사하기 전 자신의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내 김일성 위원장에게 맡겼다. 그의 두딸 중 하나인 여연구 여사가 쓴 책이다. 따라서 북에서 출판된 책이기도 하다. 그의 딸인 여연구 여사가 본 몽양 여운형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북조선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기에 "김일성 축지법"이나 "일본 천황에게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는 믿기 힘든 얘기도 나오니 이런 부분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의 딸이 썻다는 점에서 대채로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적지 않다.

 

 

 

 

 

 

 

 

 

 

7. 건국투쟁

 

뉴라이트 계열 학자인 박명수가 쓴 책이다. 주로 이승만과 박정희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백년동안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여운형 관련 서적이라기 보단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다루고 있다.저자의 성향 답게 건국준비위원회를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며 친일파의 집합체인 한민당 계열을 마치 독립운동을 계승한 집단처럼 왜곡하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은 여운형의 인민민주주의를 선택하지 않고 송진우와 한민당 세력이 주장하던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에 북한같은 지옥의 나라가 되지 않고, 부자나라 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뉴라이트들이 이승만 세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주 하는 주장인 "좌우합작은 공산화의 길이다."라는 식의 메카시즘적인 주장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8. 여운형을 말한다

 

2007년 몽양 여운형 서거 60주년 해서 개최했던 몽양 학술 심포지엄의 논문 자료집이기도 하다. 논문 뒤에 몽양 여운형의 생각과 행적을 보여주는 글과 자료들을 연도별로 실어 연구자들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했다. 따라서 몽양 여운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자료다.

 

 

 

 

 

 

 

 

 

 

 

 

 

9.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사 교수이기도한 서중석 교수가 쓴 책이다. 이 책은 여운형만을 주제로 다룬 책은 분명 아니지만, 해방 전후사 파트에서 여운형에 대해 나름 심도있게 다뤘다.

 

 

 

 

 

 

 

 

 

 

 

 

10. 여운형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기획한 독립운동가 시리즈 교양 서적중 하나다. 지금으로 부터 2달 전인 2018년 12월에 출판됐다. 주로 몽양 여운형의 독립운동 업적을 잘 정리했다. 말 그대로 교양차원에서 입문하기 위해 읽어볼만 하다.


 

 

 

 

 

 

 

 

 

 

 

 

11.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는 명예교수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와 여운형, 이승만, 박정희등을 주로 연구한 이정식 교수가 쓴 책이다. 지금까지 나온 몽양 여운형 관련 서적 중에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그만큼 자료조사가 철저하다.  다만 저자가 몽양 여운형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이승만과 박정희도 동시에 좋게 보는 인물이라, 이승만 관련 서술은 좀 걸러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보단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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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변은진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역사공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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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조선을 이끌어나갈 저도자"를 선택하는 여론조사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재치고 단연 1위를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집에 있는 노비를 해방시켰고, 1919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으며,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햐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해방 정국 시기 그의 인기는 참으로 대단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노선에서 친일로 변절할 때, 일본제국주의의 회유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인 1944년 8월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마치 나치독일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좌우연합하여 나치독일에 맞서 파리 해방을 미리 대비했던 것 처럼 말이다. 비록 광복군 국내 탈환 작전이 성사되지 않아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그 민중의 군대가 일본군을 무장 해제 시키지는 못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미화하며 그들조차 속고 있었을 시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 총감과 협상하여 총독부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고,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과 동시에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자신의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촉시켜 무정부 상태를 막고, 전국적으로 치안유지와 조국건설 사업을 추진해나갔었다.

 

그랬던 여운형이기에 해방 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다 아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초대 총령이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통려인 이승만보다 더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일제시기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정부수립에 힘을 썼던 그는 안타깝게도 12번의 테러 끝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가 암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인 1948년 남북분단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백만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봤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기 잊혀진 인물이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모른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5년 공로를 인정받고, 2008년에는 대한민국장 1급에 추서됐으나,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

 

해방정국 시기가 아닌 그의 독립운동 행적만 보더라도 몽양 여운형은 분명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젊은 시절 그는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고,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했다. 경술국치 이후 그는 중국으로 넘어가 유학했고, 1918년에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3.1 운동에 불씨를 제공했으며,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써 일본으로가 일본고위급과의 회담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는 1920년대 초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었고, 모스크바에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192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손문, 마오쩌둥,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의 좌우를 아우르는 인물들 사이에서 제1차 국공합작에도 일부분 기여했고, 베트남의 호치민과도 만나 교류했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언론활동을 통해 일제시대의 현실을 비판했고,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을 주도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그를 빼놓고 논하는 것은 사실상 주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꿈꾸던 남북통일정부수립은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변화해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과 미국간의 제2차 정상회담이 베트남 다낭에서 열릴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대립에서 평화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 좌우와 남북의 통일을 꿈꾸던 그를 돌아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를 다룬 대중적인 영화나 드라마가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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