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반민특위 해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해방 이후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지원하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이 친일세력의 방해와 공작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정부 수립문제에 있어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노선을 확실하게 했고,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9479월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UN)에 이관했다. 즉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이 점차 이승만과 친일세력에게 유리해져 갔다는 것이다.

(1947년 유엔 총회 제1차 위원회에 참석한 임병직)

 

유리한 기회를 얻은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을 유엔으로 보내 로비 활동을 지속했고, 19471114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소련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43:0으로 가결시켰다. 결의안에 따르면 남북총선거 실시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뜻했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고 나서 3달 뒤인 19482월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

(메논과 모윤숙, 일설에 따르면 친일파 모윤숙은 메논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즉 모윤숙이 허리한번 돌리니 메논이 이승만에게 설득당했다는 얘기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남북한 선거관리 국가로 필리핀, 엘살바도르, 중국, 프랑스, 러시아, 캐나다, 오스트리아, 인도 대표로 구성하고 인도대표 메논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북한의 입북거부와 관련, 남한만의 선거 실시 여부에 대해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의 손에 한국의 장래, 특히 이승만의 정치적 운명이 달려 있었다. 8개국 가운데 ~번 국가들은 남한만의 총선을, ~번 국가는 통일정부 수립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메논 의장의 손에 단정 수립 여부의 결정권이 부여되었다. 당연히 이승만은 인도의 메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권력의지를 작동했다. 친일매국노이자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먹었던 모윤숙은 친일경찰을 등용했던 조병옥장택상과 더불어 메논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극우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이 책은 메논을 건국을 도운 애국자로 묘사한 책이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밤이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메논을 데려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했다. 모윤숙은 드라이브를 빙자,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 이승만과 만나게 하고 프란체스카가 전해주는 연명서를 귀로에 메논에게 전하였다. 메논이 유엔총회로 떠난 후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의 이름으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호소하는 서신을 띄웠다. 메논은 유엔 소총회의에서의 보고서에서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네루가 인도의 국민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박사는 한국의 영구적 분할을 옹호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라고 이승만을 극구 찬양하였다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모윤숙의 역할이 컸다. 세간에서는 모윤숙의 미인계가 메논을 움직였다고 보았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을 미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두고 토론 끝에 226일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위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역사적 결의를 하게 되었다.

 

1948년 들어 남북한 정부가 단독정부 수립 방향으로 나서자 임정의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있을 수 없다.”며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협상에 나섰다. 이로인해 1948427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15인 요인회담도 열렸다. 남측 대표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엄항섭, 북측에서는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남북회담 또한 결과적으로 무산됐고, 김구를 포함한 남측 대표단은 5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510일 드디어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것이 바로 5.10 총선거였다. 남북협상파와 민족주의계열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실시된 510총선거의 결과는 71.6%의 투표율로, 당선자는 무소속 85, 이승만의 독촉 55, 한민당 29, 대동청년단 2, 기타 19명이었다.

(38선에서 사진을 찍은 김구,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는 분명 반공주의자였지만, 이승만과 달리 1948년 남북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반탁을 외친 것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나서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고, 남북협상은 늦은 선택이었다. 확실한건 1948년 시점에서 그는 분단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총선 당시 이승만과 대립했던 인물 중 최능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해방 후 조만식의 건준 산하 평양치안부장을 역임하다 월남한 그는 친일경찰을 많이 등용하는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미군정청의 수사국장 자리에서 해임됐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를 선언하고 등록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후원과 지지를 받는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그의 후보등록 서류를 탈취했고, 결국 최능진이 딘 군정장관에게 이승만 측의 등록방해 사실을 항의하여 마감일을 연기하면서 가까스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측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등록된 서류의 추천인을 문제삼았다. 당시 선거법에는 후보 등록에는 200명의 주민 추천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최능진 추천인들을 협박하여 추천 사실을 부인하도록 한 것이다. 최능진은 결국 후보등록이 말소되고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최능진, 그는 이승만의 정적이었다. 결국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당한다.)

  

이승만의 찌질함과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01일 수도청 형사대가 최능진을 체포하여 종로경찰서에 구금했다. 구속영장에 의하면 최능진은 독립운동가 서세충, 광복군 출신인 여수 6연대장 오동기 소령 등과 공모,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정권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었고, 1019일 최능진은 내란음모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시기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풀려난 최능진은 즉시 종전평화통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한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2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최능진을 체포했던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악질 친일파였고, 보도연맹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훈장까지 수여할 정도로 그를 매우 아꼈다.

