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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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토머. 토포러. 메모리모자이커. 타임스키퍼 등등. 화자가 캐비닛에서 꺼낸 파일들 보면 하나 같이 너무 그럴 듯해서, 정말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있는 줄만 알았다. 근데 뭐란 말인가? 주의사항을 보니, 이 캐비닛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오염된 것' 이라지 않는가. 띠옹~!  속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귀가 얉은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야기가 좋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제부턴가 보이는 것, 드러난 것에 더 많은 거짓과 위선이 있어 믿지 못하는 버릇이 생겨서일까? 암튼 난 이런 이야기가 꽤 흥미롭고 마음이 갔다. 하지만 저 주의사항을 읽었을 때 꼭 허무했던 것마는 아니었다. 작가는 어찌보면 있지도 않는 것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 드러난 것들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감싸 안고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고 속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왜 소설을 읽는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사실 읽으면서도 내가 속을 것을 어느만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속였다고, 독자인 내가 속았다고 어떻게 100%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정도가 심한 '심토머'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그 비스무레한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에 심심치 않게 공개되서 정말 놀라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아니, 저러고 어떻게 살아?"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도 산다. 우리와 같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나는 작가가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고딕체로 어찌보면 푸념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연극 대사 같기도 한 그 툭툭던지는 말들이 참 매력적으로 와 닿았다.  개다가 소설가가 뻥을 치지는 능력이 없다면 그게 어디 소설간가?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쩌면 속을 줄 알면서 그 속는 맛 때문에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 작가는 독자를 속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평범하든 비범하든 그 이야기속에서 인간의 인간됨의 진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재주가 작가에게 없다면 우리는 소설을 읽지 않을거라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자극할만한 뭔가의 울림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읽지 않을 거란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나름의 구조적인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읽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이 소설은 참 독특하고 기존의 소설적 화법을 과감하게 깨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것이 문체는 어찌보면 하루키의 그것을 닮아 있는 것도 같고, 나중에 공대리가 잡혀가 손가락, 발가락 잘리는 것을 보면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데 나 역시도 내내 킥킥대고 웃으며 읽다가 말미에 갈수록 약간은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뭔가 늘어지는 것 같다는 그 지점에서 나름대로 잘 마무리하고 나왔다는는 점이겠지.

읽다보니, 앞으로 작가들은 점점 발품 팔아 글을 쓰지 않고, 있는 재료와 상상력만 가지고 글을 쓰게 될거라고 하시던 나의 옛 스승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분의 말은 맞는 말이된지 오래고, 이 소설에서도 새삼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작가에게 있어서 취재력이 없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가 될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도 완성하게 발품 팔아가며 소설을 쓰고 계시는 조정래 씨나 최인호 씨 보면 그분들이 어떻게 취재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또한 작가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취재력 좀 발휘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독자는 이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고. 처음에 이 글줄을 읽었을 때 설마...했다. 하지만 봐라. 내가 언제 독자로서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거 봤나? 위에서 바로 쓰지 않았나? 취재력 좀 발휘해 보라고. 그의 말이 맞다. 그렇다면 이 말은  독자를 잘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작가 나름의 방어술이었을까?

뒤에 작가 전경린과의 인터뷰 내용이 참 절절하다. 역시 작가란 배곪는 직업이란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배 곪는 줄 뻔히 알면서 작가가 뭐 그리 좋다고 못되서 안달하는 것일까? 그래도 그에겐 춘섭이라고 하는 고마운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친구가 그랬다지, '언수야, 내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고. 그래서 2년간 매달 50만씩 그를 도와줬다고 한다.  멋있는 친구다. 지금 그는 수천억원 매출 올리는 사장이 되었다고 하니, 분명 위에 계신 분께서 그의 갸륵한 마음을 알고 복을 주신게다. 일개 작가지망생 나부랭이 밖에 안되는 나도 가끔 아는 사람 만나면 아는 척 씨부리고 다닌다. 작가는 명예직이라고. 작가가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줄 아냐고? 왜 작가는 기본적인 의식주 걱정없이 오직 이 나라의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글만 쓰면 안되는 걸까?

