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계승자 - 김정은 평전
애나 파이필드 지음, 이기동 옮김 / 프리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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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누구건 간에 김정은 평전이 나오길 학수고대했다.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초월하여 그에 대해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어떤 미화된 이미지나 악마화된 이미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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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Cuban Revolution)

1400년대 후반 소위 신대륙을 발견한 인물로 알려진 제국주의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를 찾은 이후부터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1898년 미서전쟁(미국과 스페인간에 일어난 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게 패하자, 스페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식민지를 포기했고, 1902년 쿠바는 형식적으로 나마 주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얘기한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다. 미국은 쿠바를 정치 및 경제적으로 식민지화 했고, 쿠바는 미제국주의의 사탕수수 생산 기지가 되었다. 1945년 2차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쿠바에서도 반제국주의에 눈을 뜨게 된 인물들이 생겨났는데, 이는 미제국의 경제적인 식민지배와 풀헨시호 바티스타의 반동적인 정권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반발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 끝나기 1일 전인 1953년 7월 26일 변호사였던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의 혁명가들은 몬카다 병역을 습격했다. 체포된 피델 카스트로는 재판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반대여론이 거세지자 바티스타 정권은 그를 사면했고, 사면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멕시코로 망명한 피델 카스트로는 체게바라와 같은 혁명 동지들을 만났고, 1956년 그란마호에 82명의 동지들을 태워 쿠바에 상륙했다. 그란마호의 상륙을 대기하고 있던 바티스타의 군대는 그들이 상륙하자마자 집중사격을 가했고, 첫 공격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그리고 피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포함한 20명만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그들은 정글 속으로 들어가 바티스타 군대에 맞선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바티스타 군대는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들은 폭격기까지 띄웠지만, 민심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한 그들은 인근 마을에 병원시설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줬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잘 설득했다. 1957년 미국의 허버트 매튜스 기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카스트로와 인터뷰를 하고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이를 상세히 보도했는데, 이 보도 덕분에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독재에 항거하는 혁명가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글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나가던 혁명군은 1957년 부터 세력을 확장했고, 1958년에는 쿠바의 도시지역들까지 장악했다. 1958년 12월 체게바라를 선봉으로한 혁명군은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바티스타 괴뢰군을 대패시켰다. 이에 힘입어 피델과 체게바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나갔고, 1959년 1월에는 수도 아바나를 점령하면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 1956년 20명으로 시작했던 게릴라 투쟁은 3년만에 쿠바 전역을 해방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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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 있는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형들과 3명의 친형이 있었지만 친형들은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사망했기에, 어린시절의 히틀러는 형제가 없이 자랐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기에, 어린 히틀러에게 폭력을 자주 휘둘렀고, 이는 히틀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의 그는 수학을 빼놓고는 성적이 좋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히틀러는 16살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올라와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고자 미대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이때부터 히틀러는 방황하면서 일정한 목표 없이 살았고, 1909년 12월 까지 노숙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히틀러는 화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히틀러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히틀러는 독일군대에 자원했고,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1913년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군의 징집을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슬라브 인들을 싫어했던 것과, 순수 독일인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히틀러는 최초로 독가스가 사용되었던 이프르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에 배치되었고, 수많은 독일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히틀러는 1914년 말에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상병으로 진급했으며,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는 1916년과 1918년에 전투에서 부상당하는데, 1916년에는 그 유명한 솜 전투에서 부상당했었고, 1918년에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잠시 실명하기도 했었다. 잠시 실명했던 눈은 1918년 11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게 항복했던 시점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히틀러는 계속 군에 남아있었다. 그는 군에 남아 정치 활동을 감시하는 일을 했었지만, 독일 노동자당에 잠입했다가, 노동자당 사람들이 하는 연설에 감명을 받았고,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했다. 이로써 히틀러는 정치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1920년 초,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까지 올랐던 히틀러는 1920년 2월 나치당을 창당하였고,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당내 경호 조직인 돌격대(SA)를 조직하였고, 1922년에는 800명의 돌격대를 앞세워 사회주의 진영 노동자와 노동조합원들과 충돌하여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사례에 감명을 받아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독일군에게 진압당했고,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재판과정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 능력을 토대로 재판관들을 매료시켰고, 원래 받아야 했던 형량보다 적게 받았으며, 6개월 이내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감옥생활 도중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하였다. 나의투쟁 제1권은 1925년에 출간되었고, 제2권은 1926년 12월에 출간되었으며, 그의 자서전은 그가 집권하던 시기 독일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리고 나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SS는 1925년 쯤에 창설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나치당의 활동은 지지부진하다가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했는데,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이 그런 기회를 제공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하여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빠졌다. 1924년에 등장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빛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터지며 독일이 받아야 했던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28년 까지만 해도 총선 득표율이 2.6%였던 나치당은 1930년 들어 대략 20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해 9월에 치러진 제국의회 선거에서 18.3%의 득표율을 얻으며 제2의 당으로 부상했다. 1931년 11월 헤센 주의회 선거에서 37.1%의 득표율을 얻은 나치당은 당시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합친 것 보다 높은 지지율을 얻게 되었고, 1932년엔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까지 했다. 그리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고, 그는 독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재무장 정책을 수립하였고, ‘국회 의사당 방화사건’을 빌미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며 숙청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독일 내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을 휘둘렀고, 이에 따라 독일 내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나치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한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 전 나치 돌격대(SA)의 대장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나치 돌격대 지휘관들과 나치당의 반대파들을 향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숙청을 감행한 그날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수백 명이 죽었다. 그리고 1934년 8월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의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 국민의 90% 이상이 이를 지지했다. 1935년 3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병력 증강과 징병제 도입을 선포했고, 1935년부터 나치독일은 군비를 대폭적으로 증강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1936년 3월에는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했고, ‘뉘른베르크법’을 선포하여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당시 히틀러는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경제를 재건하였다. 이는 미국의 뉴딜 정책 만큼이나 성공적이었으나 이를 군사주의를 강화하는데 이용하였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올림픽을 세계로부터 알리는 데 이용하였고, 그 효과는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1936년과 1937년 일본과 이탈리아와 반 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하였고,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와 나치당은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을 일으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 있는 유대인 상점과 시민들을 공격하여 야만성을 보여주었다.