 

1948724일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이 724일 중앙청광장에서 거행됐다. 이승만은 취임사 말미에 대한민국 307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하여, 때로 상해임정을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취임사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절이라 하는 것은 이승만의 발언마저 무시하는 무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민족청년단)

내무부장관 윤치영(독촉국민회)

외무부장관 장택상(전 수도경찰청장)

국방부장관 이범석(국무총리 겸임)

재무부장관 김도연(한민당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이 인(전 검찰총장)

문교부장관 안호상(서울대 교수)

농림부장관 조봉암(국회의원)

상공부장관 임영신(여자 국민당수)

사회부장관 전진한(국회의원)

보건부장관 구영숙(무소속)

체신부장관 윤석구(국회의원)

교통부장관 민희식(군정청운수부장)

무임소장관 이윤영(조민당부당수)

무임소장관 지정천(대동청년 단장)

총무처장 김병연(조선민주당)

공보처장 김동성(합동통신사장)

법제처장 유진오(고대교수)

기획처장 이순택(연대교수)

심계원장 명제세(한독당)

고시위원장 배은희(목사)

감찰위원장 정인보(국학대학장)

 

비록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이용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초대 내각에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우긴 했었다. 이렇게 해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해방 정국 시기 자신과 결탁했던 한민당을 배제했고, 이것은 양자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민당은 서서히 반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초대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유산몰수 유산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실행했는데, 이것은 태생적으로 친일지주들이 많은 한민당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임정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은 반민특위에서 일하며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아쉽게도 그의 노력은 이승만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이 매우 곤혹스러워 했던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이승만과 결탁했던 친일파들은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한 상태였고, 사회 각계에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남한내에서의 친일파청산의 시도는 미군정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군정장관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제헌국회는 헌법 부칙에 반민법의 제정을 명시하고, 국회는 반민법 제정 주도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194891일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특위는 정부 안에 있는 친일파 숙청안을 의결하면서 이승만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교통장관 민희식과 법제처장 유진오, 상공차관 임문항이 대상이었다. 반민특위가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93일 담화를 발표, 특위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시작부터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 이승만을 반민특위가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신익희와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할 것을 종용하였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심지어 해방 후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고문하여 월북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 노덕술은 그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애국자였다. 따라서 그는 노덕술을 옹호하고 비호했다.

 

194922일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헌법위반이라는 말 안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그해 4월에는 노덕술을 포함한 친일경찰 출신들이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부탁을 받은 테러시트트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그 사건은 미수에 그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충격은 엄청났다. 이렇게 친일세력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측은 5월에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호를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이 남로당프락치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6월에는 이들 외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을 발표하여 노일환·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11명의 의원을 구속했다. 구속된 의원 대부분은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국회에서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등을 제안했던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쉽게 말해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빨갱이 몰이 했던 것이다.

(노덕술, 노덕술은 악질친일경찰로 무수히 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까지 고문했었다.)

 

(반민특위측에게 체포된 노덕술, 노덕술은 반민특위 활동 당시 체포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애국자라고 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다.)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했다. 이승만은 심야에 은밀히 반민특위위원장의 공관으로 김상덕을 찾아가 노덕술 등을 석방할 것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차관을 하던 장경근 휘하의 경찰병력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른바 6.6 사건이다. 국립경찰의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그들은 조사서류를 탈취하고 요원들을 폭행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이렇게 해서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방해오 와해되고 말았다.

(반민특위 습격, 1949년 6월 반민특위는 장경근이 지휘하는 경찰에게 사무실이 습격받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것도 당연히 이승만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다.)

 

(반민특위후손모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특별법의 법적근거마저 모두 제거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각종 권력기관의 완장까지 차게 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민특위 해체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처벌 받은 친일파는 단 한명도 없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로 포장했다. 또한 이들이 이후 대한민국에 등장할 독재정권의 주구가 됐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적을 방해했고, 그를 이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또한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의 심각한 악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어난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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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의 힘을 빌리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1945815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815일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발빨리 움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몽양 여운형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고,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며 일장기 말소사건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일제의 그 어떤 회유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42년 도쿄에서 미군의 폭격을 직접 경험했던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고, 1944년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준비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천황이 항복하기 전 자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당시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이 있던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8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한반도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고만장했던 친일파들은 목숨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거기다 몽양 여운형 또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친일파들에게 있어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해서 한반도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했다. 한반도 이북에 입성한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하여,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작업들을 단계적으로 해나갔다. 한반도 이북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자,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대에 서야했다. 그들 중 생계형 친일의 경우 용서받거나 인민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악질 친일파들의 경우 처벌받았다.

