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베르 호자의 사진, 상당히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리스와 코소보마케도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와 맞닿아 있는 국가 알바니아(Albania)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점령당했었다산악지대를 주로 이루고 있는 이 조그마한 산악 국가는 당시 봉건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농업국가였고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던 나라였다이는 20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동맹세력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5개월 전 알바니아를 침공했었다.

 

이탈리아 군대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조그(Zog) 왕과 그의 정부는 도망쳤고체터스(Chetas)라고 불리는 일부 게릴라 부대들이 이탈리아군에 맞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당시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대략 5개 사단을 배치했다이로부터 대략 2년 동안 알바니아에 대한 정보는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역전되고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미 연합군이 승리한 이후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계획하기 시작하자알바니아인들은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9년 알바니아에 입성한 이탈리아군, 이탈리아군의 L3/35 탱크도 보인다.)

 

이 시점에서 알바니아의 주요 조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첫 번째로는 공공연하게 군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군장교 아바스 쿠피(Abas Kupi)의 지도하에 알바니아 북부 지방 일대에 있던 조그주의자(Zogist) 운동 그룹이다당연히 이들은 왕당파를 상징하는 세력이었다둘째는 알바니아 해안지대와 중부지방의 작은 언덕지대에서 활동하던 극우성향적 공화주의파인 발리 콤베타(Balli Kombetar) 즉 민족연합 운동 그룹이었다그리고 마지막은 이 글의 주인공인 엔베르 호자(Enver Hoxha)의 공산주의 그룹과 그들이 이끄는 LNC(빨치산부대였다.

 

알바니아의 지도자로 알려진 엔베르 호자(Enver Hoxha)는 1908년 오스만 제국령 알바니아에서 태어났다부르주아 출신 집안에서 자란 호자는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은 역사학 교수였고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을 시점부터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었다유학생활을 바탕으로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었다고 한다이탈리아군에 맞선 파르티잔 투쟁을 벌였던 호자는 1942년 말 왕당파 그룹이었던 게헤그(Gheg)의 게릴라 부대를 설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또한 그리스 공산당(KKE)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하고도 협력하는 관계였었다.

(독일군에 맞설 당시 호자의 전투 지휘를 표현한 상상화)

 

당시 영국의 SOE는 이탈리아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호자와 협력관계를 형성한 게헤그의 부대와 호자의 파르티잔에 관심을 기울였다이들은 그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공급해주고자 했고, 2개의 타격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었다그러나 1943년부터 이탈리아가 항복할 기미를 보이게 되면서 새 정부 수립 부분에서 갈등이 나타났다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축출되고 연합군에게 항복하자이번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군대가 알바니아에 들어왔다독일군이 입성하면서 파르티잔 투쟁은 고난을 겪었다독일군은 대략 3개 사단을 동원하여 수많은 게릴라 부대들은 몰아냈는데작전 개시 2주도 안되어 수세에 몰렸다독일군은 알바니아 점령에 총 4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파르티잔 투쟁 당시를 표현한 엔베르 호자의 상상화)

 

그러나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에 알바니아에 대해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거기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30만이 넘는 추축군의 병사가 티토의 파르티잔 부대를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따라서 독일은 전쟁이 끝나면 알바니아 철수 후 그곳에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독일군은 알바니아의 도시와 주요 도로들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고그 밖의 지역의 점령에는 소홀했다이에 따라 호자는 알바니아의 나머지 부분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됐다. 1943년 가을 호자는 그의 병력을 동원해 정적인 발리 부대를 공격했는데발리 부대는 여기서 독일군과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점령 초기부터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체터스는 독일군과 거의 싸우려 하지 않았다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알바니아에 침투했던 SOE의 여단장 트로츠키 데이비스(Trotsky Davies)는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알바니아에서 활동했던 독일의 Waffen-SS, 이들은 결국 1944년에 알바니아에서 물러나게 된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의 깃발)

 

1944년 봄 영국의 SOE는 조그주의자(왕당파세력인 쿠피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레지스탕스 봉기를 일으키고자 했지만당시 이 그룹은 친나치파 문제와 더불어 조직 내의 분열에 휩싸여 있었다이와 대조적으로 호자와 그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세력을 확장했고, 1944년 1월에 5천 명이었던 조직이 5월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이에 따라 연합국은 이들에게 군수품을 포함한 물자를 공중으로 지원했다호자의 빨치산 부대는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지역을 확장하고독일군 호송대와 나아가 수비대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11월 알바니아를 해방시킨 호자의 빨치산 군인들)