최재천 교수가 지난 주일 TV에 나와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린 위기란 말은 너무 잘 쓴다고. 인문학의 위기, 자연과학의 위기, 경재위기 등.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다. 이것이 믿겨지느냐고.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만에 이런 발전을 이룩한 나라는 전세계적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린 아무런 가진 자원이 없다. 우리나라가 내세울 것은 오로지 학문 연구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5백명의 가능성 있는 학자를 1년에 4천만원씩 10년 간(?) 무상으로 지원해 주면, 그들이 훗날 각 분야에서 브레인으로 그동안 연구한 것을 쏟아낸다면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좋은 일이겠냐고. 그렇게되면 총 200억 정도가 드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경재 규모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좋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5백 명에 글쟁이는 과연 낄 수 있을까? 아니 끼어야만 한다. 아니면 춘섭 씨 같은 친구나 배우자를 만나던지...

아무튼 문학동네가 또한번 '김언수'라는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를 배출해 냈다. 어느 심사평에서처럼, 나 역시도 김언수란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궁금해졌다. 이전에 무슨 글을 썼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가 된다. 그런데 이 작가 겸손하기도 하고 자신만만 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의 말대로 작가가 단순히 돈 없고, 빽 없는 독자 하나를 후려쳐서 책 한권 더 팔아먹을 요량이라면 귀싸대기를 맞아도 싸다. 그런데 난 이 작가에게 따귀를 올려 붙일 생각이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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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2-0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믿고 싶었지만 때리고는 싶더군요. 마지막에서요^^:;;

stella.K 2007-02-1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물만두님이시라면...!^^
 
웃음의 나라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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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 모 작가는,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죄로 평생토록 책상 앞에서 글을 써야하는 천형을 지녔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아, 정말 그렇겠구나!'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 책상 앞에서 평생 글을 써 대는 것을 가지고 '천형'이라고 까지 해야하는 것일까? 어찌보면 잔인하고 끔찍한 말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수 많은 작가들은 왜 이 천형을 굳이 감내하려는 것일까? 또한 어떤 사람은, 작가들은 오만하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전지적인 싯점에서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쥐락펴락 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듯 하다. 작가가 뭐라고 그리도 오만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의 역자의 후기가 눈에 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욕망과 걱정을 하게 되는 듯하다. 내가 창조한 세상, 내가 그려낸 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과, 진짜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사이의 갈등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314~315p)   그렇다면 작가의 쓰는 행위를 천형이라고 말했던 그 사람의 말이 일견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내가 창조한 세상이 진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확률은 극히 미약하긴 하지만, 가끔 이런 질문은 해 본다. 어떤 독자가 내가 쓴 소설을 보고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이 독자 자신임을 깨닫고 어느 날 명예훼손 죄로 고발을 해 온다면 그 작가는어떻게 하겠는가? 어차피 작가에 의해 창조된 등장인물도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을 쓰지 않겠는가? 이것은 정말 있을 법한 일로써 그런 독자를 대하는 건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쓰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작가는 왜 쓰는가?란 질문은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물어왔던 질문이다. 거기에 대해 작가들은 나름대로 답을 달아 왔겠지만, 이 말은 또 얼마나 기가 콱 막힐 질문이란 말인가? 작가가 왜 쓰다니? 작가에게 욕망이 있다면, 내가 쓴 글이 단 한 사람의 독자에게만이라도 받아 들여져서 그로 하여금 같이 긍정하고 동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또는 "네가 모르는 이야기를 난 안다. 너 내 얘기 들어 볼래?"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 조너선 캐럴은 사람들에게 '경이감'을 일깨워 주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어릴 때는 말하는 개나 귀신, 벽장 속 괴물, 보이지 않는 친구 같은 놀랍고도 신기한 일들을 아주 쉽게 받아들인다. 어른이 되면 이러한 것들을 잃으면서 '현실'이 아닌 것들을 밀어내는데, 캐럴은 그것이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며, 한 시인의 말을 빌려 그런 작업을 '경이로움의 재탄생'이라고 부른다. 어린 시절의 '경이감'을 다시 불러오는 작업이다.(312p)  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나는 동생과 자주 인형놀이를 즐겼는데, 주로 장식용 조그만 인형들이었다. 나는 이것들이 정말 살아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어었다. 그러면 정말 정성껏 돌봐 줄텐데. 그 무렵 TV 만화영화를 보면 어느 소녀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의 사람들처럼 작은 사람을 돌봐주는 걸 보면서 나도 실제로 그 소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너무도 빨리 동화를 잊었다.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부터 동화를 읽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어른답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인가에 더 많은 촛점을 맞췄다. 이 책을 읽으니, 이 어른다움을 걱정하는 조너선 캐롤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우린 얼마나 꿈을 잃고 살아왔던 것일까? 현실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독자에겐 이 책은 다소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동화적인 것만도 아니다. 독특하고, 몽환적이다. 작가가 말하는 '게일런'이라고 하는 지명은 실제로는 없는 지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다. 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이라는 곳이 없는 것처럼.