(얄타회담,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처벌받는 다는 소식은 한반도 이남에서도 전달됐다. 한반도 이북은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부터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일본의 행정체계가 붕괴되었지만,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여운형의 건준이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지만, 조선 총독부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아더는 아베 총독에게 포고문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총독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이전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빅3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그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45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했다. 미군이 상륙하기 2일 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자,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무찔러 준 것에 대해환영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반도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본인들 스스로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99일 서울에 입성하여 그들이 발표한 포고령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친일파들이 살기 위해 해야할 일은 분명했다. 점령군으로써 한반도 이남을 다스리게 된 미군정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에겐 어떠한 나라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큰 비전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도좌파 여운형이나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그들은 친일파로서 단죄당할 것이 분명했다. 임시정부의 김구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군정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발빠르게 움직였던 세력은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세력을 등용했다.)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다. 지난번 5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귀국하기 전 주일미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와 한반도 이남에서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던 하지 사령관과 일본에서 만났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맥아더가 지원해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 사령관과 함께 귀국하게 된 이승만은 그의 주선으로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그는 기자회견과 귀국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승만의 귀국 기자회견 내용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곧 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나오고 지금까지 애만 써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미주를 떠나 하와이, , 일본 동경 등을 거쳐 급기야 어제 저녁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과 얘기해 본 즉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 갈 수 있음을 믿었다. 여기에 나는 우리들의 합동이라는 것을 크게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3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으므로 국내 형편은 잘 모르나 차차 알아가면서 여러분과 합동해 가겠다. 특히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 정부의 대표도 아니오 외교부의 책임자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끝까지 한국의 평민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군정부와 아무런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나 여기 온 길을 열어준 것은 이분들이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 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미한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많았다.”

(미군정의 서울 입성, 이것은 또 다른 외세의 지배를 뜻했다.)

 

당연히 그의 회견과 방송에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이나 미군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는 동포들의 일심협력과 맥아더, 하지, 아놀드 장군의 고마움안 피력할 뿐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일단 독립운동 세력들은 그와 힘을 모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10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이 결성됐고, 이승만은 독촉의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것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 및 사회단체 200여 개가 모여 구성된 협의체였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는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지만, 11월 중순 조선공산당 측에서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했고, 결과적으로 독촉은 해체되었다.

 

1123일 김구를 포함한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했다. 김구를 포함한 임정인물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는 하지가 동원한 환영식이 거창하게 열렸지만, 이들이 귀국할 때는 미군장교 1명과 통역 한명만 마중나올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김구와 같은 임정인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줄 수 있었지만, 김구에게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도자로 칭송받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식됐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상웅은 자신의 저서 이승만 평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와 관련 이른바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한국인 250여 명을 구속하면서, 역설적으로 이승만의 존재가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전파되고,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성은 해방 정국에서 그의 위상을 한껏 부풀리는 기능을 하였다. 여기에 젊은 날의 행적,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임시정부 대통령,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복합되고 부풀려지면서 명성과 함께 신비성을 더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그의 행적이 이런 맥락속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1945916일 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를 포함한 우익인사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다. 이 한민당은 지주와 친일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득권 정당으로 미군정의 구미에 맞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10월에 귀국한 이승만과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친일파와 지주들을 중심으로 뭉친 한민당은 이승만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힘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가 해산되고 나서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노선을 표명했다. 그는 19451221<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했거니와 우리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극렬파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이 분자들은 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돌아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노선과 아집은 모스크바3상회의를 기점으로 더 심해졌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3상회의 당시 미국은 신탁통치를 필요하다면 5년 더 연장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그보다 더 빨리 독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모스크바3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왜곡돼서 전달되었다. 그 바람에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성립이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연히 반탁을 외쳤고 선동했다. 이승만이 반탁을 외침에 따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세력들 또한 반탁운동에 나섰고,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모스크바3상회의 오보, 모스크바3상회의의 내용은 동아일보에 의해 왜곡보도됐다. 미국은 신탁통치 연장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진실은 반대로 보도됐다. 결국 이 왜곡된 보도는 왜곡된 반탁운동을 창조해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시위대, 반탁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들과 이승만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한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신탁통치 논쟁이 거치면서 한반도 이남에서의 좌우갈등은 극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46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지만,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떠한 성과물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6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었다. 정읍 발언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체제를 만들자는 이승만의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등극한 극우단체와 친일집단은 좌익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특히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좌익에 대한 탄압은 더 극심해졌다. 1946101일에는 대구에서 미군정에 맞선 항쟁이 일어났고, 결국 친일 경찰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 발언은 이승만이 통일보단 분단과 외세의 결탁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하자, 이는 미군정에서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외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좌우합작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이승만 세력들의 의도적인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테러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여운형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우익세력들이 여운형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세력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지도자 여운형은 1947719일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7312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좌우합작운동 시기 미국에 로비를 지속적으로 넣었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의 반공 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론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610월 이범석에 의해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 즉 족청은 이승만의 방계 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좌익에 대한 폭력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승만 주변으로 몰린 친일파들은 각종 정보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이범석이 만든 족청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들은 이승만을 위해 좌익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이 만들어낸 각종 경제적 실패로 인해 시위를 하던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공장이나 철도 그 외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경찰과 함께 그들을 진압했다. 여기엔 김두한과 같은 조직폭력배 조직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인 집단은 해방 후 친일지주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행위를 경찰의 비호아래 저질렀다. 당연히 이들은 경찰과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았다.