 

그해 6월 독일군은 제1산악사단을 창설하여 북부의 연합군 교두보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하여 빨치산들은 산속으로 쫓아내 버렸지만1산악사단이 유고슬라비아에 배치되자 다시 독일군에게 게릴라전을 감행했다이후 독일군은 불리해지는 전황에 따라 알바니아에서도 후퇴하게 되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5개월 뒤인 1944년 11월에 호자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궁극적으로 알바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에 이른다이로써 알바니아가 해방된 것이다빨치산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5천 명에서 6천 명 이상의 독일군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알바니아에서의 전쟁을 다룬 관련 서적)

 

그로부터 1년 뒤인 1945년 알바니아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스탈린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총선거를 실시했다이에 따라 1946년 엔베르 호자를 지도자로 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탄생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냉전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인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군사적 패배를 경험한 전쟁이다총인원 280만의 참전했고, 5 8천 명이 전사했으며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군사적 수단을 미국은 이 전쟁에 동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그와는 별개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전쟁이기도 하다. 1776년 건국 이래 경험해보지 못한 대규모 반전운동이 미국 내에서 일어났고심지어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마저 자신들이 받은 훈장을 백악관 건물에 던지는 일도 일어났다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전쟁의 주체인 미국에서도 대규모의 반발에 휩싸이게 됐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1960년대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공산 월맹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월남을 구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었다그러나 이는 박정희 정부가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내세운 주장이었을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의 원인은 1971년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가 유출되면서 그 진상이 드러났다이것은 결국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음모와 계략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즉 당시 미국이 적으로 내세운 북베트남의 호치민과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의 베트콩 전사들은 과거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따라서 오늘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베트남을 침략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미국과 디엠정권의 제네바 협정 파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됐다그러나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에 물자를 지원하던 미국은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시켰다물론 여기에는 “2년 이내에 남북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이에 따라 북베트남에는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호치민 정권이 들어섰고남베트남에는 과거 프랑스가 지원한 바오다이 정권이 유지됐다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카드가 있었다그것이 바로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이승만인 응오딘지엠은 제네바 회담 시기 바오다이가 총리로 임명한 인물로 공산당에 대한 혐오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우선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바오다이 황제를 부정선거로 축출하고, 1955년 남베트남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이와 더불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남베트남에서 항불투쟁을 했던 전직 베트민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 했으며미국 아이젠 하워 대통령과 더불어 총선거를 파기해 버렸다.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 총선거를 파기해버린 이유는 간단했다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사실을 이 두명의 반공주의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총선을 파기함과 동시에 응오딘지엠은 전직 베트민 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구금하고 처형하는 천인공노할 만행들을 남베트남 곳곳에서 저질렀다그러면서 남베트남의 내각을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인물들이 아닌 가톨릭 신자들과 디엠의 일가친척들로 구성했다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좌관으로응오딘 누의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자기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2.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창설과 케네디 정부의 고문단 지원

 

제네바 협정을 파기하고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한 미국은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반공기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미국의 남베트남 정권 지원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와중에 진행됐고응오딘지엠 정권 하에서도 지속됐다이에 따라 남베트남에는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이 활동했다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막장에 가까운 통치를 통해 이미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특히 가톨릭 우대 정책과 불교도들에 대한 탄압 그리고 전직 베트민 인사들에 대한 구금을 가속화했다그 결과 분노한 민중은 1960년에 군사조직을 창설했는데 그것이 바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다.

 

