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사
서진영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49101일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수십만이 모인 군중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1949년에 일어났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은 냉전초기에 접어든 미국사회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고, 역으로 미국사회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다. 당시 미국의 공화당측 정치인들은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며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강력한 책임을 물었고, 미국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미국 민주당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던 공화당 세력과 반공주의에 심취했던 미국인들은 중국이 공산화 되었다는 현상에만 집중했을 뿐,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국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일까?

 

1, 19세기 중국과 신해혁명

 

책의 시작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고도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부터 시작한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청나라 군대를 굴복시킨 서구 열강들은 1841년 남경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청나라에게 체결하게 하고, 승리자 영국은 홍콩을 점령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의 침략이 확대되었고, 항구를 기점으로 서구 열강들의 자본이 중국대륙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서구 열강들이 중국 대륙을 잠식해가는 과정에서 중국 내부에선 혁명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태평천국운동이다. 1850년대에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초반에는 많은 인원들을 끌어 들였지만 조직 내에서 갈등을 겪으며 분열되었고, 1864년에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끝난다. 태평천국운동 이후 청나라에선 개혁의 목소리가 나왔고 동치중흥과 양무자강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중국 전통사회의 기본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개혁이 아닌 서구의 선진기술문명의 수용하는 쪽의 운동에 가까웠고, 이홍장과 같은 청나라 관료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결국 양무자강운동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하면서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1898년에는 강유위(캉유웨이)라는 인물이 이끌었던 변법운동이 발전하여 입헌군주제 체제가 실현될 뻔 했으나 서태후의 지원을 받은 보수파의 궁정쿠데타로 인하여 이 또한 몰락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 극심해지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을 파견하여 수도 베이징을 단숨에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이 또한 진압 당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위기감을 느낀 중국의 관료들은 개혁을 실행한다.

하지만 개혁이 청조의 운명과 중국의 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1911년 중국에선 혁명 지도자 손문의 주도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지방자치운동과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191111월 말에는 청조가 와해되었고, 1912년 새해에는 손문을 지도자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2. 중국 공산당의 창당 배경과 제1차 국공합작

 

신해혁명을 시작으로 들어선 중화민국 정부는 명목상으로만 민국이었고, 사실상 위안스카이와 같은 군벌들 집합체였다. 이 과정에서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했고, 더 나아가 군벌세력인 위안스카이는 공화제까지 폐지하면서 전제정치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까지 보였다. 1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국 대륙은 군벌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중국 대륙에 대한 일본제국의 경제적인 점령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선 의식 있던 지식인 진독수를 중심으로 신문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191954일에는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항일 운동은 반제반봉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5.4운동은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났고, 1차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에게 실망한 지식인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나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그러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도 성장했고, 아나키즘 및 여러 진보계열 운동들이 더욱 활발해졌다. 1919년 혁명 러시아에서 창설된 코민테른은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19217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설된다. 마오쩌둥 또한 중국 공산당을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아시아의 상황에선 민족해방운동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따라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과의 합작을 수립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중국 공산당도 국민당과 합작하여 민주주의 연합전선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손문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제1차 국공합작을 실행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926년 중국 국민당은 군벌세력 무력화를 위한 북벌을 단행하게 되고, 1927년에 제1차 북벌을 마무리 한다.

 

하지만 1925년 손문이 사망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도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손문 밑에 있던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19263월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중국 광저우 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주의자들 소탕에 나섰다. 북벌과 동시에 상해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접수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19274월에 공산당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 및 혁명가들이 살해된다. 또한 장제스가 난징을 수도로 하는 난징 정부를 구축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와해된다.

 

3. 1차 국공내전과 대장정

 

1927년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장제스는 제2차 북벌을 감행하는 동시에 공산당 토벌에 나선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에 맞서 구추백과 같은 노동자 혁명 세력들은 도시 중심의 노동자 투쟁을 전개했지만 27년의 남창봉기를 시작으로 추수봉기, 광주봉기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고, 도시 위주의 소비에트는 결국 1928년 중국 국민당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했다. 결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주장한 농촌 혁명을 기반으로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국민당에 맞서 투쟁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소비에트들은 자체적으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하였다. 또한 1928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의 홍군은 정강산을 중심으로 토지혁명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을 동원했고,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투쟁했다. 이후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되면서 1931년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된다.