(여순항쟁 당시 사진, 여순항쟁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민중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항쟁이다. 그러나 이 항쟁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당시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권력이 있었다. 일단 그는 맥아더와 하지 그리고 미국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이용하여 통일정부수립을 막았고,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또한 그들과 결탁하여 극우세력의 테러 행위을 방관하거나 옹호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끝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맡겼다. 유엔에 맡겨진 이후 남과 북은 분단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섰고, 1948815일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정부 수립 과정은 참으로 잔혹하고 혹독했다. 소위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학살당했다. 좌익은 씨가 말렸고, 이들 중 일부는 지리산과 같은 곳으로 숨어서 외로운 투쟁을 한국전쟁 이후까지 해나갔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물러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은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점에서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친일파 척결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란 지도자는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승만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악행은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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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이승만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은 스위스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이승만을 재조명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평가절하했던 이승만은 19321110일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건대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배려로 19333월 국무의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국제연맹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승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1925년 탄핵당한 이후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다. 결국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이민온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승만이 국제연맹일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을 당시 그는 몇 개월 뒤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는데, 쫓겨났었다.

 

1930년대의 국제정세는 급변했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3년엔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침략의 길을 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에선 파시스트 히틀러가 민주적인 투표로 지도자가 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세계를 감돌게 됐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파시즘 진영과 민주진영으로 나뉘어 전투를 치르게 됐고, 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39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 내막기, 이 책은 1941년 이승만이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을 예상하고 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에게 경전급으로 찬양받는 서적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 계속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393월 수도 워싱턴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다. 또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거듭 요청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의 서유럽 정복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했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는 미국과 일본사이에 곳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됐다. 또한 그는 그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교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승만은 매우 반공적인 인물이었기에 불화를 일으켰다. 1940년 광복군 창설이 있을 당시, 백범 김구는 약산 김원봉을 임정에서의 입각을 추진했는데.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은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하며 김구와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했다. 이것은 비록 반공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일제에 맞서 좌우를 연합시키려던 백범김구의 행적하고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공산주의하면 치를 떨었던 극반공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혐오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노예국화 하는 것이기에 오직 미국의 성의있는 원조에 기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인 1941년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한 것에 대해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서술은 어떤면에선 기회주의적 처사였다. 그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한 것은 사실 크게 이상한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팽창으로 나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0년 일본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이것은 소위 미영프(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승만이 그 책을 쓰던 1941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까지 내렸다. 즉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전황으로 치닷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놓여있던 조건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예측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정과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라는 인물을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며 매도했었다.

 

1939년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던 이승만은 1941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자기자신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임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대미 외교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시점까지 절대로 혁명가나 철저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미활동을 전개하게 된 시점은 194112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부터였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승만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승만은 19433월말 하원의원 오브리엔을 통해 한국 임정의 승인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국무장관 헐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혼란과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여,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기각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대국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 OSS의 책임자였던 도노반은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와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는 정한경, 이원순, 임병직 등이 그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뒷날 이승만이 집권했을 때 외무장관(임병직), 주일대표부 초대공사(정한경),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이원순) 등의 요직을 지내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는 주구장창 외교활동을 견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42년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지속중이던 와중에 소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리는 활동을 했지만, 한편으론 무장투쟁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자격을 갖고 있었고,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를 통해 실제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카탈리나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엔젤레스 롱비치 인근에 있는 카탈리나 섬은 CIA의 전신인 OSS를 훈련시키는 훈련소로 활용되었었다. 당시 이승만이 추천한 일부 한인 대원들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년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필자는 고래투어 하는 배에 올랐다가 우연히 카탈리나 섬을 육안으로 보게 되었는데, 당시 이 사연을 선원에게 얘기해주니 흥미로워 했다.)


(서울 1945에서 재현된 OSS 훈련, 한국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71부작짜리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드라마 주인공 중 한명인 이동우가 전쟁 막바지에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받는다.) 

 

 