초기의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활동했었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은 과거 프랑스에 협력한 반역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남베트남군 보다 훨씬 높은 전투력을 보였다거기다 남베트남군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미고문단이 지원한 무기들이 베트콩측에게 넘어갔다베트콩의 활동이 급증함에 따라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고문단 지원도 급증했는데특히 존 F. 케네디 정부가 등장하면서 확장됐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부터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했다고문단으로 파견된 병력 중에는 이른바 그린베레로 불리는 대게릴라전 특수부대도 있었다. <베트남 미국의 홀로코스트>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마틴 쉰의 표현을 빌리자면프랑스 베레모에서 미국의 그린베레로 바뀐 셈이다이들은 남베트남군을 지원함과 동시에 남베트남 지역에 있는 소수민족들을 민병대로 훈련시켰다또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사용과 인체에 치명적인 고엽제 살포를 허용한 장본인이었다이에 따라 베트콩이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남베트남의 시골에는 네이팜 폭탄과 고엽제가 살포됐다그리고 미군의 최신식 전투 헬기와 장갑차량 등의 기계화된 전쟁무기들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됐다즉 미국은 베트남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벌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이 시점부터 동원했다더 나아가 케네디의 최측근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를 도와 전략촌 계획을 세웠고이런 전략촌 건설은 남베트남 농민들의 반발을 제대로 샀다그 결과 대다수의 전략촌은 1963년에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다.

 

3. 응오딘지엠 암살과 통킹만 사건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콩들은 남베트남군과의 전투에서 항상 우수한 성과를 올렸고남베트남군은 부정부패와 무능력 그 자체였다그리고 케네디 정부가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독재 정치와 부정부패로 인하여 민중들의 반발을 제대로 사고 있었다특히 1963년 6월 남베트남의 한 승려가 수도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하자민중들의 반응오딘지엠 집회도 더 심해졌다응오딘지엠 정권은 반체제 시위를 계엄령으로 대응했고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구금되고 투옥됐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폭력적이고 부패한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케네디는 CIA를 동원하여 남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제거해버린다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이 정권 또한 쿠데타에 시달렸고정권 전복을 시도한 쿠데타는 1965년까지 지속됐다즉 이렇게 되면 남베트남은 민중 봉기로 무너질 상황이었다이런 혼란속에서도 미국의 지원은 지속되어 1964년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가 3만 명을 돌파했다.

 

혼란스러운 남베트남 상황에 우려를 느낀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는 맥스웰 테일러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그리고 로버트 맥나마라 등과 논의하여베트남 침략전쟁을 시작할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했다그것이 바로 통킹만 사건이다이들의 계획에 따라 1964년 7월 31일 남베트남 공격 보트들이 다낭을 떠나 북베트남 영해에 진입하여북베트남의 섬 혼메(Hon Me)와 혼니우(Hon Nieu)에 상륙했다또 한 이들은 그 전에 라오스에서 비밀리에 공중 작전을 벌였다.

 

작전에 따라 북베트남 영해에 잠입한 미국 구축함과 해군들은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 1차 교전을 벌였고, 2일 뒤인 8월 4일에는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통킹만 공격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그 발표에 따르면 2차 공격이 있었다고 했지만이는 미국 측의 자작극이었다즉 여기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미국 측의 새빨간 거짓말이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새빨간 거짓말을 한 린든 B. 존슨은 뻔뻔스럽게도 다음 날인 8월 5일 미공군을 출격시켜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 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이것은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행해진 미국 측의 침략행위였다이른바 북폭을 감행한 미항공기 중 하나가 격추됐고탈출한 조종사는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혔다이러한 기만과 위선속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이었던 것이다.

 

4. 북폭과 미지상군 파병

 

통킹만 사건 이후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 또한 계속 증가했고이에 따른 베트콩 측의 대응도 격해졌다. 1964년 12월 사이공 근처에 있던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수십대의 항공기와 헬기가 파괴되는 사건과그 다음 해인 1965년 2월 중부고원지대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 기지가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부상당하자 미국은 이에 대한 엄청난 보복을 준비했다그것이 바로 롤링썬더 작전이었다.

 

롤링썬더 작전은 1965년 3월 2일에 게시됐다미군 항공모함과 비행장 그 외의 기지에서 이륙한 항공기와 폭격기들이 북베트남 전역을 말 그대로 달의 표면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폭격을 감행했다이러한 폭격은 당연히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았으며이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도 급증했다베트남 전쟁에서 최소 200만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민간인 사망자 대다수는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는 북폭 게시와 더불어 지상군 파병을 감행했다베트남의 첫 번째 파병 부대로는 미 해병대가 선택되었다대략 3,000명 정도의 미 해병대가 남베트남의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인 다낭(Da Nang)에 상륙하는 걸로 결정됐다. 1965년 3월 8일 미국 정부는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미 해병대 대원들로 하여금 상륙정에 태워 해안가에 상륙하도록 했다이렇게 하여 1858년 침략자 프랑스 군대가 다낭에 상륙한지 100년 만에 또 다른 외세의 지상병력이 베트남을 침략했다.