히틀러의 영토 팽창은 라인란트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 끝나지 않았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였고, 그해 8월에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9월에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였다.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전략전술을 구사한 히틀러의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전투기 부대와 기병대를 궤멸시켰고, 수도 바르샤바를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였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 3월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4월에는 덴마크를 침공했으며, 5월 10일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를 침공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차례대로 항복했고, 수십만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덩케르크에서 대대적인 철수작전을 감행하여 영국으로 후퇴했으며,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하였다. 프랑스까지 점령한 독일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본토 항공전을 개시하여 수도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대도시들을 초토화 시켰고, 수 천대의 독일군 비행기들이 영국의 대도시와 군사기지를 폭격했다. 영국 공습에 나선 히틀러는 1940년 9월 이탈리아와 일본과 ‘3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1941년에는 북아프리카에 군대를 파병하였으며, 1941년 4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까지 점령해버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벌인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했고, 그는 서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동부전선으로 보냈으며,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300만 이상의 병력과 수천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동원한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다. 1941년 9월에는 발트 삼국과 레닌그라드까지 진격했고, 그해 11월 말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외각 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모스크바 진격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다. 거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에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서 히틀러 또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까지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정세는 히틀러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히틀러의 독일군은 1942년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했지만, 1943년 2월 20만 대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하면서 패배로 끝났고, 그해 7월 마지막 진격인 쿠르스크 전투도 소련군의 T-34 물량 공세에 밀리면서 패배했다. 그와 더불어 1941년 롬멜 장군이 파견된 아프리카 전선도 1943년 5월 튀니지까지 함락되면서 독일군의 패배로 끝이 났고, 그해 7월 영미 연합국이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게 되면서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연합국에게 밀렸다. 이렇게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히틀러와 나치독일은 ‘최종 결정(Final Solution)’이라 하여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수많은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치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 까지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500만 명 이상의 전쟁 포로 및 반나치인사 동성애자, 장애인, 집시 등을 수용소에서 학살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국에게 밀린 독일군은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전개되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그 과정에서 몇몇 나치 인사들이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1944년 8월에는 프랑스의 파리가 해방되고, 45년에는 벌지 전투에서 패배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도 소련군에게도 패전을 거듭했다. 영미 연합국은 1942년부터 독일의 도시를 공습했는데, 1945년이 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의 독일 도시가 연합국의 공습을 받으면서 초토화 되었다. 1945년 4월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라인강에서 만났고, 독일군은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 진입하면서 패배했다.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군은 독일의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음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길 꺼려했던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는 지하 벙커에서 아내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결국 독일군 잔존병력과 히틀러의 뒤를 이은 카를 되니츠 제독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1939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영광을 외치며 일으킨 전쟁은 처참한 패배로 끝이 났고, 제국주의는 왜 망할 수밖에 없는 지를 히틀러와 파시스트 무리들이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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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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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유명한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Marx in Soho>를 읽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1990년대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를 보고 기뻐 날뛰던 미국과 자칭 자유주의자(라고 읽고 수꼴이라 읽는다.)들의 논리를 철저하게 반박한 책이자, 미국 전역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 연극 대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여러번 지적하듯이 1991년 걸프전쟁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소련의 해체를 지켜본 미국과 미국자본가 그리고 자칭 자유주의자 세력들은 승리감에 도취하여 마치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무너진 것인 냥 대서특필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의 사회주의 세력과 국가는 냉전시기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소련이었고, 그런 소련의 해체는 그로 미국과 자본주의의 승리였던 것이다. 소련 해체 이후 오만함에 빠졌던 미국 자본가들의 행태에 대해 항상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워드 진은 그런 논리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들이 논리가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이 책에서 밝히는데, 그 밝히는 방법이 만약 현재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 미국 뉴욕에 가게 된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책에 나온 마르크스에 따르면 냉전시기 미국과 경쟁하며,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숙청을 감행하며, 혁명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던 통치자가 다스렸던 소련의 스탈린 체제는 분명 이상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사형제 철폐를 외쳤고, 그가 제시한 공산주의적 목표는 개인의 자유, 동정심 있는 인간존재로서 자신을 계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적 체제의 종말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며, 자본주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위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미국에 대해 얘기하는데 이 역시 미국의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주의로부터 승리했다고 하는 1990년대의 미국은 500명도 안 되는 개인이 2조 달러의 기업자산을 주무르고 있고, 뉴욕에 있는 수많은 노숙자들이 구걸하며, 노스캐롤라이나의 어떤 닭고기 공장에선 공장주가 문을 잠그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다 수십 명 단위의 노동자들을 죽이고, 열악한 사회복지로 인하여 1년에 4만 명 이상의 미국 아이들이 돌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누구로부터 승리했는지를 묻는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승리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마지막에 명언을 남기며 연극을 마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냥 이 지구의 엄청난 부를 인류를 위해 쓰자고 합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도록 합시다. 식량과 의약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나무와 풀, 즐거운 가정, 몇 시간의 노동과 그보다 많은 여가 시간을 줍시다. 그리고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인간은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으나까요. 자 이제 가야 할 시간이군요. 내가 다시 돌아와 여러분의 심기를 건드려서 화가 나는가요? 그러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세요. 어것은 재림이라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는 했습니다.”