이승만은 당시 OSS의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였던 굿펠로우로부터 큰 호감을 받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OSS가 중경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와 함께 협력하여 대일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여기에는 이후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도 관여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굿펠로우와 만나 미주에 있는 한국인을 대일전에 참가시킬 계획을 세웠다. 1944년 한일 게릴라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넵코(NAPKO) 프로젝트가 수립되었고, 이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관여했다. OSS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권 초기 활동했던 장석윤, 장기영, 유일한 등이 있다. 그들은 1944~1945년 당시 켈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 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즉 이들이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1943년 일본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패배했고, 1944년에는 일본령 사이판섬에 미군이 상륙했으며,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3월에는 이오지마가 함락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6월에 오키나와가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1945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즉 UN을 창설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발언이었다. 즉 이승만은 예전에 그랬듯이 반소련 입장을 미국에게 강력히 보여주고 싶었던 목적도 있었던 것을 보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7월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 전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반소 반공의 입장을 맥아더에게 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강력했던 맥아더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전적으로 돕게 된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체류 중에 여러 차례 반소 반공의 입장을 밝히는 언론 기고를 하였는데 맥아더에게 보낸 것은 이후 자신의 한반도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 (한국-필자)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주리 호에서 공식적으로 치뤄진 일본의 항복,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이것이 맥아더로 하여금 이승만을 한국의 반소 친미 지도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의 귀국을 전적으로 돕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도 끝이 났다. 이승만은 해방의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는 이제 해방된 한반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5104일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떠나 10일 뒤인 14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거기서 맥아더를 통해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를 만났다. 당연히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을 뿐 독립투사들의 노고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이승만, 이 사진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맥아더와 이승만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자 답게 이승만을 좋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던 초기 때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당연히 이승만이 추종하는 나라 미국의 입장이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섬기면서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데 아주 최적화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독립운동의 분열을 낳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미국을 위해선 친일적인 발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이승만의 한반도 귀국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암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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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치명적인 파괴를 가져왔고, 전후 분단모순을 극대화했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다. 말 그대로 휴전이란, 전쟁을 잠깐 쉬는 것으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종결은 1945년부터 시작된 분단 모순을 극대화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부터 반복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해오던 이승만 정권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그리고 휴전회담 이후 자유당 독재정치를 공고히 하면서도 정복주의적 통일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과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도 이승만 정권과 다르지 않게 북을 적대시하는 반공주의적 정책을 따라왔다. 따라서 반공주의라는 시대사적인 트라우마 및 부작용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학자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정부가 제시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다면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한 각오를 해야 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30년의 지적·사상적 암흑기는 민중에게 한국전쟁을 국가가 제시한 시각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미약하게나마 부여했다. 특히나 1980년대 극심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안티테제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실제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제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은 운동권에게 있어 한국전쟁을 정부가 제시한 관점과는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1987년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도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된 반공주의라는 망령은 민중 대다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1990년 전 빨치산 출신인 이태라는 인물이 자신의 빨치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남부군이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지만, 보수세력들의 극심한 저항과 항의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고,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그러나 한국전쟁 또한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역사학자 EH카의 주장대로 역사란 현재와 과거 끝없는 대화이기 때문에 기존 주류사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재로 해석할 수 있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은 국가에 따라 다양하다. 우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은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으로 인식하는 의미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은 북의 대중매체나 자료들에서 자주 사용된다. 그에 비해 오히려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경우는 “19506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전쟁이라 하여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물론 현재는 한국전쟁이라는 표현도 쓰긴 하지만,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반면에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개입을 했던 미국과 중국 또한 명칭이 다르다. 1950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군사적 개입을 감행했던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지금도 중국에서 한국전쟁을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한국전쟁이 지금까지 미국이 치른 전쟁에 비해 잊혀졌다 하여 소위 잊혀진 전쟁(Forgotton War)’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의미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의미가 존재한다. 이런 미국의 인식은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의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는 발언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2016년 임기 마지막에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오바마의 발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바마의 발언이 보여주듯이 이런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발현됐다. 이와같은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듣지 않게 만들었고, 1994년 한반도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으며, 20029.11 테러라는 충격과 공포를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부시의 소위 악의 축(Axis of Evil)’발언과 북에 대한 경제재제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간과한다면, 한반도의 위기는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반공주의적 관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런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북한 핵무장의 맥락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에서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분명 내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해석했다. 후버 연구소 출신의 영국인 우파 학자 로버트 서비스는 자신의 저서 스탈린 강철권력에서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많은 부분 스탈린에게 있었다. 그가 만일 김일성에게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무장도 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치열한 내전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스탈린 강철권력 p.937~938)라고 할 정도다. 로버트서비스가 자신의 책에다 쓴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 또한 한국전쟁을 그렇게 본다. 미국학자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은 “1950년 스탈린과 김일성이 시작했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625일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공주의 학자 애덤 울람은 199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 불렀을 정도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서방에서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3. 한국전쟁의 기원

 