 

1달 뒤인 1965년 4월 존슨은 병력 4만을 추가로 파병했고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75,000명으로 증가했다이렇게 해서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는 1965년 말에 20만으로 증가했으며그 이후에는 더 증가하여최대 병력 54만 9,00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미국의 베트남 침략 전쟁의 발판은 이런 식으로 마련됐고또 전개됐다.

 

5. 결론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다.

 

지금까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시점부터 1965년 린든 B. 존슨 정부가 북폭 게시와 더불어 대규모의 지상병력 파병까지를 알아보았다베트남 전쟁은 이렇게 미제국주의자들의 기만과 위선속에서 계획되고실행된 전쟁이었다미제국주의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위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단어를 통해 남베트남 친불 매국노 정권에 대한 지원을 합리화 했다또 미제국주의자들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우던 호치민과 민족해방세력들을 그저 빨갱이로 몰이하는 철면피스러운 행위를 했다미제국주의자들은 남베트남 민족반역자 정권을 지원하며북폭이라는 천인공노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게시했다그리고 1858년 프랑스 제국주의 군대가 상륙했듯이다낭에 미제국주의 상륙부대의 주력인 미해병대를 상륙시키는 이미지 매이킹도 시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자들이 거짓말과 위선 그리고 기만속에서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천년전쟁 -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중국
오정환 지음 / 종문화사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래에 들어 한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많아진 베트남은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역사는 한국의 고조선과 같은 반랑(Văn Lang)부터 따지면, 대략 4천 년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반랑(Văn Lang)의 경우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단군신화처럼 연대기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는 빈약하다 할 수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베트남은 유례를 찾기 힘든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2천년 동안 중국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가 바로 베트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방문했던 윌프레드 버체트 기자는 팜 반 동(Phạm Văn Đồng) 수상과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버체트는 팜 반 동에게 당신들 마음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들을 이렇게 끈질기게 만들지요?”라고 질문을 하자, 팜 반 동 수상의 대답은 명확했다.

 

궁금하면 우리 역사를 한번 보시오. 외국 침략자들에 대한 투쟁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항상 우리보다 강한 상대였습니다. 자연과의 투쟁도 많았지만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과거 2,000년에 걸쳐 이런 시련을 겪은 우리 인민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경 체계를 가지게 되었지요. 우리는 외세의 위협에 당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인민들은 , 또 시작이군!’이라고 말할 정도로 적응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

 