 

출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p.134~35

 

정리하자면, 이 책 혹은 연극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론과 사회상이 실패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해체만 보고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도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거지 맑스가 제시한 세상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필자는 소련의 진보성과 이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소련의 좋은 점은 배우되, 한계를 비판할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튼 하워드 진이 집필한 이 책은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마르크스의 연극을 통해 제시해 줬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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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사
서진영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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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01일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수십만이 모인 군중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1949년에 일어났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은 냉전초기에 접어든 미국사회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고, 역으로 미국사회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다. 당시 미국의 공화당측 정치인들은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며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강력한 책임을 물었고, 미국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미국 민주당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던 공화당 세력과 반공주의에 심취했던 미국인들은 중국이 공산화 되었다는 현상에만 집중했을 뿐,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국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일까?

 

1, 19세기 중국과 신해혁명

 

책의 시작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고도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부터 시작한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청나라 군대를 굴복시킨 서구 열강들은 1841년 남경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청나라에게 체결하게 하고, 승리자 영국은 홍콩을 점령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의 침략이 확대되었고, 항구를 기점으로 서구 열강들의 자본이 중국대륙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서구 열강들이 중국 대륙을 잠식해가는 과정에서 중국 내부에선 혁명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태평천국운동이다. 1850년대에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초반에는 많은 인원들을 끌어 들였지만 조직 내에서 갈등을 겪으며 분열되었고, 1864년에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끝난다. 태평천국운동 이후 청나라에선 개혁의 목소리가 나왔고 동치중흥과 양무자강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중국 전통사회의 기본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개혁이 아닌 서구의 선진기술문명의 수용하는 쪽의 운동에 가까웠고, 이홍장과 같은 청나라 관료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결국 양무자강운동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하면서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1898년에는 강유위(캉유웨이)라는 인물이 이끌었던 변법운동이 발전하여 입헌군주제 체제가 실현될 뻔 했으나 서태후의 지원을 받은 보수파의 궁정쿠데타로 인하여 이 또한 몰락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 극심해지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을 파견하여 수도 베이징을 단숨에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이 또한 진압 당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위기감을 느낀 중국의 관료들은 개혁을 실행한다.