독자라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만 읽지 말고, 작가가 갖는 욕망이나 이면에 대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의외의 것이든 말이다. 작가는 말 할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네가 알지 못하는 얘기를 들려줬으니까 누구든 나의 전기를 좀 써 줘." 그런데 작가는 영리하다. 누군가 나의 전기를 써 줄 사람을 위해 작가의 육필원고,  작가의 집, 그가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 어떠한지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놓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의 전기를 쓰는 그 사람을 지켜 보고 또한 그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어한다. 못 말리는 병이고 섬뜩하다. 그래서 작가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천형을 지녔고, 오만을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여, 부디 그 오만을 거부하지 말기를. 직시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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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6-12-2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노무현 대통령님의 발언과 '건이와 경이'가 떠 올라서... ^^

물만두 2006-12-2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탄감탄!!! 저는 횡설수설^^;;;

stella.K 2006-12-2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무슨 말씀이시온지...??
물만두님/에고, 무슨...제 리뷰는 그다지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도 않는 걸요 뭐.ㅜ.ㅜ

2006-12-2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12-2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ㅜ.ㅜ
 
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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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부터일까? 우리나라에 칠리소스가 들어와 입맛을 사로잡아 것이.  이 칠리소스는 튀김닭을 먹을 때 같이 찍어 먹으면 느끼하지도 않고 톡쏘는 매콤 달짝지근한 맛이, 우리나라의 겨자나 일본의 와사비와는 또 다른 맛이다. 모르긴 해도 이 칠리소스는 남미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 스쳐지나간다. 우선 남미의 이국적인 이미지와 강렬하면서도 거침없이 쏟아내는 특유의 입심, 자유분망함,  남미를 배경으로한 몇편의 영화들. 그 속에 비쳐지는 빛과 어두움의 이미지가 나의 머릿속을 휘졌고 있어 리뷰 쓰기가 용이하지가 않다.  그만큼 다채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을 풀어 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그래도 말해 보자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책 전편에 흐르는 앙헬 산타아고와 빅토리아의 사랑이다. 말을 훔친 죄로 5년 형을 받았지만 대통력 특별 사면 조치로 풀려난 앙헬은 우연한 기회에 발레리나가 꿈인 빅토리아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빅토리아의 가정환경은 불우하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피노체크 정권에 저항하다 목이 잘리고, 그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버린 어머니와 함께 살며 학교에서는 퇴학을 맞은 상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갈 희망은 없어 보이며,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발레리나가 되는 것. 그러나 이마저도 돈이없어 더는 배울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앙헬은 그런 빅토리아에게 용기를 주고, 학교에서 재시험을 치르게 해서 퇴학을 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녀가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오직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발레리나가 되어서 국립극장에 서게하기 위한 것. 때문에 앙헬은 그런 빅토리아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 물론 후에 빅토리아는 시험을 망치게 되고 삼류극장에서 매춘을 하지만 끝까지 버리지 않고 도와주는 앙헬의 사랑이 인상깊다.