북베트남의 팜 반 동 수상이 대답과 같이, 베트남의 역사는 2천년에 걸친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중국에 맞선 베트남의 투쟁은 쯩 자매의 반란부터 시작이 된다. 쯩 자매는 한나라의 지배에 맞서 병사들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전개했었고, 한무제가 보낸 토벌군에 맞서 결사항전 하다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었다. 베트남 저항의 역사 시작점인 쯩 자매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속에 외세에 대한 항거와 독립 의식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중국의 베트남 지역 지배는 오래됐고, 그 과정에서 지배에 대한 저항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서기 900년대 들어서 응오꾸엔이 이끄는 군대는 바익당 강 전투에서 중국의 대군을 무찌르고 독립국가를 세웠다. 또한 300년 뒤에도 그 바익당 강에서 몽고군의 대함대가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파됐다. 몽고의 베트남 침략은 12차 그리고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차 칩입때는 게릴라전으로 몽고군의 지상병력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200년 뒤에는 명나라의 지배를 받았을 때, 레러이(Lê Lợi)가 기나긴 대명항쟁 끝에 명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국가를 세웠고, 20세기 미국에 맞선 베트남의 게릴라 전술의 기초가 여기서 탄생했다. 300년 뒤에는 청나라의 대군이 침략했으나, 떠이선(Tây Sơn) 반란의 지도자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이 지휘아래 청나라 침략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년뒤인 1979년 이른바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인 중월전쟁이 일어났는데, 베트남은 중국의 침공에 맞서 보조병력만으로 막아내는 저력을 보여주기 까지 했었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에 맞선 저항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역사에서 중국에 맞선 저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지배 과정에서 중국 문화가 베트남에도 자리를 잡았고, 관습이나 학문 제도, 도량형 등 중국의 영향을 역사적으로 지대하게 받았었다. 중국의 지배와 간섭 그리고 침략 속에서 남부에 있던 강대국 참파와 라오스를 대상으로 정복전쟁을 벌였으며, 참파의 경우 16세기쯤에 베트남에게 사실상 정복당했다. 그 외에도 현재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과 태국하고도 전쟁을 적잖게 치렀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기 코친차이나라고 불렸던 베트남 남부의 경우 17세기에 베트남 영토로 편입됐다. 물론 이 영토의 경우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이번에 읽은 오정환 전 MBC 본부장의 저서 천년전쟁은 말 그대로 중국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저항의 역사를 다뤘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인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쟁은 하나도 다루지 않고 있으며, 국내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역사인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중월전쟁을 다루고 있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중월전쟁 관련 부분의 내용은 다른 파트에 비해 그다지 자세하지 않고, 상당히 짧은 분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베트남의 대중항쟁 2천년 사를 알기에는 상당히 유용한 서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사실 베트남의 대중항쟁 역사에 대해 그리 깊이 알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읽음으로써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대중항쟁 역사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중국 침략에 맞선 베트남의 역사가 참으로 놀라웠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던 몽고군의 침략을 3차례나 받고도 버텨낸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거기다 베트남 원정에 실패했던 몽골은 이 굴욕을 못 이겨 4차 원정까지 준비했었다. 물론 1294년 쿠빌라이칸이 사망하면서 시도되지 않았다. 이런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재 베트남인들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현대사에서는 중월전쟁에서 중국까지 이겼으니, 자부심이 한층 더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트남의 대중항쟁 역사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6-06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14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14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06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14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14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nd after 4,000 years of struggling against nature and foreign invaders and the last 25 years, prior to the revolution, of struggle against French colonialism. I don’t think that the people of Vietnam are about to compromise in any way, shape, or form about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and I think Richard Nixon would do well to read Vietnamese history, particularly their poetry, written by Ho Chi Minh.(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자연과 외국 침략자들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왔습니다. 프랑스와 식민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나갈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의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치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1972년 북베트남을 방문한 반전운동가이자 여배우인 제인 폰다(Jane Fonda)가 했던 연설이다. 베트남 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끝나가던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이미 베트남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이미 구정 공세를 통해 미국 내에서 격해진 반전운동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도록 만들었고, 미녀배우로 유명했던 제인 폰다 또한 그 중 일부였다.

 

반전운동이 격해지는 과정에서 반전 시위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현재도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다. 반전운동 시위대들 중에는 적잖은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당시 미국에 맞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호치민이라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1971년 펜타곤 직원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세상에 폭로하면서 그 전쟁의 추악함은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민중과 대중적인 독립운동 조직은 호치민과 그가 조직한 베트민(Viet Minh) 뿐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었던 호치민은 베트남의 상징과도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1890519일 응에안 성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반프랑스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1911년 베트남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1919년 그는 베르사유 회담 당시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호소하기 위해 파리 베르사유 궁전까지 가서 이를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로가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에 가서 활동하며 1930년 홍콩에서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30년간의 해외생활을 보냈고, 30년 동안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맞서 독립은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는 국제정세를 읽고 이를 잘 이용하는 실용적이고 탁월한 지도자였으며, 무엇보다 30년 동안의 해외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기에, 1949년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한 것이 첫 해외방문이었던 마오쩌둥하고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빌려서 읽게 된 세계 지도자 열전 시리즈 중 하나인 호치민에서는 그가 미국에 있을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호치민은 주로 주방 요리사나 식당의 심부름꾼 노릇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가 받은 인상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향유하는 자유의 정도가 각자의 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 호치민 p.31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돌아온 호치민은 자신의 해외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베트남을 침략한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며 무장투쟁에 나섰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 독립 동맹 즉 줄여서 베트민이었다. 당시 호치민은 중월 국경지대인 까오방의 한 동굴에서 혁명투쟁을 시작했는데, 책에 나온 그 내용은 상당히 감동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곳의 밤은 지독히 추웠다. 너무나 추워 잠조차 들 수 없는 밤이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장작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웅크리고 앉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혁명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호치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는 또한 자기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고자 인근의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 산정이라 이름 붙이고, 근처의 개울을 레닌 시냇물이라 명명했다.”