하지만 개혁이 청조의 운명과 중국의 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1911년 중국에선 혁명 지도자 손문의 주도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지방자치운동과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191111월 말에는 청조가 와해되었고, 1912년 새해에는 손문을 지도자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2. 중국 공산당의 창당 배경과 제1차 국공합작

 

신해혁명을 시작으로 들어선 중화민국 정부는 명목상으로만 민국이었고, 사실상 위안스카이와 같은 군벌들 집합체였다. 이 과정에서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했고, 더 나아가 군벌세력인 위안스카이는 공화제까지 폐지하면서 전제정치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까지 보였다. 1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국 대륙은 군벌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중국 대륙에 대한 일본제국의 경제적인 점령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선 의식 있던 지식인 진독수를 중심으로 신문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191954일에는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항일 운동은 반제반봉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5.4운동은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났고, 1차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에게 실망한 지식인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나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그러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도 성장했고, 아나키즘 및 여러 진보계열 운동들이 더욱 활발해졌다. 1919년 혁명 러시아에서 창설된 코민테른은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19217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설된다. 마오쩌둥 또한 중국 공산당을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아시아의 상황에선 민족해방운동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따라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과의 합작을 수립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중국 공산당도 국민당과 합작하여 민주주의 연합전선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손문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제1차 국공합작을 실행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926년 중국 국민당은 군벌세력 무력화를 위한 북벌을 단행하게 되고, 1927년에 제1차 북벌을 마무리 한다.

 

하지만 1925년 손문이 사망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도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손문 밑에 있던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19263월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중국 광저우 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주의자들 소탕에 나섰다. 북벌과 동시에 상해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접수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19274월에 공산당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 및 혁명가들이 살해된다. 또한 장제스가 난징을 수도로 하는 난징 정부를 구축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와해된다.

 

3. 1차 국공내전과 대장정

 

1927년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장제스는 제2차 북벌을 감행하는 동시에 공산당 토벌에 나선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에 맞서 구추백과 같은 노동자 혁명 세력들은 도시 중심의 노동자 투쟁을 전개했지만 27년의 남창봉기를 시작으로 추수봉기, 광주봉기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고, 도시 위주의 소비에트는 결국 1928년 중국 국민당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했다. 결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주장한 농촌 혁명을 기반으로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국민당에 맞서 투쟁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소비에트들은 자체적으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하였다. 또한 1928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의 홍군은 정강산을 중심으로 토지혁명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을 동원했고,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투쟁했다. 이후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되면서 1931년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된다.

 

하지만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됨과 동시에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이에 맞서 마오쩌둥의 홍군은 정강산 투쟁이라 하여 1928년 부터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이들을 토벌 및 섬멸하기 위해 193010월부터 193410월까지 총 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포위공격을 감행하였고, 1931918일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해 나갔음에도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심지어 장제스는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1933년 나치독일의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했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까지 했다. 어쨌든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하여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410월 강서소비에트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를 탈출한 10만 명의 홍군은 국민당군에 맞서 대장정을 전개하게 된다. 대장정 당시 홍군은 193410월부터 19359월까지 대략 10000km를 걸었고, 온갖 자연환경과 싸웠으며, 계속되는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국민당군과 추격해오는 수백 대의 전투기에 맞서 싸웠다. 11개의 성과 18개의 산맥을 통과했던 홍궁 정규군은 대장정이 끝날 때 쯤 8천 명 만이 살아남았다. 대장정을 감행했던 마오쩌둥과 홍군은 대장정이라는 신화를 창조해냈고, 이 사건은 중국 혁명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중국 공산당에서 보다 확고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은 계속되는 토벌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점차 민심을 잃었고, 이는 결국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4. 시안사건과 중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부터 중국 대륙을 점령해 나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침략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에 앞장서자 장제스 밑에 있던 일부 부하들은 그를 구금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36년에 일어난 시안사건이다. 이후 풀려난 장제스는 중일전쟁 한참이던 193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 마오쩌둥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편입됐다.