 

하지만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됨과 동시에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이에 맞서 마오쩌둥의 홍군은 정강산 투쟁이라 하여 1928년 부터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이들을 토벌 및 섬멸하기 위해 193010월부터 193410월까지 총 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포위공격을 감행하였고, 1931918일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해 나갔음에도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심지어 장제스는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1933년 나치독일의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했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까지 했다. 어쨌든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하여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410월 강서소비에트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를 탈출한 10만 명의 홍군은 국민당군에 맞서 대장정을 전개하게 된다. 대장정 당시 홍군은 193410월부터 19359월까지 대략 10000km를 걸었고, 온갖 자연환경과 싸웠으며, 계속되는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국민당군과 추격해오는 수백 대의 전투기에 맞서 싸웠다. 11개의 성과 18개의 산맥을 통과했던 홍궁 정규군은 대장정이 끝날 때 쯤 8천 명 만이 살아남았다. 대장정을 감행했던 마오쩌둥과 홍군은 대장정이라는 신화를 창조해냈고, 이 사건은 중국 혁명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중국 공산당에서 보다 확고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은 계속되는 토벌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점차 민심을 잃었고, 이는 결국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4. 시안사건과 중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부터 중국 대륙을 점령해 나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침략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에 앞장서자 장제스 밑에 있던 일부 부하들은 그를 구금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36년에 일어난 시안사건이다. 이후 풀려난 장제스는 중일전쟁 한참이던 193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 마오쩌둥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편입됐다.

 

하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태였다. 19377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전역에서 진격하였고, 193712월 중국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3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도륙했다. 일본군은 19383월 태아장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제외한다면 중국 전선 곳곳에서 승승장구하여 193810월엔 국민당의 임시수도인 우한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했던 일본은 전쟁이 길어지자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교착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홍군 또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408월부터 1941년까지 백단대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백단대전에 놀란 일본은 화북과 화중지역을 치안구와 비치안구로 나누고 치안구에서 공산당을 색출하는 작업을 강화했다. 이유는 중국 공산당군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측을 토벌하기 위해 3광작전을 전개하여 모조리 전멸시키는 전멸작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화북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서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해 나갔는데, 이에 불안감을 느낀 국민당은 공산당측의 신사군을 포위 공격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치졸한 짓을 하기도 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에 따라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늘렸고, 운남 곤명성에 플라잉 타이거스와 같은 미국 공군부대도 보냈으며, 랜드 리스라 하여 13억 달러나 되는 물자를 제공했다. 그리고 미국은 조지프 스틸웰이라는 장군을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는 중일전쟁 또한 연합국이 참가하는 세계전쟁의 일부가 된 것이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했고, 1943년 이후 부터는 중국 전선에서도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일본은 19458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 하게 됐고, 중국 또한 2차대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5. 국공내전과 공산당의 승리

 

19458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37년부터 1945년 까지 약 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중국은 대략 150만 명의 군인과 1천 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전쟁의 공포는 2차대전이 승리로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유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갈라져 다시 전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지쳤던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국민당과 협상 및 협력 그리고 평화적인 정부 수립을 추구했고, 초반에는 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또한 미국은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특사로 파견했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이견조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국제 정세는 점차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로 변모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국공합작은 점차 분열되었던 것이다. 19465월 미군사고문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정예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만주지역의 대도시를 점령했고, 19467월부터는 공산당의 거점지역에 대한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7월부터 12월 사이 중국의 국민당군은 공산당이 지배하던 수많은 해방구 영토를 점령했고, 19473월에는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국민당군에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극심한 부정부패와 빈약한 민중의 지지였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바로잡지 못한 국민당군은 1948년에 들어서면서 군사적인 규모면에서 중국 공산당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또한 부정부패와 전쟁 수행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국민당 정부의 붕괴를 재촉했다. 심지어 194810월 미국의 조지 마셜 장군은 미국이 아무리 많은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현 국민당을 구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국민당 정부가 이와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 때 중국 공산당은 19489월에 전면적인 군사적 공세를 전개했다. 1941131일 중국 공산당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19494월에는 중국 공산당군이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함락시켰으며 5월 말에는 상하이까지 점령했다. 승기를 잡은 중국 공산당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194912월에는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을 해방시켰다. 1949101일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6. 맺음말: 중국혁명은 반제국주의 항쟁이다

 

아편전쟁으로 시작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선포로 끝이 난 중국혁명은 그 후에 설립될 체제가 어떤 체제였든 간에 지속되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에서 시작되어 사회주의 국가 수립으로 나선 반제국주의 항쟁이었다. 20세기 초 중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소개될 당시 사회주의 노선을 놓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 하여 중국 현실에 맞게 적용하여 반제국주의 항쟁을 전개했다. 물론 신민주주의론은 정통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서 보면 분명 바로잡아야할 사상일 수도 있지만, 중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선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에 적합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 혁명은 도시 혁명에서 보단 농촌 위주의 소비에트 건설을 통해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반혁명분자인 장제스에 맞서 저항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게릴라전 위주의 전략전술로 국민당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궁극적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부정부패한 장제스 정권에 왜 맞서야 하는 지를 민중들에게 잘 접근하였다.

 

‘1949년 이후 중국에 어떤 사회가 등장했는가?’와는 별개로 중국 혁명사는 분명히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서방제국주의의 침탈 속에서 피어오른 혁명과 공산당 건설, 국민당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과정은 읽는 이에게 나름의 감동과 흥미를 유발시킨다. 무엇보다 이 책은 1990년대 초에 기존의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기에 일반적인 중국사 서적보다 더욱 재밌게 읽힌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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