 

출처: 호치민 p.65

 

호치민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시 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온갖 화력과 병력을 동원하여 베트민을 공격했지만, 호치민과 그를 따르는 위대한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은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웠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의 최정예 병력 11,721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들어선 국가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고, 1949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의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을 계승한 나라였다. 단순히 바오다이 황제에서 그가 수상으로 내세웠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고, 프랑스 대신 미국이 그 나라를 지원했을 뿐이었다. 책 또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결국 베트남 전쟁의 명분에서 당연히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 또한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책에는 베트남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분석이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3개월 전에 이미 두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북부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부의 프랑스 세력이 그러했다. 이후의 대립 투쟁은 궁극적으로 거기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호치민 p.90

 

즉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 또한 이런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며, 호치민이나 북베트남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은 프랑스에 이어 미국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본질이다. 심지어 이 책은 미국에서 열전 시리즈로 만들어 진 것이며,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아도 베트남 전쟁 자체가 결과적으로 명분이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베트남인들을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에, 당연히 지금까지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히 따지자면, 어린 시절 읽게 되는 위인전에서 벗어나 인물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물론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기에, 다소 미국 편향적인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호치민의 경우에도 현재는 과장으로 드러난 토지개혁 10만 처형설이 그대로 언급되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대체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됐다. 물론 북베트남 정권의 토지개혁은 호치민 스스로가 강도높은 자아비판을 했고, 여러 연구와 베트남측 문서가 공개되면서 희생자 수치가 10만 명이 아닌 3,000명에서 15,000명사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책이 나온 연도가 냉전이 끝나던 1990년이라는 점과 다소 미국 우파적 시각에서 서술된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호치민은 한 평생을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항일, 항불 그리고 항미투쟁을 전개한 구국의 80년 생애를 보냈으며,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계승한 공산당 정치인들과 민중은 6년간의 항전끝에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투쟁적 생애가 베트남 인민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책 마지막 구절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다.

 

호치민은 살아생전 전쟁의 끝맺음을 보지 못했다. 196993,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여하튼 그는 두 대륙에 걸쳐서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셈이다. 그는 1966년의 라디오 대담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의 자유화에 바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Why? People : 케네디 Why? 인물탐구학습만화
박민정 지음, 이두원 그림, 윤재웅 감수 / 예림당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에 대해 제법 관심이 생겨 Why 시리즈에서 출간한 어린이 위인전을 읽었다. 물론 케네디에 대해 알기 위해선 푸른숲 출판사에서 출간한 케네디 평전 I,II권을 읽는게 맞지만, 그냥 입문하는 차원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비록 그는 2년이라는 아주 짧은 재임 기간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그가 추구했던 뉴프론티어 정신은 현재 미국인들에게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지금이야 코로나 바이러스로 항로가 차단되어 가기 힘들지만, 뉴욕의 국제공항 이름이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다. 나 또한 3년전 미국여행을 여기서 시작하여 1달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케네디는 현재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다.

우선 이 책에 대해 얘기하자면, 뭐 전형적인 스트레오타입의 위인전이라 할 수 있다. 성실함, 독서를 좋아하고 꾸준함, 배려심 깊음, 도전적 인물 그리고 공부잘하고 똑똑한 인물 등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그려지는 위인전이니 솔직히 전형적이다 못해 다소 지겨운 레파토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위인전이니 당연히 부정적인 행적은 언급이 안되거나 각색되어 표시되는데, 특히 케네디에 대한 위인전은 그것이 더더욱 많이 느껴졌다.

우선 그의 가족에 대한 얘기가 그렇다. 위인전에선 성실한 리더십의 지도자형 생애를 각색하기 위해 케네디의 9남매 부모님이 엄청나게 자상하고 헌신적으로만 그려진다. 물론 똑똑한 케네디의 남매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전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왔듯이, 이는 로즈마리 케네디의 이야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그의 여동생 로즈마리 케네디를 지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그리고 그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가두어 버렸다. 심지어 가문의 수치로 여겨 학교도 안보냈고,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1940년대 전두엽 절제술을 했다가 그나마 갖고 있던 지능과 언어능력을 모두 상실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계의 길을 걸었던 케네디를 위해 가족은 로즈마리를 정신병원에 보냈고,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로즈마리는 2005년 1월에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에서 0.1%도 언급되지 않으며, 여동생을 표현한 그림은 나와도 자세히 소개되지 않는다.