그러나 앙헬은 빅토리아를 사랑할 때와는 달리 그리 순수하지마는 않다. 오히려 불온하다. 잘 생긴 외목 덕에 수감시절 동료죄수로부터 윤간을 당하고, 그를 범한 사람들 중엔 간수 산토르도 포함이 되어있다. 자신이 석방되면 간수를 꼭 죽이리라던 앙헬과 그의 결심을 알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산토르는 희대의 악명 높은  살인범 리고베르토 마린을 한달 동안 몰래 빼내 앙헬을 죽이라고 한다. 앙헬이 석방되던 같은 날   금고털이범 베르가라 그레이도 석방이 된다. 그는 나이도 많고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으므로 남은 생애동안 착하게 살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앙헬은 난장이 리라의 계획을 베르가라에게 알리고 한탕하자고 졸라댄다. 거기서 등장인물들과의 얼키고 설키는 내용이다.  총 50장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짧막한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완결된 장으로 읽혀져 완급을 조절하며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하고, 작가가 얼마만한 입심을 가졌는지를 가능케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소설은 곧 영화화 될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작가는 영화화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쓴 것 같다.  

정말 이 소설은 입심이 좋다. 거침이 없고, 물 흐르는 듯하며,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다. 또한 칠레의 현대사의 질곡을 잘 녹여내고 있다. 또한 베르가라 그레이를 통해 인생을 관조하고, 등장인물을 통해 네루다나 레이몬드 카버의 인용구를 적절히 배합시키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탁월하다. 또한 앙헬과 빅토리아의 성애장면은 리얼하면서도 노골적이고 거침이 없다. 

나는 초두에 칠리소스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하였다. 아마도 이 책에 흐르는 정서는 칠리소스의 톡 쏘는 듯한 맛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관망하고 인생을 관조하는 그것은 역시 작가다운 면모를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다.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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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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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민규의 소설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이란 책에서였다. 그 책은 한 해 동안 문단에서 주목 받아온 작가들의 단편을 한 권에 묶은 책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명성에 비해 읽을 기회가 없었던 나로선 새로운 독서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음...박민규의 소설이 이렇구나.'하는.

그 단편이 어떤 내용인지는 지금은 기억에 거의 없다. 쳇, 불과 지난 여름에 읽었는데 기억에 없다니...(다시마라도 먹어야 하려나? ) 단지 기억하는 건 우리나라의 소외계층의 어느 사춘기 소년의 이야기를 다뤘던 것 같다. 거기에 무슨 아이스크림 먹는 이야기도 나왔던 것 같은데...아무튼 그 소외계층의 어느 사춘기 소년을 다룬 작가의 시선이 나름 신선했다. 그리고 가을이 되자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전의 소설들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선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그를 소설가 이외수에 비하곤 한다. 정말 독특하기로는 이외수 못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말투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이외수는 거침없이 말하는 쪽인데 비해 박민규의 말투는 어눌하다. 내가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매력적이긴 하다. 그런 사람에게선 뭔가 할 말이 많아보이고, 풍부한 느낌의 소유자일거라고 상상해 보곤한다. 단지 그것을 말로 푸는 사람이 아닌 부류라고까지 생각하는 건 지나친 상상일까?

그의 다른 소설은 어떨지 몰라도, 이 소설은 정말 독특했다. 박민규에 대해서는 세인의 말들이 구구한가 보다. 어떤 사람은 좋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그의 이전 소설들을 별로 접해 보지 않은 나로선 이 작품은 '비교불가'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고, 단지 독특하다는 느낌만으로 나는 좋았다고 말할 뿐이다.