위에 상술한 것처럼 미국과 서방 그리고 한국이 인식한 한국전쟁은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1950625일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진격한 시점부터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은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과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단을 예시로 들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의 한반도 상황이나 그 이전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놓여있던 상황은 항상 생략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되기 마련이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에 큰 영향을 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전면적인 전쟁이 시작된 날인 1950625일부터 보지 않고,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이 이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선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이력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친일파들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1912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기부터 소규모 독립군대를 조직해 중국 공산당과 더불어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1933년 둥닝 전투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공세를 퍼부었고, 김일성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 스중헝을 구하며 그 일대에서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던 민생단 사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김일성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기 1달 전인 19376월 김일성 부대는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 치하의 보천보 지역을 습격하여 유격전을 벌이다 후퇴했고, 이후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김일성의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착수했고, 김일성과 그의 부대들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섰다. 그러던 1940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부대는 홍기하 지역에서 대략 100~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고,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번지던 그해 말 쯤에 소련으로 넘어가 이후 소련군 제88여단에 소속된다. 그러나 남아있던 잔존 항일 유격대는 1942년까지 작전을 전개했고, 1945년 소련 연해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동료들은 소련의 푸가초프 함을 타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기반을 다졌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그의 만주 빨치산 부대 동지들의 삶이었고, 그들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는데, 이러한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인 출신들로 만든 부대가 활동했었다. 이들이 바로 간도 특설대였다. 당시 간도특설대에는 대한민국에서 소위 명장 내지는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의 지휘관 백선엽도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는 일본이 김일성을 추적하여 죽이기 위해 이용했던 군 장교 김석원도 있었다. 당시 그의 일본 이름은 가네야마 샤쿠겐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군 대좌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독립군을 토벌하러 나섰던 이들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군의 핵심이 되었고, 대한민국 군부를 장악한 이들은 한국전쟁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김일성과 항일연군 출신의 장성들이 지휘하는 군대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말하는 한국전쟁의 가려진 진실이었다. 국내에서 주장된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처럼 숨어 지내던 시절이 있어서 지어진 음모론일 뿐 이를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박정희 정권 시기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마저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김일성이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맞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또한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이 접수하게 된 한반도 이남은 민중의 불만이 들끓었다. 1944년부터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해방 후 자신의 조직이었던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하여 새나라 건설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미군정은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윈회와 그가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과거 조선 총독부의 행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는 19458월 대일선전포고 이래로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며 제국주의 군대를 무찔렀던 소련군의 군정 통치하고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도왔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은 친일세력인 한민당과 결탁하여 사회의 더 나은 사회와 임금인상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바라던 민중을 상대로 빨갱이 척결에 나섰다. 심지어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도 이승만 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남한 사회에서 전국적인 노동자 투쟁을 벌이던 세력들은 결국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진압당했다. 194843일에 시작된 제주 4.3 봉기는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잔인함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제주4.3 봉기와 이에 반대하여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일으켰던 여순 민중항쟁은 미군정과 우익 세력들에 의해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민간인 학살을 야기했으며, 이 봉기를 진압한 이들은 채병덕과 같은 친일세력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게 1930년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해방 이후 민중들의 투쟁과 미군정의 폭압 통치로 인해 민중들이 이들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950년 북한에서 일으켰다고 알려진 한국전쟁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과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이승만 친일 친미 제국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4. 민간인 학살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에는 미국과 한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도 있다. 위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며 예시로 든 제주 4.3 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은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초래했다. 4.3 항쟁에서 학살 당한 민간인은 최소 3만 명에서 45000명에 해당되는데, 이들 중 최소 80% 이상이 진압을 감행했던 친일 출신의 우익 경찰들과 이북의 친일 지주 출신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의 저지른 짓이었다. 이들이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 노인 아이었고, 1살 내지는 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매우 많았다.

 

제주4.3 항쟁의 진압을 반대하여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여순민중항쟁 또한 최소 수천 명에서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형성하여 지주와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을 했던 좌익 성향의 게릴라들과는 달리, 봉기를 진압하러 온 토벌군인들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여순민중항쟁에서 진압군으로 나섰던 인물 중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파푸아뉴기니와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투를 치렀던 김종원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체포한 민간인들을 모아놓고 일본도로 민간인들의 목을 배는 것을 즐겼으며, 이런 일본군 출신의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는 진압군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학살당한 이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런 잔인한 민간인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도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특히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학살의 대명사가 됐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신속하게 진격을 하자, 후퇴하던 한국군은 보도연맹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보도연맹원들 대다수가 그저 쌀이나 보리 조금 더 준다는 이유로 가입하거나, 가입하면 어떤 경제적인 혜택을 기대하고 어려운 삶을 자력으로 극복하고자 가입했던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엄연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승인으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 명에서 50만 명이 학살당했고, 많게는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민간인 학살은 1950915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진격하면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울을 수복하고 난 이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고, 지리산에 고립된 빨치산들을 토벌하면서도 일어났다. 1951년에 일어났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보면 이 또한 학살당한 이들 대다수가 여성, 노인, 아이라는 점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 초기 북한의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은 인민재판과 같은 형식이었고, 주로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들 그리고 남한 군경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쉽게 말해 인민군은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도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한국전쟁 시기 좌익과 우익의 학살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인민군의 학살은 전체 사례에서 1/6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에서 초기에 신속히 군사개입을 감행한 미국도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68316일 베트남의 미라이라는 마을에선 30명의 미군이 504명의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1950726일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마을에선 미군 제1 기병사단에 의해 3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또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우익 군경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전혀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좌익 소탕한다는 것을 옹호하며 이를 전적으로 도왔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전쟁범죄는 역시 무차별 폭격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개입했을 때부터 제공권을 장악했는데, 폭격 또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이나 도쿄 폭격 같이 대규모의 융단 폭격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석기시대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폭격 방식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에선 무수히 많은 남북한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의 난민이 생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전역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의 양은 50만 톤이고, 그 중 16~20만 톤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3년 동안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635000톤이었다. 이것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5000톤이 된다.