케네디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에 대한 각색도 너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재클린 케네디는 화려한 미모와는 달리, 사치행각이 어마무시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사치행각은 태생적으로 부유한 집안인 케네디마저도 경악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도 아주 상세히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화려한 패션감각과 문화예술의 확산으로 각색되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더 비판할 것을 뽑자면, 어린시절에 대한 필요이상의 내용 할애와 반공주의 미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이 위인전은 필요이상의 어린시절 내용을 할애했다. 그냥 책의 절반이상이 어린시절 내용이다. 물론 위인전이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각색되어 많이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케네디의 중요한 내용은 그가 정치를 하던 시절과 대통령이 된 시절이다. 대통령때 했던 행적과 정치인 당시 그의 내용은 너무 축약된 느낌이다. 즉 찬양하는 책을 만드려면 그의 정치행적을 보다 강화해야 했는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공주의에 대한 지적은 여기서 언급하자면, 그의 실책과 과오가 은근슬쩍 덮어진다. 대표적으로 쿠바 침공과 미사일 위기에 대한 내용이다. 1961년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침략행위였다. 책에서 정상적인 집단으로 규정되는 쿠바 망명자들은 바티스타 정권 시기 미국에 부역하여 인민을 착취하던 압제자들이었다. 이들이 쿠바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자, 이들은 미국으로 도망쳐 CIA로부터 훈련을 받아 쿠바 전복을 위해 준비했었다.

케네디의 전임인 아이젠 하워는 실제로 쿠바 사회주의 정권 전복 훈련을 실행했고, 실제로 시도할 계획이었다. 이는 케네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 또한 미국의 자유주의를 숭배했고,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보여줬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한건, 카스트로의 도움 요청도 있었지만 미국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겨냥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이런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인물들에 대해 위인전을 쓰는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인전에 나온 인물들이 과연 실질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는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나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한국에서 백범 김구나 안창호 혹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김영옥과 같은 우익 계열 인물이 위인전이나 평전이 나오는거 자체엔 반대하지 않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위인이라고 생각할지에 대한 문제는 별개라 생각한다.

즉 그러한 입장에서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나 닉슨, 레이건, 클린턴, 부시 그리고 오바마와 같은 인물을 평가한다면, 나는 이들이 매우 잘못된 인물이고 비판받아 마땅한 제국주의자들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위인전에 등장하기에 너무나도 부끄러운 인물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비판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책에서 미화되는 케네디의 정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 계열에게 부강한 미국과 약자를 위한 미국을 꿈꿨던 걸로 극찬받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선 침략자였고 범죄자였다 생각한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쿠바의 사태가 그렇고,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베트남 개입이 그렇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반민중적인 친미정권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다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반인륜적 전쟁범죄가 베트남 민중들을 대상으로 자행됐다.

이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으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치견해와 맞지 않으면 탄압했다. 1963년 사이공에서 한 승려의 분신자살은 그 체제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한 체제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책에선 전혀 언급되지 않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도 사실 케네디의 작품이었다. 일제시기에는 친일 해방 이후 남로당 경력이 있던 박정희의 경력을 알았던 케네디는 그를 의심했지만, 박정희의 신하적 충성을 보고 한국을 반공주의 국가의 보루로 만들었다. 그 악랄한 박정희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 결과 한국은 극단적 반공주의라는 후유증에서 못벗어난 사회가 되어 버렸으며, 공산주의의 ‘공‘자와 사회주의의 ‘사‘자만 나와도 탄압과 검열이 들어가는 매카시즘 국가가 되고 말았다.

이제 케네디에 대해 결론 내릴 차례다. 이러한 사실관계를 생각해보았을때, 전쟁범죄자이자 반공주의자인 케네디는 아이들에게 위인으로서 존경받기에는 너무나도 낯부끄러운 인물이다. 이 책은 그런 인물을 리더십이나 근면성실 그리고 인재인 정치인 및 대통령으로 미화한 책이다. 그렇다고 미화를 하면서 인물을 제대로 다룬 것도 아니라 부족한점도 많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때, 이 책은 그냥 입문서로도 부족한 삼류위인전일 뿐이다. 뉘른베르크법이 적용된다면 전범으로서 재판에 서야할 인물 미화는 그만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