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오늘 드디어 첫눈이 내렸다.
어떤 사람은 며칠 전에 첫눈을 봤다던데, 내 눈에 첫눈은 오늘 내린 눈이다. 제법 함박눈이던데 다행인 건 잠시 내리다 그쳤다는 것.
1. 국뽕이 차오른다는 말
요즘 시중에 떠도는 말중 하나라고 한다. 월드컵에 우리나라는 비록 16강에 만족해야 했지만, 우리나라 선수들이 선전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뭔가 자긍심이 솟아 오르고. 그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예전에 국뽕은 국수주의를 우습게 부르는 말 아니었나? 별로 쓰임새가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말은 돌고 도는가 보다.
2.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자다
유발하라리가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면서 그런 말을 했단다. 러시아는 이미 진 전쟁을 하고, 우크라이나는 이긴 전쟁을 하고 있다고. 그건 바로 이야기 때문에 그렇다. 러시아의 푸틴은 별로 할 얘기가 없는 반면,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 대통령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제 전쟁의 승리는 무기의 우열로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가진 쪽이 승리하는 거란다. (그래서일까? 우크라이나는 역대 어느 나라 전쟁 보다 우방의 협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분명 전쟁에만 국한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이제 세계적인 경기에서 1, 2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나라, 어느 팀, 어떤 선수가 어떤 이야기를 더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관건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팀은 어느 대회, 어느 나라 못지 않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 냈다. 지난 번 올림픽도 그렇고, 이제 뉴스 보도는 점점 그런 쪽에 포커스를 맞추는 모양새다. 뭔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수들은 또 이를 위해 더 높이, 더 멀리 뛰겠지. 그게 맞는 것 같다. 단지 좀 아쉬운 건 우리나라 선수의 활약상만 전하지 말고 다른 나라 선수나 팀에 대해서도 좀 전해주면 좋겠다.
3. 여자는 나이들면 남성 호르몬이 나와서 터프해진다고도 하던데 그거 좀 뻥인 것 같다. 나는 나이들수록 눈물이 더 흔해지는 것 같다. 솔직히 난 이번 월드컵 경기를 단 한 차례도 생중계로 본적이 없다. 점점 심장이 쪼그라 붙는지 봐 줄 수가 없다. 다음 날 뉴스를 본다든가 누구한테 들어서 알 뿐이다. 16강 진출 확정도 누구한테 들어서 알았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눈물 한 줄기가 뚝 떨어지더라. 얼마나 고생을 많이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엊그제 <코다>를 봤다.
꽤 괜찮은 영화였다. 시종일관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 그런데 이 영화도 엔딩 장면이 뭉클해 결국 또 눈물 한 줄기 폭발했다. 까이 꺼, 대학을 집에서 먼 곳으로 가게 되서 그곳 기숙사로 가는데 여느 평범한 부모 자식지간이라면 그들의 이별이 그렇게 뭉클할까? 부모나 자식이나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겠지. 그런데 농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는구나. 그나마 어메리칸 정서라 그 정도지 울나라 같으면 조금 더 처절하게 그리지 않았을까.
차별금지법이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한 줄 아는데 역시 사람 마음 어디로 안 가는 걸까? 농인 가족이라고 루시를 따돌리고 놀리 걸 보면.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리메이크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갔다면, 원작은 칸느 영화제 작품상에는 갔을까?
그 프랑스 영화는 이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책은 언제 우리나라에 번역출판돼 또 언제 소리 소문없이 절판이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4. 등을 쓰다듬어 주세요
내친김에 <동주>도 보았다. 4번짼가 5번째쯤 보는 것 같은데 언제 봐도 참 애잔한 영화다. 영화를 볼 때마다 잊히지 않은 장면이 나오는데, 윤동주의 어머니가 연희전문으로 가게된 그에게 밀전병이 든 도시락을 건네 주면서 아들의 교복 입은 등을 먼지라고 털어주는 양 훑어주는 장면이다.
설정된 장면이었까? 아닌 것도 같고. 어쨌든 그게 참 짠하면서도 뭉클하다. 사랑하는 아들을 멀리 보내는 아쉬움,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가 그 쓰다듬음에 묻어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동주는 한편 등이 시원하면서도 따뜻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 부모의 격려와 응원을 받는 자식은 결코 삐뚤어지지 않을 것이다.
암튼 난 또 그런 쓰다듬을 언제 느껴봤나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땐 여기저기 격려차원에서 토닥임을 받지만 나이들면서 점점 그런 손길을 못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새삼 누군가 힘들고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등을 쓰다듬어 주라고 말하고 싶다. 어색하면 동주 어머니처럼 등에 묻은 먼지나 실밥이라도 털어주는 시늉이라도 해라.
다시보니 카메라 감독이 동주(강하늘 분)의 복잡하고 소심한 표정을 시종 잘 잡아냈구나 싶다. 특히 강제로 머리를 잘리는 장면 이후의 동주의 가면 갈수록 우울하고 외로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