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Cuban Revolution)

1400년대 후반 소위 신대륙을 발견한 인물로 알려진 제국주의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를 찾은 이후부터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1898년 미서전쟁(미국과 스페인간에 일어난 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게 패하자, 스페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식민지를 포기했고, 1902년 쿠바는 형식적으로 나마 주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얘기한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다. 미국은 쿠바를 정치 및 경제적으로 식민지화 했고, 쿠바는 미제국주의의 사탕수수 생산 기지가 되었다. 1945년 2차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쿠바에서도 반제국주의에 눈을 뜨게 된 인물들이 생겨났는데, 이는 미제국의 경제적인 식민지배와 풀헨시호 바티스타의 반동적인 정권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반발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 끝나기 1일 전인 1953년 7월 26일 변호사였던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의 혁명가들은 몬카다 병역을 습격했다. 체포된 피델 카스트로는 재판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반대여론이 거세지자 바티스타 정권은 그를 사면했고, 사면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멕시코로 망명한 피델 카스트로는 체게바라와 같은 혁명 동지들을 만났고, 1956년 그란마호에 82명의 동지들을 태워 쿠바에 상륙했다. 그란마호의 상륙을 대기하고 있던 바티스타의 군대는 그들이 상륙하자마자 집중사격을 가했고, 첫 공격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그리고 피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포함한 20명만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그들은 정글 속으로 들어가 바티스타 군대에 맞선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바티스타 군대는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들은 폭격기까지 띄웠지만, 민심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한 그들은 인근 마을에 병원시설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줬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잘 설득했다. 1957년 미국의 허버트 매튜스 기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카스트로와 인터뷰를 하고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이를 상세히 보도했는데, 이 보도 덕분에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독재에 항거하는 혁명가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글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나가던 혁명군은 1957년 부터 세력을 확장했고, 1958년에는 쿠바의 도시지역들까지 장악했다. 1958년 12월 체게바라를 선봉으로한 혁명군은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바티스타 괴뢰군을 대패시켰다. 이에 힘입어 피델과 체게바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나갔고, 1959년 1월에는 수도 아바나를 점령하면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 1956년 20명으로 시작했던 게릴라 투쟁은 3년만에 쿠바 전역을 해방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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