우선 이 소설은 읽고 있으면 재즈를 연상시킨다. 음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선 재즈의 깊고도 오묘한 세계에 대해 말할 자격은 없겠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 아는 건 즉흥과 변주가 가능한 그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은 음악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안다. 물론 그 때문에 재즈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쉽게 받아 들여지는 않는 것이기도 하다.  <핑퐁> 역시 그랬다. 읽기에 따라선 낮설고 지루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탁구가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 운동종목이 이 소설을 이해 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단지 작가는 기승전결에 구애 받음이 없이 기본적인 골격만을 가지고 그때 그때 떠오르는 연상에 따라 글을 채워넣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나는 여기서 마이너리티를 생각해 본다. 한때 나도 창작을 배운 적이 있지만, 강사들이 가르쳐 주는 소설 쓰기의 공식이 있다. 그들은 조금 조금 다르긴 하지만 큰 골격에서는 하나 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 인물은 이렇게 구축을 하고, 배경을 좀 더 튼튼히. 기승전결은 이렇게 등등. 물론 그들은 현장에서 뛰는 명망있는 작가들이다. 작가지망생들에겐 정말 진짜 작가가 되는 게 소원이겠지만, 그들에게서 사사를 받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는 신춘문예를 뚫기 위한 비법전수는 아니었을까? 작가가 되는 길이 꼭 그렇게 신춘문예 내지는 모 문학지 신인작가상을 받아야 가능한 걸까? 요즘 이 장르가 뜨고 있으니 이 방면의 글을 써 볼까? 나는 이렇게 쓰고 싶은데 독자들은 이런 것을 원하고 있으니 이렇게 써 봐야하지 않을까란 경계선생의 유혹이 왜 없을까? 그러다 보면 그들이 쓰는 소설은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 항상 다루는 등장인물이 하나 같이 잘 나가는 사업가, 의사, 변호사인 것처럼 작가 역시도 그런 인물들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늘 비슷한 인간군만이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에 가리워져 있다. 그런 획일화 된 사회를 어떤 작가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싶어한다. 화려하고 그럴듯한 것에만 시선을 고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 사회의 소외계층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 운동가가 소외계층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목청을 높이면 뭘하겠는가? 그들의 백마디 구호 보다 이런 <핑퐁>같은 소설을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여 보인다.

물론 작가 박민규는 어떤 사회주의 이상을 바라고 이 소설을 쓰진 않았으리라. 그냥 자신이 오래 전에 알았던 중학생 두 명에 관해 소설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썼을 것이다. 작가는 왜 그처럼 소외계층을 소재로 글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 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모모하지 않으면 모모할 수 없는. 이 형식주의과 권위주의를 거스르고 싶은데도 어느 샌가 모르게 거기에 눈을 두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마땅치 않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주류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비주류의 삶도 삶일텐데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유독히 눈에 띄는 건 쉼표(,)의 문장부호 였다. 어느 저명한 어른께서는 문장부호의 남발을 지적해 나 역시도 못 쓰는 글이긴 하지만 문장부호를 너무 많이 쓰는 건 아닐까 신경이 씌이곤 했는데, 박민규는 지나치리만치 문장부호를 쓰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도 어쩌면 작가의 자유로움이라면 자유로움이라고 인정해 주자.  하지만 내내 들었던 생각은 왜 <핑퐁>일까 였다. 전체를 아우를만한 단서는 그다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단지 핑퐁이란 건, 내 생각에 인류가 깜박해버린 것과 절대 깜박하지 않을 것 간의 전쟁인 셈이야.(219p) 란 말을 되내어 보는 수 밖에.

어찌보면 주류적 글쓰기 보다 비주류적 글쓰기가 더 자유로워 보인다. 형식에 얽매임도 없이 재즈처럼. 이렇게 자유롭게 글을 쓸 수만 있다면 나의 글쓰기에 좀 더 용기를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 난 왜 이리 눈치를 많이 보고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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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1-0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즈같은 소설... 읽고 싶어집니다. 꾸욱~

마태우스 2006-11-0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는군요. 재즈같다구요...으음. 사놓고 냉장고 위에 놔뒀는데 읽고 싶어지네요 . 운동보다 이 책이 더 많은 걸 알게 해주나보군요. 으음...

stella.K 2006-11-0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네. 읽어보세요. 추천 고마워요.^^
마태우스님/야호~! 나 오늘 마태님께 추천 받았다!!!!!!!