 

미군의 폭격은 비단 북한만을 대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북한의 피해가 가장 커서 수도 평양은 쑥대밭이 되었고, 원산은 달이 표면으로 변했다. 심지어 미군의 B-29 폭격기는 북한 뿐만 아니라,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에게도 행해졌다. 중국의 단동이나 심양같은 곳도 미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또한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남한에서도 일어났다. 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때, 미군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땅 전체를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1951년 한국전쟁이 다시 38선 부근에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도 미군은 남한에서 폭격임무를 수행했다. 이 폭격 임무는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미군은 북한과 남한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선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의 프랑스 입국을 거부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5. 결론: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명칭, 인식하는 관점, 전쟁의 기원, 민간인 학살까지 살펴보았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한국 현대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사실 남한 정부가 정부 수립 초기에 임정 독립운동가들과 남로당 출신이었다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전향한 조봉암을 초기 내각에 구성하긴 했지만, 사회에서의 큰 권력은 미군정과 결탁하여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문화계와 군, 대한민국 행정을 장악했다. 이승만 본인이 독립운동가였을지는 몰라도(이것도 매우 논란이 많지만), 그의 정권은 친일파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이후 여론조사에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반민중적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이 일반 양민에서 민간인이 되가는 과정은 베트남 전쟁에서 일반적인 민간인이 베트콩에 가입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이나 수색과 섬멸 작전으로 가족은 잃은 이들이 베트콩에 가입했듯이, 한국전쟁 시기 양민에서 빨치산에서 활동하게 된 이들 대다수가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반민중세력에게 가족을 잃거나 극심한 탄압을 받아, 복수심을 가지고 혁명군에 가입을 했던 이들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의 탄압을 받으면서 펜으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그 시기 전환시대의 논리를 집필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이던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1776년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현재 미국에서도 정통성을 북베트남과 호치민 정권에게 대도록 주고 있고, 대체로 전쟁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플 메탈 자켓, 74일생 등의 영화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주제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전쟁으로 돌리면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점이 한몫 하지만, 미국 언론에서 얘기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대한민국 우익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크게 다를 거 없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사실에서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과 서방세계에 민족해방전쟁으로 기억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북한의 지도부는 항일 빨치산에 두고 있었다. 굳이 당시 북한정권의 균형을 이루었던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까지 합치면, 만주항일 빨치산과, 일제시기 경성 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 중국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운동 세력 그리고 소련의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던 반파시즘 세력까지, 항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일본에서 신속히 투입한 스미스 부대가 맞닥뜨린 인민군 부대는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받은 조선족 사단이었다. 이 조선족 사단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던 혁명 군대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수구세력들에 의해 미화되고, 반공주의적으로 해석되는 주제다. 그래서 이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민감하고 심한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를 포함하여 한국전쟁을 다르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관점 또한 근거가 매우 타당하고, 기존의 반공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뒤집고 남을 정도로 실증주의적 사관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은 분명히 반민중적 정권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현재 남과 북의 상황이 어떻든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약산 김원봉 서훈이 논란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공개적으로 말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겠지만, 나중에 시대가 변했을 때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역사의 진실과 정직함을 추구한다면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이 부정당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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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오바마의 연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대략 200~3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초래한 이 전쟁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고, UN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의 지상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자 했다. 당연히 UN군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차지한 것은 미군이었고,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미국은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나갔다. 3년간의 전쟁에서 360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2150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항공모함·전함·구축함·순양함 등을 포함한 371척의 함대를 한반도 주변 해역에 배치했었다. 그러나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설사 빈말로라도 그것이 승리라고 말한다 치더라도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을 유지한 절반의 성공이었을 뿐이었다. 무승부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2013년 미국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전쟁은 미국과 대한민국이 승리한 전쟁이다.”라고 하며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연설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바마와 미국과 한국의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의 믿음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소위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의 반공주의자들과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일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협정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 전쟁 자체가 무승부이거나 양측의 반쪽짜리 승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선 한국전쟁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지고 이겼냐를 따질 생각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진짜목적은 미국의 오만함 혹은 정세판단 부족으로 빚어진 전쟁 초기의 패배 및 후퇴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 시작부터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의 미군의 전황을 다룰 생각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소련과 견줄만한 군사력을 길러낸 미국이 한국전쟁 초기 신속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동맹국인 한국에서 사실상 끝자락까지 후퇴한 것은 20세기 미국 전쟁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휘두르게 된 것은 19459월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시켰다. 한반도 이남에 절반의 패권을 장악했던 미국은 미군정이라는 형태로 통치를 했고, 일제시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승만을 지원했다. 이런 미군정의 지원으로 1948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 T-34 탱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군정기 전라도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던 인물로 확실히 한반도 분단론자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소위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북진통일론이란 말그대로 무력을 통해 북한정권을 정복해서 통일을 이룩하자는 주장이다. 1950년 미국은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 또한 한반도에서 점진적인 철수를 감행했고, 한반도 이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시기 한반도 이남에 남아있던 미군사고문단 500명뿐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대포나 트럭같은 군수물자들을 한국군에게 지원했는데, 스탈린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북한군과 비교해보았을 때 매우 열악했다. 이것은 결국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력에 큰 공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군대의 규모나 훈련, 장비, 기술 면에서 떨어져 있던 한국군은 인민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인민군은 38선에 있던 한국군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이승만 정부가 도망치면서 폭파해 놓은 한강 다리를 가설하는데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단기간에 한국군 측 중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춘천과 홍천을 점령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다. 1950627일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에서 북의 군사적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했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던 628일 미극동공군은 작전을 개시했고 629일에는 172회나 출격했다. 629일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일본 도쿄를 떠나 비행기를 통해 전선을 둘러본 뒤, 수원에 도착하여 이승만과 회담한다. 195072일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게 된다.

