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만주를 침략한 수만 명의 일본군은 1932년에는 괴뢰황제 푸이(Puyi)를 내세워 이른바 자신들의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State of Manchuria)을 세웠다그러나 만주사변을 전후로 만주 지역에선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됐으며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싸우던 이들 중에는 만주에서 살던 혹은 만주로 결집한 식민지 조선인들 많았다이에 따라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게시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 초부터 1935년 봄까지 간도 지역에서만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3차에 걸쳐 이른바 대토벌을 벌였다여기에는 일본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하천용 군함까지 동원되었으며총 10만 이상의 병력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11월 중순에 있던 일제의 2차 대토벌에서만 보병과 기병 그리고 포병으로 구성된 6,000명의 병력과 항공기가 동원됐다.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도 자행됐다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마오쩌둥을 취재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Edgar Snow)가 쓴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도 중국의 붉은 혁명 연극에서도 일본의 만주 침공과 학살을 다룬 장면이 언급된다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만주사변 시점부터 혁명 세력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

(혁명가 웨이정민,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1941년에 전사했다. 또한 그는 민생단 사건의 피해자들을 막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김일성을 도왔다.)

 

일본은 간도에서 이른바 친일 단체를 이용한 공작을 감행했다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이용했었고그것이 바로 민생단이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어용단체였다당시 친일파 조선인 몇 명이 일본 이민당국을 설득해 동만지역의 항일무장세력에 대항할 민생단을 결성했다이들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연합을 분열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러나 민생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일본은 1932년 괴뢰정부 만주국이 모습을 드러내자 만주국이 내세운 5족협화(만주국을 구성한 만주족·한족·몽고족·일본인·조선인)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6개월 만에 단체를 해산시켰다.

 

민생단이 해산된 이후인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인물이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고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간행물인 민주조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었다.

 

민생단 주구들이 우리 당과 청년단에 침투했다부녀자와 아동들도 예외가 아니다틈만 있으면 민생단이 다 파고들었다적색구역과 백색구역적색 유격대 할 것 없이 민생단원투성이다토비와 농민들 중에도 민생단원이 있다.”

 

소위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논리가 먹혀 들었다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돼 형장이나 감옥으로 끌려갔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이 민생단 사건의 조선인 희생자는 최소 500명에서 많게는 2,0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유격대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1933년 코민테른이 파견한 양쑹은 당시 반민생단 투쟁에 관여했던 저우바오중을 통해상황을 보고 받고 경악했다 이에따라 하얼빈시 서기 웨이정민을 동만 지역에 급파했으며웨이정민은 회의를 소집하여 임의롸 체포구금살인을 불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민생단 사건은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불신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1935년 8월 제7차 코민테른 대회(Seventh World Congress of the Comintern)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가 천명한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이 채택되면서사실상 종결됐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동지인 저우바오중 가족이 48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일가와 찍은 사진.)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이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만주에 있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연합하여 더 가열차게 투쟁을 벌였고이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1930년대 초중반 만주를 피의 숙청으로 몰고간 반민생단 투쟁(민생단 사건)은 또 다른 인물을 체포했다가 항일 영웅으로 만들었는데그가 바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Kim Il Sung)이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김일성은 1932년 이른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구국군에서 조선인 항일 유격대인 왕청항일유격대를 이끌었다이들은 일본군의 대토벌에 맞서 전투를 치렀으며, 1933년 9월에는 동녕현성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했었다그러나 김일성 또한 민생단 사건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하여감옥에 수감되었었다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스중헝은 김일성같은 위대한 애국자가 절대로 민생단일 수 없다.”고 하며 그의 신원을 보증하여 김일성은 풀려날 수 있었으며재판으로 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까지 회복했다이후 김일성은 만주 항일투쟁의 붉은 별(Red Star)로써,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고7차 코민태른 대회 이후엔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김명호중국인 이야기 3한길사, 2014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와다 하루끼남기정(),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창비, 2014

 

조한성한국의 레지스탕스생각정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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