가시장미 2006-11-08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읽지 않고 있는책. ㅠ_ㅠ 보고싶어요. ㅋㅋㅋ 리뷰도 멋지십니다!

stella.K 2006-11-0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봐. 괜찮은 것 같아.^^
 
오! 행복한 카시페로 마음이 자라는 나무 9
그라시엘라 몬테스 지음, 이종균 그림, 배상희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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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이던가? 우리와 같이 사는 다롱이를 정관수술을 시켜 주었다. 그냥 여느 돌아다니는 개라면 그런 수술을 시켜주고 말고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롱이는 사람과 함께 사는 애완용 개인만큼 사람과 함께 살려면 필수적으로 해 주어야 했다. 정관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괜시리 녀석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도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온다. 어떻게 운 좋게 애완용 개로 발탁이 돼 사람 손에 잠시 머물지만 그것이 좋을 것 같아도 사실은 굴욕적이었다고. 하지만 실재로 개는 길들여지는 존재로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을 굴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가끔 TV에도 보면 심하게 사람 손에 의해 길들여진 개들을 본다. 그들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 냄으로 머리가 좋은 개로 판명이 되고, 주인은 좋아라 하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곤 한다. 어려운 미션을 완수해 내는 개는 확실히 똑똑한 개라고 할 수 있긴 하겠지만, 자기네들 세계에서는 그것을 서로가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할지는 사람인 우리로선 모를 일이다. 어떻게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만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개의 관점에서 인간을 풍자해 내는 작가의 필치가 확실히 노련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개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풍자하려고 했던 것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청소년 문학이란 장르를 표방했던 것만큼 청소년들에게 확고한 자기 정체성과 세상의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읽으면서 공연히 이 세상에 대해 화가 나기도 했다.  왜 세상은 그렇게 꿋꿋하게 용기있게 헤쳐 나가야 할 대상으로만 이해되고 소통되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시각들이 있을텐데 좀 더  공존하고, 화해하며, 서로 평화로이 잘 사는 그런 패러다임 가지고는 설정이 안 되는 것일까?  청소년. 아직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굳어지기 전, 그 나이에 세상은 어려운 것이며 험난 하다고 자꾸 주입해 주고, 그러기 때문에 도전 정신을 가져야 하고, 실력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경쟁적이 돼야 한다고 자꾸만 몰아 붙여준다면, 과연 그들이 앞으로 살 2,30년 뒤는 정말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좋고, 편안하고, 안락한 것만 가지고는 이 세상을 잘 살 수가 없다. 그러면 바보가 될 것이다. 인류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고,  역경과 여려움이 없다면 퇴보하기 마련이다. 역경을 뚫지 못하면 어떤 누구에게도 그 존재에 어울릴만한 이름을 부여받을 수 없다. 카시페로란 이름은 주인공 개가 마지막으로 갖게 된 멋진 이름이다. 이 이름을 소유하기 까지 그 개는 한낱 보잘 것 없는 개였고, 이름도 그냥 그것에 걸맞는 이름을 소유했을 뿐이었다. 카시페로란 이름은 가히 성경의 야곱이 온갖 시련을 다 이겨내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하나님께 하사 받은 것과 맞먹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란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실존주의에 매료되는 것 같다.

저자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이 소설의 양식은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한다. 피카레스크 소설이란은 하층계급 출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자기자신과 상대방의 생활을 풍자대상으로 삼는 풍자문학을 뜻하는 것이 한다. 그것은 매력적인 소설 분야인 것 같다. 하지만 난 왠지 이 소설이 자꾸 말미에 갈수록 사람의 관점을 부여하는 것 같아 김이 빠졌다. 끝까지 팽팽하게 개의 관점을 유지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서로를 위해 주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좋긴 하지만, 기왕 파카레스크 소설을 지향하는 거라면 굳이 영웅 만들기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하층민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드러낸 것은 아닌가  하여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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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5 0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10-25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롱이 만세!!
소설과 상관없이 스텔라님 서재의 등장견물이니까요.

stella.K 2006-10-25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4:28분님/그 시간까지 잠 안 주무시고 제 글을 읽으셨다니...흐흑~! 말씀하신 부분은 고쳤습니다. 요즘 마음이 바빠서 오타 무지하게 많네요.>.<;;
가끔 제 서재 이름을 '백세주가 있는 서재'로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 어느 분의 서재 이름과 너무 닮은 듯하여 자제하고 있습니다요. 난 백세주가 그렇게 좋더라! ㅎㅎ

니르바나님/우리 다롱이를 이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