 

하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태였다. 19377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전역에서 진격하였고, 193712월 중국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3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도륙했다. 일본군은 19383월 태아장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제외한다면 중국 전선 곳곳에서 승승장구하여 193810월엔 국민당의 임시수도인 우한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했던 일본은 전쟁이 길어지자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교착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홍군 또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408월부터 1941년까지 백단대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백단대전에 놀란 일본은 화북과 화중지역을 치안구와 비치안구로 나누고 치안구에서 공산당을 색출하는 작업을 강화했다. 이유는 중국 공산당군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측을 토벌하기 위해 3광작전을 전개하여 모조리 전멸시키는 전멸작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화북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서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해 나갔는데, 이에 불안감을 느낀 국민당은 공산당측의 신사군을 포위 공격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치졸한 짓을 하기도 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에 따라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늘렸고, 운남 곤명성에 플라잉 타이거스와 같은 미국 공군부대도 보냈으며, 랜드 리스라 하여 13억 달러나 되는 물자를 제공했다. 그리고 미국은 조지프 스틸웰이라는 장군을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는 중일전쟁 또한 연합국이 참가하는 세계전쟁의 일부가 된 것이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했고, 1943년 이후 부터는 중국 전선에서도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일본은 19458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 하게 됐고, 중국 또한 2차대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5. 국공내전과 공산당의 승리

 

19458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37년부터 1945년 까지 약 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중국은 대략 150만 명의 군인과 1천 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전쟁의 공포는 2차대전이 승리로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유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갈라져 다시 전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지쳤던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국민당과 협상 및 협력 그리고 평화적인 정부 수립을 추구했고, 초반에는 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또한 미국은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특사로 파견했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이견조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국제 정세는 점차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로 변모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국공합작은 점차 분열되었던 것이다. 19465월 미군사고문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정예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만주지역의 대도시를 점령했고, 19467월부터는 공산당의 거점지역에 대한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7월부터 12월 사이 중국의 국민당군은 공산당이 지배하던 수많은 해방구 영토를 점령했고, 19473월에는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국민당군에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극심한 부정부패와 빈약한 민중의 지지였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바로잡지 못한 국민당군은 1948년에 들어서면서 군사적인 규모면에서 중국 공산당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또한 부정부패와 전쟁 수행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국민당 정부의 붕괴를 재촉했다. 심지어 194810월 미국의 조지 마셜 장군은 미국이 아무리 많은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현 국민당을 구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국민당 정부가 이와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 때 중국 공산당은 19489월에 전면적인 군사적 공세를 전개했다. 1941131일 중국 공산당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19494월에는 중국 공산당군이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함락시켰으며 5월 말에는 상하이까지 점령했다. 승기를 잡은 중국 공산당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194912월에는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을 해방시켰다. 1949101일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6. 맺음말: 중국혁명은 반제국주의 항쟁이다

 

아편전쟁으로 시작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선포로 끝이 난 중국혁명은 그 후에 설립될 체제가 어떤 체제였든 간에 지속되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에서 시작되어 사회주의 국가 수립으로 나선 반제국주의 항쟁이었다. 20세기 초 중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소개될 당시 사회주의 노선을 놓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 하여 중국 현실에 맞게 적용하여 반제국주의 항쟁을 전개했다. 물론 신민주주의론은 정통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서 보면 분명 바로잡아야할 사상일 수도 있지만, 중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선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에 적합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 혁명은 도시 혁명에서 보단 농촌 위주의 소비에트 건설을 통해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반혁명분자인 장제스에 맞서 저항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게릴라전 위주의 전략전술로 국민당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궁극적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부정부패한 장제스 정권에 왜 맞서야 하는 지를 민중들에게 잘 접근하였다.

 

‘1949년 이후 중국에 어떤 사회가 등장했는가?’와는 별개로 중국 혁명사는 분명히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서방제국주의의 침탈 속에서 피어오른 혁명과 공산당 건설, 국민당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과정은 읽는 이에게 나름의 감동과 흥미를 유발시킨다. 무엇보다 이 책은 1990년대 초에 기존의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기에 일반적인 중국사 서적보다 더욱 재밌게 읽힌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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