(한국전쟁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지상부대인 스미스 부대)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인민군 측 Yak 전투기들이 대다수 파괴되었고, 제공권은 미국이 장악하게 됐다. 19507월 초 미군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B-26 폭격기와 F-80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을 뒤덮었다. 72일 미군의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이후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제24 보병 사단 1개 대대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 75일 미국의 스미스 부대는 제107전차연대를 앞세운 인민군 제4사단과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스미스 부대의 전투원 504명 중 최소 150명이 전사했고, 31명이 실종됐다. 결국 스미스 부대는 T-34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 밀려 후퇴했다.

(대전 전투당시 포격 지원을 하는 미군)

 

거침없는 진격을 해나가던 인민군은 해방 5주년인 815일까지 임시수도 부산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그들에게 있어 충청도에 있는 대전을 점령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1950710일 미군과 한국군은 대전에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그로부터 4일 뒤는 714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4개 사단이 포병의 지원하에 공격을 했고, 미군이 가지고 있던 2.36인치 바주카포는 소련제 탱크를 파괴하는데 역부족이었다. 716일 한국군과 미군이 구축해 놓은 대전 방어선은 무너졌고, 19일에는 인민군이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전에 투입되었던 미군 사단을 붕괴시켰다. 여기서 미군 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을 포로로 붙잡았고, 최소 2000명 이상의 미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던 윌리엄 딘 소장)

 

대전을 함락시킨 인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한국군과 미군을 전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갔다. 대전 점령 이후 인민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남도 광주를 점령했으며, 726~27일 여수까지 점령했다. 이렇게 되면서 한국군과 미군은 경상도와 낙동강 쪽으로 후퇴하게 됐다. 19507월 말 경북 상주에 투입되었던 3600명 규모의 흑인 병사들은 인민군과의 전투에서 무기와 장비를 버려둔 채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19507월 말 미군과 한국군은 전선에서 92000명 규모(이중 절반은 미군이다.)로 인민군보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계속 퇴각했던 것이다. 병력 규모 면에서 인민군을 압도하게 되었던 것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물자지원을 끊임없이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게 지원받은 병력 중에는 미국의 제1기병사단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끊임없는 병력과 물자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한국군은 19508월 워커 라인(Walker Line) 즉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게 됐다.

 

8월 초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9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그곳에서 교착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즉 미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전세를 뒤집을 반격 한번 거의 해보지 못 해봤다는 얘기다.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한 이후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의 전투 과정은 미군의 작전 실패 및 패배의 기록이다. 이런 미군의 실패는 인민군의 전투능력을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져 과소평가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위에서 상술했던 스미스 부대 같은 경우에는 인민군이랑 교전하기 전 인민군은 공포에 떨면서 후퇴할 것이다.”라고 대다수의 미군은 생각했었다. 실제로 오산에서 공포에 떨면서 후퇴하게 된 쪽은 인민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

(낙동강 전선)

 

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인종차별은 미군내에도 있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12%가 흑인이었지만, 미군은 흑인들의 부대를 백인들과 분리했다. 그랬기에 인종차별을 당한 흑인 부대는 전투력이 매우 저하된 상태에 놓여 위에서 상술한 상주 전투에서처럼 후퇴하기 바쁜 경우도 있었다. 또한 미군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노근리라는 마을에서 대량 3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동양에 대한 무지도 여기에 반영되었다.

 

거기다 초반에 미군이 마주했던 인민군 병력은 전투 경험이 많은 정예부대였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 선봉대에 섰던 부대는 과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편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공산당 측 부대였다. 이들은 중국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미국의 지원을 받던 중국 국민당군 부대에 맞서 싸워 혁명에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인민군에게 밀렸던 이유는 허술한 군대를 보낸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미군 내부 문제가 심각하게 존재했던 것과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졌던 것도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소위 보수세력들이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이나 과오를 비판하는 건 색깔몰이 당하기 아주 쉽다. 따라서 브루스 커밍스와 같이 한국전쟁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그 시도 중엔 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과 오만함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 정길현, 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책과 함께, 2005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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